🧑‍💻 호의 ⌜일과 자신과 나⌟

일과 자신과 나

월요일 아침이었고 다섯 번째 알람을 끄려고 할 때쯤 배께 부분에 물혹 같은 게 손에 잡혔다. 병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에 재택근무를 신청했지만 아침 9시부터 예약사이트가 오픈된 것처럼 카톡과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대표님 저 오전에 업무 보다가 오후에 병원 좀 다녀오겠습니다. 결재받은 게 무색할 만큼 오후 7시 즈음 집 앞 약국에서 소염제 따위나 겨우 사 올 수 있었다. 서글플 겨를도 없이 다음날 아침부터 있을 촬영지까지 얼마나 걸리는가 지도를 찍고 기억나지 않을 타이밍에 잠에 들었다.

며칠 뭘 먹어도 자꾸 구토가 일어 소분된 죽으로 끼니를 때웠다. 중요한 발매를 앞두고 긴장한 탓인지 한동안 위약을 복용하던 참이었다. 일본 여행을 간 혜정이 기념품을 묻길래 카베진 두병을 사다 줄 수 있는가 물었다. 생리 때도 아닌 데 피부가 뒤집어진 데다 퉁퉁 불은 종아리가 유난히 불쾌한 날이었다.

회사에 마지막 불을 끄고 나오는 건 나여야 한다는 어떤 책임도 버렸다. 도저히 버텨보아야 내일 있을 스케줄에 지장만 될 것 같아 사원들을 남겨두고 퇴근했다. 매일같이 새벽 택시로 귀가를 하다 오래간만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니 모르는 사람들과 부대끼는 게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여기까지 쓰고 또 졸았다. 피로에 이기는 법을 모르겠다. 속수무책으로 다 내려놓고 잠들어버리고 만다.

오늘은 흰머리를 뽑았다. 주 7일 근무를 두 바퀴 돌리고 나서 무거운 몸으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참이었다. 거울에 비치는 한 가닥. 얼마 전에도 퇴근길에 하나 뽑았는데 말이지. 흰 것은 지치는 날마다 지나칠 수 없이 눈에 띄고 만다.

발매 첫 주 주말엔 방송이 예상보다 빨리 마무리되어서 당일 시술 가능한 네일숍에 가 젤 연장을 했다. 그랬더니만 메신저랑 키보드 자판을 칠 수가 없다. 젓가락질도 안돼서 면 요리를 엉망으로 먹는다. 어제는 심지어 스태프 주차 정산 때문에 정산 기계에 카드를 꼽았다가 도로 집어 빼는 게 안돼서 여럿 귀찮게 한 적 있다. 기분전환으로 월세 돈만큼의 비용을 지불했건만 일의 능률이 이렇게나 저하될 줄은 몰랐다.

일을 하면서 느끼는 어떤 필요와 불편에 대해 가끔 회의가 드는데, 바로 라식 수술이다. 시력이 나쁜 나는 매일 원 데이 콘택트렌즈를 끼고 다닌다. 달에 9만 원 정도를 투자하여 원 데이를 고집하는 이유는 그게 그나마 덜 건조해서다. 새벽까지 눈떠있는 시간이 길고 집에 도착하면 세척할 기력도 없으니 체력을 돈으로 세이브 한 셈이다. 도저히 이물감에 렌즈를 빼야만 하는 시점엔 안경으로 바꿔끼는데, 안경을 끼면 속이 안 좋고, 렌즈가 무거워 콧대가 아프고, 두통이 인다. 시력이 안 맞다기 보다 그냥 안경이라는 것은 온통 불편한 도구다. 라식수술을 할 타이밍을 생각해 본다. 아무리 회복이 2-3일 만에 가능하다고 한들 부작용이 무서워 일주일은 푹 쉬어야 할 텐데, 그렇게까지 휴가를 쓸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전국투어가 끝나는 4월엔 가능할까. 그때는 페스티벌 시즌이다. 이렇게 7년 넘게 휴가를 못 써 수술을 못했다. 

마지막 원고를 쓴 지 6주, 아니 이번 원고도 지각했기 때문에 대략 50일 정도의 시간이 있었음에도 아직 완성을 못한 것은 내 머릿속이 온통 일로 가득해서다. 쓸 수 있는 에너지가 모두 일에 몰입되어 있고 그 외의 일상생활이 빠른 속도로 붕괴되고 있다. 친구들이 재밌다고 하는 본디를 할 힘도, 슬램덩크를 보러 갈 여력이 없다.

너무 추운 새벽에 좀 더 두껍고 무거운 이불을 주문한 적 있다. 그리고 아직도 택배를 뜯지 못했는데 봄이 오려는 준비를 하고 있다. 얼른 뜯어서 빨래방에 다녀오고, 원래 쓰던 침구도 깨끗이 빨아 보관해야 하는데 그럴 체력이 없어서 내리 현관의 디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빨래도, 분리수거도, 냉장고에 썩어가는 샌드위치들도 눈앞에서 치우기 위해선 큰마음을 먹어야만 한다. 간밤에 주문한 과일들도 냉장고 안에서 얼어간다. 위가 쓰리면 밥을 먹고 약을 먹으려면 밥을 먹고, 야근을 하면 보상심리에 밥을 먹는다. 그러나 독립하는 날 엄마가 챙겨준 총각무는 아직 내 냉장고 제일 위 칸에 그대로 있다. 

어제는 대체휴무를 신청하고 피부과에 갔다. 4시 예약이었던 것을 다른 업로드 건 때문에 6시 넘어서 도착했다. 1시간 반 정도 휴대폰 충전을 맡기고 숍을 나서는데 카톡과 부재중에 불이 나있다. 잠시간 연락이 안 된 것에 대해 죄송하다는 말은 하루에도 몇 번씩 한다. 쉬는 날에 일하는 건 익숙하지만 단 몇십분도 휴대폰을 손에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은 내 마음을 낡게 한다.

인생을 바쳐서 일을 하고 있다. 나도 여느 때처럼 친구들의 생일 선물을 오래 고민하고, 아무 날이 아니어도 보고 싶으니 만나자고 하고, 독립영화를 보고 싶은 날엔 즉흥적으로 극장으로 향하고 한동안 감상에 빠지고 싶다. 노래를 디깅 하다 너무 좋아서 콱 죽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고 싶고 길가에 핀 꽃이나 고양이 사진을 찍고 싶다. 그러나 나는 슬프게도 (이미 느끼고 있겠지만) 시와 글을 놓은 지 오래되었다. 오늘의 나는 어떻게 해도 사랑이나 따뜻함, 아름다움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 설령 내가 그것들에 대해 말한다면 모두 가짜다. 너무 사랑해서 추했던 시절은 어제 같다. 오늘은 일하는 내가 있다.

일이 자신이 된 데에는 사소한 사유가 있었다. 무기력하던 스무 살 초반에 만난 X는 학생이었던 나와 헤어지고서 어느 매체 인터뷰에 본인의 이상형에 대해 말한 적 있다. (헤어지고도 그 사람을 열심히 찾아보았다.) 

- 저는 ‘자기 일에 욕심 있는 사람’이 좋아요. 

당시의 나와 반대되는 말에 그날 이후로 시달리듯이 직업을 찾고 몰두하고 기회가 있으면 뛰어들었다. 업계에서 자리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어떤 야망이나 나만의 레이블을 론칭하겠다는 거창한 목표는 없다. 그냥 일을 해야 마음이 놓였다. ‘일하는 나’여야지 맨 쓸모가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마침 내가 하는 일은 ‘적당히’가 불가한 일이다.

A&R이라는 직업의 이름이 한국에서 불리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회사와 아티스트의 성향에 따라서 담당하는 일이 너무나 다르고, ‘A’rtist에 대한 전반적인 ‘R’epertoire를 담당해야 하기 때문에 업무의 스펙트럼이 아주 방대하다. 아티스트가 공연을 하는 동안 그의 아이가 울지 않도록 돌봐주는 일을 하기도, 작업실의 음식물 쓰레기 배출을 위해 구청에 전화를 하기도, 공연장의 MD 물류 적재 동선을 정하기도 한다.

나는 쓰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많은 내 직업이 좋다. 몸이 아프고 여가가 없고 하는 일이 늘어나는 만큼 문제도 많이 발생하지만 고생하는 만큼 보람도 크다. 아티스트가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게, 그 외적으로는 믿고 맡길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음악’에서 파생되는 콘텐츠, 마케팅, 부가 사업들에 전력을 다하고 흥미를 느낀다. 운이 좋게도 내가 마음 다해 좋아할 수 있는 자신만의 음악을 하는 싱어송라이터를 담당해왔고, 현재도 너무 훌륭하고 멋진 음악을 맡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음성녹음’을 ‘노래’로 만들고 그것을 ’문화’로 만드는 과정은 나를 한껏 고양되게 한다.

단독 공연을 앞둔 지금 하루빨리 첫 공연을 올리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인다. 아티스트가 목만 축여도 행복한 팬분들께 영혼을 담은 신곡을 코러스가 포함된 라이브로 들려드리고, 근사한 연출과 비주얼로 잊을 수 없는 멋진 기억을 선사할 생각에 주말을 마다하고 피드백을 주고받고 있다. (20년 전에 본 동방신기 단독 공연 중 I’ll be There 무대에서의 꽃가루 연출은 아직도 눈에 선연하다.) 더군다나 공식 응원봉을 출시하고 처음 올리는 공연이기 때문에 중앙제어를 통한 객석 연출도 너무나 기대된다. 이어지는 전국투어를 통해 각 지역의 다양한 컨디션의 공연장 경험도 쌓고 맛있는 휴게소 회오리 감자도 먹고 일석이조! 대구 부산 대전은 가봤지만, 용인과 광주는 한 번도 가본적 없는 도시다. 덕분에 알은체 할 수 있다.

작년 말 처음으로 엄마를 공연에 초대했다. (아빠는 발라드 아니면 관심이 없고, 엄마가 좋아하는 남자 가수에 질투를 하신다) 살면서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보는 게 처음이라며, 거기에서 일하는 딸의 모습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고. 그날 이후로 매일 유튜브에 내가 담당하는 아티스트의 영상을 찾아보고, 출퇴근길이나 메이킹 영상에 잡히는 찰나로 내 근황을 확인한다. 한 번은 라이브 방송 도중 아티스트에게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전달하기 손을 뻗었는데 그것만 가지고도 우리 엄마는 ‘아까 구석에 나온 손 우리 딸 맞지~?’ 란다.

제작에 뜻이 없다면 사실 A&R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다. 트렌드에 민감하고, 팬들의 성향을 잘 파악해야 하며 담당 아티스트와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선 사실상 10년도 채 안 남았지 싶다. 그때가 되면 여전히 엔터 일을 하고 있을 리 만무하지만, 어쨌든 일을 하면서 친구들 약속에 지각하고 있을 것 같고 바라기를 지금보다는 내가 더 많아져서 쉽게 흔들리거나 무력하지 않길. 그때도 여전히 눈을 반짝일 수 있길. 그리고 늦은 아침 입안이 헛헛해 혀로 볼 안쪽을 긁어보는 날에도 자신을 위해 커피를 내리고 밥을 데우길.

일과 자신과 나

完

p.s 물혹은 소염제를 먹으니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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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제형 - 일과 자신과 나

마음을 움직이는, 움직였던 문장들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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