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一日)

[틂씨의 일일] 어느 날, 또 쓰겠습니다.

2023.12.20 | 조회 1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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틂씨의 일일

네덜란드의 일인 가구 생활자 <틂씨의 일일>을 글로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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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로 돌아왔습니다. 얼마 전에 한국에 다녀왔거든요.

 

어스름한 저녁에 스키폴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기차를 타고 집에 와선 2도씩 천천히 보일러를 올리면서 온기가 돌기를 기다렸어요. 온도를 한꺼번에 올리면 가스비 폭탄을 맞을 염려가 있거든요. 18도까지 오른 온도를 확인하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서야 이 여정이 끝났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한 달여를 비워둔 집은 생각보다 더 텅 빈 모습으로 저를 맞이했습니다. 쓰던 컵과 그릇들도 모두 찬장에 들어가 있고, 냉장고도 비우고 갔으니까요. 매달린 것 없는 흰 벽이 그날따라 왜 그렇게 커다래 보이던지요.

그날 밤, 다시 위층에서 들려오는 새벽의 층간소음에 잠이 깰까 봐 긴장을 미처 놓지 못한 채 침대 안으로 숨어들 듯이 몸을 뉘었습니다. 빈 방에 놓여 있던 오리털 이불은 무척 차가워서, 몸을 내어주기 전에 물을 따끈하게 데워 넣은 고무 핫팩을 이불 아래에 잠시 두었고요. 뭐랄까, 저는 이럴 때마다 오래전에 이불속에 가장의 밥그릇을 넣어두던 엄마의 모습이 생각나요. 엄마가 정말로 그랬었던가, 아니면 그냥 드라마에서 본 기억일까. 시간이 지날수록 뭐든 희미해져서 잘 모르겠지만. 사실 이불속에 제대로 된 온기를 채우는 일은 핫팩보단 훨씬 커다란 제 몸의 체온이 구석구석 닿아야 가능하답니다. 그걸 알아도 기다리는 동안 맨 몸보다는 기댈 구석이 있는 편이 좋더라고요.

다행히 그 날밤엔 잠에서 깨지 않았어요. 그럴 법하죠. 전날 한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꼬박 새웠는데도 아침 비행기를 탄 덕분인지 비행시간 동안 깨어있었거든요. 무엇보다, 열네 시간의 비행 내내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눈물을 참기도 했고요.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어요. 엄마가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그렇게 속상했던가, 아니면 그걸 걱정하는 자신이 겁이 났던가. 아니면 내가 어느 세계에 속하는지 헷갈리는 초현실감 때문일까.

이유는 몰라도, 오래도록 우는 일은 에너지 소비가 많았어요. 악뮤의 음악을 들으면 잠시 멈추었다가, 또 눈물이 또르륵 흐르고요. 간신히 고른 영화 <소울메이트>를 볼 때에 다시 집중했다가도 영화가 끝나면 다시 눈물이 터졌어요. 마치 물이 가득 찬 컵처럼요. 물을 끝까지 채우다 보면 컵의 용량을 초과한 물이 볼록하게 장력의 힘으로 겨우 찰랑거리며 매달려 있을 때가 있잖아요. 잘못 건드리면 투두둑, 하고 흘러넘치는. 원래 그렇게 흘러넘치고 나면 잠잠해져야 하는데, 이번엔 이상하게도 물이 끊임없이 차올라 새로운 장력을 만들어내는 기분이었어요. 그 물을 엎지르고 싶지 않아서 정말로 조심했거든요.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어떤 것도 연상하지 말자, 하고 무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만 잘 되지 않았어요.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넘쳤죠. 투둑, 투두둑.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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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은 어쩐지 개운한 얼굴로 일어나 스무 개가 넘는 화분에 물을 주었습니다. 엄마와 짧은 영상 통화도 했어요. 공항에서 눈물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헤어졌으니까, 웃는 얼굴을 보여줘야 할 것 같았거든요. 한 달간 바닥에 쌓인 먼지도 밀대로 밀었습니다. 믿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사한 지 일 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청소기를 사지 못했어요. 새건 너무 비싸고, 중고는 너무 못마땅해서 그랬죠. 뭐든 다 그렇더라고요. 내 맘에 드는 깨끗하고 적당한 중고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요. 있어도 원하는 타이밍에 눈에 띄기 어려울 테고요. 어두운 색 빨래를 한 판 돌리고, 가까운 마트에 가서 기본적인 식료품들을 사 옵니다. 계란이나 우유, 토마토 같은 것들 말이죠. 뭘 해먹을지 몰라도 미리 사두어서 나쁠 것 없는 재료들이 있잖아요. 어떻게든 쓰게 되고 유통기한도 긴.

이제 책을 읽어볼까. 해외에서 지내면 한국어 책이 귀해지거든요. 쌓이면 꽤 무거운 짐이 되는 터라 쉽게 사기 어려워요. 게다가 제 캐리어는 이미 누룽지나 사리곰탕면, 코인육수, 아귀포와 잔 멸치 같은 것들로 꾹꾹 눌러 차 있었어요. 한 번 읽고 치워둘 책은 살 수 없죠. 그 힘든 경쟁을 뚫고 이번에 캐리어에 탑승한 책은 두 권이었습니다. 오지은의 <당신께>와 캐럴라인 냅의 <명랑한 은둔자>. 두고두고 읽고 싶더라고요. 하지만 현대인이란 자고로 릴스나 숏폼의 노예가 되어 시간을 보내는 편이 쉽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라는 드라마도 먼저 보기 시작했고요. 

장애물은 하나 더 있었습니다. 휑한 집을 빛으로라도 채우고자 하는 욕망이요. 유럽 사람들은 11월, 그러니까 할로윈이 끝나고부터 이미 크리스마스 맞이 집 꾸미기를 시작하거든요. 저는 늦었죠. 벌써 12월의 중순을 향해 가니까. 제가 가진 건 중고 가게에서 산 10m짜리 트리 전구와 이케아에서 사둔 커다란 별 조명 두어 개가 전부지만요. 살짝 언급했지만 아직도 이 집은 층간 소음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고요, 그래서 인테리어는 여태껏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일단은 조명을 둘러 포근한 분위기를 만들어야 겠다 싶었죠. 별 조명을 천장에 걸어두면 꽤 근사해 보이거든요. 그 옆 다이닝 테이블과 책장에는 반짝거리는 트리 전구를 두르고요. 마트에서 사 온 빨간색 포인세티아 화분을 다이닝 테이블에 얹어두면, 완성.

좋아, 오늘의 할 일 끝. 

 

크리스마스의 식물, 포인세티아 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식물, 포인세티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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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미루고 미루던 <당신께>를 펼칩니다. 오지은 작가의 메일링을 오래전부터 받아오고 있었거든요. 살면서 잊을 만할 때쯤 가끔씩 보내오는 그녀의 사사로운 이야기들이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읽을지 아닐지도 모를 답장도 꼬박 쓰고는 했죠. 그런 이가 쓴 편지를 모아 책을 냈다잖아요. 안 좋을 수가 없지. 일본 작가 하나마츠 아유미의 판화 일러스트마저도, 손에 잡히는 작은 판형에 거친 텍스쳐의 표지까지 좋더라고요.

첫 글부터 공감되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았어요. 안 되겠다, 옆에 놓인 펜 꽂이에서 흐릿한 HB연필을 꺼내 봅니다. 4B는 조금 진하니까요. 밑줄을 그을 거예요. 다짐하고 이런 스스로에게 놀랍니다. 처음 책을 읽는데 연필로 밑줄을 긋는다고? 하하, 저는 원래 책을 귀하게 보던 사람이거든요. 책을 사면 책 등을 쫙 펴지도 못하고, 이미 읽은 책도 새 책처럼 보관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책장에 쌓여가는 책들이 십 년, 이십 년이 지나게 되면서 알았죠. 소중했던 책들이 언젠가 쓸모없어지는 순간도 오고야 만다는 것을. 사실 책들이 언젠가 다른 이에게 닿거나 하면 그어 둔 밑줄이 너무 내 생각을 드러내게 될까 봐 겁이 났어요. 이 사람 우울증 이야기에 밑줄을 치다니, 우울증인가? 할 것 같잖아요. 섬세한데 소심한 사람의 걱정은 거기까지 갑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더라고요. 내 책은 대체로 내 안에서 머물다 사라지고요. 그래서 이번엔 신나는 마음으로 읽는 내내 마음껏 원하는 부분에 밑줄을 쳤어요. 기분이 엄청 좋던데요?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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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읽은 책만큼이나 다정하게 일상의 작은 마음들에 대해서 쓰고 싶어요. 

그것이 편지인지 일기인지 무엇일지 모를 이야기더라도.

 

어느 날, 또 쓰겠습니다.

 

밤이 가장 긴- 어느 겨울밤에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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