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랑의 「그러니까... 편지#2」

자유로운 사람은 죽음을 가장 적게 숙고한다.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해 명상하는 것에 있다.

스피노자. 『윤리학』, 4부, 정리 67

  그러니까 언젠가 슈뢰딩거가 말한 것처럼, 세계는 우리의 감각과 지각과 기억으로 구성된다. 그의 말처럼 세계가 그 자체로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리하다. 그러나 그가 지적한 것처럼 세계가 단지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에게 자동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분명 아니다. 우리의 세계는 우리의 의식과 연결됨으로써 우리에게 드러나고, 우리의 감각과 지각을 통해 세계의 사건들을 인지하고 그것들을 순간의 기억으로 구성할 때야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의 의식은 어떤 살아있는 유기체로서의 우리 인간의 내부에서, 조직화된 수많은 물질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사건들 속에 존재하며 그 사건들을 기초로 우리는 다시 세계의 수많은 사건들과 연결된다. 살아간다는 것은 매순간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이고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은 이 세계와 의식적으로 연결되어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의식이란 무엇인가. 오늘은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볼까 한다. 의식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삶에 있어서 한번쯤은 던져볼만한 질문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현재의 내가 감히 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은 아니다. 또한 현재까지도 많은 저명한 철학자들과 과학자 그리고 과학자인 동시에 철학자인 이들도 그것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는 못하고 있다. 스피노자와 많은 범신론자들과 물활론자들, 신경과학자들, 생물학자들 심지어 물리학자들 각자 자신의 영역을 공고히 지키고 있는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서로 다른 관점에서 유추되고 연구되고 짐작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조금 비약해서 말하면 현생인류인 우리는 우리가(모든 동물이) 정확히 어떤 이유로 어떤 방식으로 동작하며 이 세계와 연결되고 세계를 작동시키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나날이 이 세계를 살아가고(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술을 잔뜩 마셨다. 연달아 줄담배를 피우고 지칠 때까지 소주든 맥주든 와인이든 속에 부어넣고 좀처럼 가능하지 않은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불가능한 미래를 예측하고, 늦은 밤 차를 몰아 어디로든 떠나고 잘 알지 못하는 나라로 떠나는 비행기 표를 사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사건들에 대해 알은 체를 하고 떠들어댔다. 물론 과거에 그랬다는 말이다. 그러나 나의 근원에 존재하는 근본은 지금도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여전히 세상의 작동원리를 잘 모르고 내가 왜 존재하는지, 나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는 나의 의식조차 왜 존재하는지도 모르는데다가, 심지어 오늘 저녁에 무얼 먹을지도 잘 모르는 하나의 인간이다. 그래도 어쩐지 생은 잘만 흘러간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오늘 오전엔 차를 운전해서 치과에 다녀왔다. 치과는 이곳에 이사 오기 전부터 다니던 곳으로 현재 살고 있는 집에서는 대략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다. 서울의 도로는 여느 때처럼 북적거렸고 몇몇 차들은 조금이라도 더 빠른 길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차선을 변경해댔다. 이따금 방향지시등도 켜지 않은 차들이 내 앞에 끼어들었고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속도를 늦추거나 앞서 달리거나 했다. 많은 이들이 그렇겠지만 혼자 운전을 하며 먼 길을 가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상념에 빠져들기 쉽다. 오늘도 그런 하루 중의 하나였다.

  청담대교를 건너 강북대로에 진입하고 얼마 되지 않아 짙은 선팅을 한 독일산 차량이 빠른 속도로 내 앞으로 끼어들었고 나는 순간 그 차의 운전자가 인간이 아닌 돼지가 아닐까 하고 상상하기 시작했다. 끼어드는 행위가 무례해서 라거나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상상을 해보았을 뿐이다.(정말이다) 분명 무척 급한 일이 있는 돼지이리라 생각하며 나는 브레이크 페달을 지그시 밟았다. 내 차 앞으로 매너 없이 끼어들고 있는 어쩌면 어떤 긴박한 사정이 있는, 사실은 고도의 지능을 갖추었으며 꽤나 확고한 정치적 신념과 특정 전공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섭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저 돼지(어쩌면 서울 모처의 의사일지도 모른다. 수술 전담 외과전문의. 오늘도 긴급한 수술이 잡혀 황급히 병원으로 가는 길일지도. 응급환자가 수면마취에 빠져 잠에 들면 전공 N년차 빼어난 솜씨의 외과전문의가 수술 방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의 존재는 일급비밀인 동시에 병원 관계자들 사이에선 공공연한 비밀이다. 뛰어난 의술을 가진 그가 왔으니 이제 환자는 괜찮을 것이다. 다만 문제라면 그 외과의가 돼지라는 점뿐이다...)와 대충 생각하고 대충 놀고 대충 웃고 대충 살고 대충 치과에 운전해서 가는, 대충 다른 차 끼어들기를 양보해주는 나. 인생이란 어려운 것 같으면서도 사실 너무 쉽고 너무 쉬운 것 같으면서도 너무 어려운 것이다. 돼지와 나 또는 나와 돼지라는 궁극적인 이분법 혹은 어쩌면 동일한 존재의 구분이라는 무의미한 행위. 의사로 살아가는 돼지의 삶을 상상해본다. 역시 뭐든 쉬운 일은 없단 생각이 든다.

  작가 우나무노를 아시는 지? 스페인의 소설가 미겔 데 우나무노. 사실 나도 잘은 모른다. 내가 아는 거라곤 그가 스페인 출신이라는 점과 조금 지루하지만 짜증나게 좋은 소설을 몇 개 썼다는 것뿐이다. 그의 소설은 지루하지만 지루하지 않고 질릴 것 같다가도 이상하게 다시 읽게 되는 매력이 있다. 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머릿속은 어지러워졌다가 어느새 모든 것이 사라지고 소설 인물들만이 나와 말을 건다. 물론 『안개』 한정이다.

  전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나는 어떤 지역에 가면 그 지역과 관련된 내용의 소설이나 그 국가의 작가가 쓴 소설을 읽는 취미가 있다. 교토 금각사에 놀러갈 일이 생기면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를 챙겨간다거나 그리스에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는다거나 하는 식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스페인에 갈 일이 있어서 그의 소설을 챙기거나 하진 않았다.(그랬다면 좋았겠지만) 전에 스페인에 한 달 반 정도 있었지만 당시 원래는 스페인에 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스페인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뒤 우나무노를 찾아 읽었을 뿐이다. 여튼 여기에 그의 소설 중 일부를 소개한다.

  여러분은 행복한가? 나는 이 글을 쓰며 제법 행복을 느끼고 있다. 나는 자본으로 살찌운 몸 속 칼로리와 시간과 어디선가 끌어온 전기와 난방 가스와 여러 가지 공공 인프라들을 맘껏 소비하며 이런 쓸데없는 상상을 하고 쓸모없는 글을 쓰고 있다. 이런 짓을 기꺼이 할 수 있으니 제법 행복한 인생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소개한 스피노자의 말에 따르면 난 제법 자유로운 사람이다. 이유가 무엇이 됐든 끊임없이 삶에 대해 숙고하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숙고는 질리게 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리고 내게 삶에 관한 상념에 잠기는 일은 도통 질리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러분은 동물에게도 의식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과거에는 의식이 오직 인간에게만 국한된 정신활동이라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그다지 오래된 과거도 아니다. 고전 철학자들은 인간은 시를 쓸 수 있지만 토끼는 그렇지 못하니 동물에겐 의식이 없다는 식의 논리를 펼쳤다.(꽤 재밌는 삶이 아닌지) 최근 과학자들은 fMRI(기능적 자기 공명 영상)를 통해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느낄 때 뇌 속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조사하며 의식의 실체를 규명하려고 애쓰고 있다. 또한 많은 신경과학자들은 해부학적인 방식을 통해 인간의 뇌와 동물의 뇌를 비교 연구하고 있다. 연구결과에 의하면 다른 동물과 비교해 인간은 전두극(frontal pole)이라는 부분이 유달리 발달해 있는 점이 다르다. 전두극은 뇌의 전전두엽피질에 있는 호두만한 크기를 가진 부위로 우리가 생각을 떠올리면 그것을 자유롭게 떠올릴 수 있는 빈 공간, 즉 마음의 스케치북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특히 모든 선택과 결정에 관련된 의식적인 활동을 관장하고 있는데 사람에 따라 배외측 전전두피질(dorsolateral prefrontal cortex)을 통해 우리의 일과 관련된 의식적인 활동을 더욱 강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식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 외 여타의 동물에게 의식이 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인다. 최소한 있더라도 아주 미약한 수준에 그칠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뉴욕대학교의 신경과학자이며 정신의학자인 조셉 르두(Joseph LeDoux)교수는 “동물들은 사람과 다른 방식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의식을 강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사람을 기준으로 하는 연구에서 다른 동물들의 의식 활동이 간과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동물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사람과 다른 방식으로 의식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증거들이 최근 연구 결과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앞선 슈뢰딩거의 말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매순간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이고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은 이 세계와 연결되어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동물에게도 의식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조셉 르두의 주장에 따른다면 모든 동물들, 모든 생명체들 역시 자신의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사고하며 존재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론 조셉 르두의 손을 조심스레 들어주고 싶다. 우나무노의 소설 속 오르페오의 그것만큼 고도로 발달된 의식만큼은 아니더라도 모든 동물에겐 각자 나름의 의식이 존재한다고 믿고 싶다.

  그래서 뭐 어쨌다는 것인가?

  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전부다. 이런 허망한 결말에 너무 황망해하거나 화내지 않았으면 한다. 약간의 변명을 하자면 애초에 특별히 어떤 주장을 펼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최초에 말했듯 의식의 존재는 현재까지 과학적이든 철학적이든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문제고, 그저 이번 기회에 그것에 대해 잠시 함께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했을 뿐이다. 다만 조금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면, 가능하다면 끊임없이 자기 존재에 대해 숙고해보라는 것이다. 운전 중 무작정 머리부터 들이미는 외제차에 기꺼이 내 앞자릴 양보하거나 부지불식중 나의 뺨을 후려치는 어린 조카에게 다른 쪽 뺨을 기꺼이 내밀면서, 일을 마치고 늦은 밤 집에 돌아와 적막한 욕실 문을 조용히 닫으면서. 가능하다면 끊임없이 스스로의 존재이유에 대해 회의懷疑해보길 바란다.

  모든 인간은 모순적이며 매일 매순간 자가당착과 허언을 일삼는다. 우리는 의식의 존재이유는커녕 대부분 당장 자신이 하고 있는 일조차 왜 하는지 모르면서 때때로 주변인들에게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말들을 지껄인다. 내가 그렇다. 말하고 후회하고 행동하고 후회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후회하고, 후회할 줄 알면서도 또 지껄이고 언젠가 저지른 그 일을 또다시 반복하고... 흔한 하나의 인간이다. 다만 우리는 그 모든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숙고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한번 범한 실수를 다시는 저지르지 않는 인간이라면, 그렇게 매일 매일 조금씩 나아지는 종류의 인간이라면 그것보다 좋은 일도 없겠지만, 단언컨대 적어도 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은 아니다. 등신 같은 짓을 끝없이 반복한 뒤 머리를 감싸 쥔 채 끊임없이 숙고할 뿐이다. 여러분은 필시 나보단 나은 종류의 인간이겠지만, 도움이 되길 바라며 여기에 필자가 이따금씩 긴급한 변명(정신적 비상구)으로 사용하는 말을 덧붙여둔다. 부디 여러분에게도 쓸모가 있길 바란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전혀 자기모순을 범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가 사실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 틀림없다.

우나무노(대화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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