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一日)

[틂씨의 일일] 함부로 겨울 옷을 집어넣지 않는

조정의 시간

2024.04.01 | 조회 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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틂씨의 일일

네덜란드의 일인 가구 생활자 <틂씨의 일일>을 글로 전합니다.

 

 

봄입니다. 입춘(立春)도 경칩(驚蟄)도 지났으니까요. 

어릴 땐 절기가 뭔가 싶었는데(세상은 양력으로 돌아가는 데 절기는 음력이잖아요) 조상들의 지혜란 어찌나 정확한지, 자주 놀랍니다. 부모님의 생신과 명절은 아직도 음력으로 쇠긴 하지만, 외국인들에게 음력을 Lunar Calendar라고 일일이 설명하기가 얼마나 까다롭던지요. 이란에서는 3월에 새해를 시작한다고 해요. 봄이 일 년의 시작이라니 좋을 것도 같고요. 세상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방식의 봄맞이가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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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이 잘 드는 곳에는 봄 꽃이 잔뜩 피었어요. 한국의 봄이 개나리, 목련, 벚꽃 같은 거라면, 네덜란드의 봄은 수선화와 튤립인 것 같더라고요. 몰랐는데 매년 이맘때쯤에 길거리에 잔뜩 핀 희고 노란 꽃들의 이름이 수선화였습니다. 여태껏 무심코 지나던 길거리였는데, 그 꽃의 이름을 엄마에게 선물하고 나서야 알게 된 거죠. 남향의 베란다에 심어둔 노란 수선화와 붉은 겹튤립은 다행히도 거의 다 피었다고 합니다. 구근 스무 개에 소망을 담아 흙 속에 잘 묻어두고 왔는데, 꽃이 잘 피었다고 하니 얼마나 기쁘던지요! 덕분에 녀석들이 한동안 저 대신 엄마에게 봄의 정령이 되어주었다고 해요. 

부쩍 따사로운 공기를 느낄 때가 있고요, 해도 꽤나 길어졌습니다. 작년 동지 즈음부터 언제 해가 길어질까 하고 고개를 빼고 기다렸는데 그 시간이 왔어요. 6시에 일을 마치고 나면 늘 어두컴컴했는데, 이젠 6시에 건물 밖을 나와도 여전히 해가 있을 때 확실히 하루가 길어진 느낌이 듭니다. 

물론 여전히 찬 기운이 가득한 날들이 더 많지만 이젠 자전거를 열심히 타면 금세 겨드랑이에 땀이 차요. 으른이 되어간다는 건 쉽게 봄의 유혹에 넘어가 겨울 옷을 함부로 집어넣지 않는 지혜가 생긴다는 뜻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스무 살 때처럼 산뜻한 트렌치코트나 개나리색 가디건 같은 걸 입고 싶어 하기보단 진중하게 두툼하고 긴 겨울 코트를 인내심을 갖고 입는 일 말이죠. (네덜란드가 한국보다 기온이 조금 더 낮기도 하고요) 저는 아마도 4월 중순이 지날 때까지 겨울 옷을 집어넣지 못할 것 같습니다. '멋 부리다가 얼어 죽는다'고 등짝을 맞던 어린애는 지금보다 체력이 좋았나 봐요.  

 

 

묵혀두었던 선글라스를 꺼내는 일도 늘었어요. 북유럽의 햇빛은 한국의 그것보다 훨씬 세거든요. 울로 짠 비니보단 캡 모자를 쓰는 일이 늘고요. 미뤄두었던 봄맞이 집안일도 하나씩 해내고 있습니다. 집에 실버피쉬(검색을 권하지 않아요, 다리가 많은 벌레입니다. 네덜란드에는 흔해요.) 약도 뿌렸고요. 약 냄새가 독해서 반나절 이상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켜야 하거든요. 겨울에는 난방 때문에 환기를 오래 하기 어려우니까요. 아, 분갈이도 했어요. 뿌리가 꽉 찬 아이들을 좀 더 큰 화분으로 옮겨주고, 영양이 많은 새 흙을 담아주었죠. 따뜻한 계절에 쑥쑥 커주면 좋겠다아. 아, 꽃과 식물 얘기를 너무 많이 늘어놓았나요, 제가.

 

마냥 좋기만 하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아요. 시간이 속절없이 가는 것 같아서 가끔은 무섭기도 하거든요. 코로나시절엔 어느 날 걷다가 공기가 뜨끈해지는 걸 느꼈을 때 되게 겁이 났어요. 아무런 준비도 안 됐는데 뭔가 갑자기 해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달까. 누군가 이불을 걷어 치우면서 등을 떠미는 느낌. 봄이니까, 당장 나가서 뭐라도 해내! 하고요. 저는 왜 이렇게 스스로를 몰아붙이는지 모르겠어요.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데도 제 머릿속의 감시자는 가시 돋친 말들을 자주 내뱉습니다. 그게 실은 무엇을 실제로 해내는 데에 그렇게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고 해요. 그런데도 매번 반복하는 걸 보면, 뇌에 그런 고속도로가 하나 난 것 같기도 합니다. 봄엔 준비-땅-시작, 하고요. 

 

 

여기선 아무래도 한국에서보다 많이 걷고 자전거를 타니까요, 날씨를 늘 온몸으로 맞게 됩니다. 한국처럼 오늘의 날씨는, 하는 게 아니라 당장 한 시간, 삼십 분 단위로 날씨가 자주 바뀌기도 하고요. 겨울 내내 햇빛을 거의 받지 못하다 보니 모두들 한마음으로 봄을 기다려요. 빛이 나면 다들 테라스로 뛰어가서 광합성을 하고요. 더치식 봄이 조금은 와닿으셨을까요? 

당신의 봄은 어떤지, 궁금하네요. 한국에서 맞는 봄은 어떻게 오는지도요. 

 

 

 

+ 참, 오늘 밤엔 유럽 전역에 섬머타임이 시작되었습니다. 해가 길어지고 있단 이야기임과 동시에 새벽이 한 시간만큼 짧아지는 이상한 밤이에요. 컴퓨터와 폰의 시간은 자동으로 맞추어지지만, 매뉴얼로 조정되는 오븐의 시간은 여전히 한 시간 뒤처져 있더라고요. 저마다에게 약간의 조정의 시간이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천천히 시간을 돌려 맞추어 놓으면 되겠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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