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一日)

[틂씨의 일일] 노오란 튤립과 티라미수

그리고 밤양갱

2024.02.25 | 조회 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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틂씨의 일일

네덜란드의 일인 가구 생활자 <틂씨의 일일>을 글로 전합니다.

 

 

노오란 튤립 한 다발을 들였습니다. 벌써 십 일째인데 매일 놀라요. 너무 예쁘게 잘 피어주고 있거든요. '튤립의 나라'로 불리는 곳에 살면서도 튤립을 직접 사 본건 처음이라 이렇게 오래갈 줄 몰랐어요.

 

튤립을 산 건 갑자기 심한 감기에 걸렸던 날입니다.

이유는 확실히 모르겠어요. 새해부터 큰 마음먹고 다시 다니기 시작한 운동이 무리였던 건지, 아니면 전날 친구네서 저녁을 먹고서 소나기를 쫄딱 맞으며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오던 길이 너무 추웠는지. 무엇이 되었건, 진짜 대찬 감기에 걸렸습니다. 그날 새벽 갈비뼈 안쪽에서부터 올라오는 묵직한 기침 때문에 잠에서 깰 정도였으니까요. 반쯤은 잠에 취해서도 뭐지, 이건? 싶은 기분 있잖아요. 뭔가 심상치 않은 게 왔다, 망했다 싶은 느낌.  

당장 집에 있는 비상식량은 지난번 한국에서 가져온 인스턴트 야채죽이 전부 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두꺼운 코트를 걸치고 목도리로 목을 둘둘 두른 채 가장 가깝지만 허름한 동네 슈퍼에 갔어요. 일인 가구에서 아픈 나를 돌볼 사람은 나뿐이니까. 자전거를 타고 조금만 나가면 더 크고 물건이 다양한 마트가 있어서 평소에는 그쪽을 선호는 편이지만, 지금은 그럴 기운이 없으니까요. 따뜻하고 영양가 있는데 만들기까지 쉬운 음식은 치킨수프 밖에 생각이 나지 않더라고요. 아시안 마켓까지 갈 힘도 없고요. 닭가슴살과 샐러리, 당근, 양파와 비타민 C를 충전할 수 있는 레몬과 오렌지, 생강까지 손에 들고 가게를 나오다 튤립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가끔 꽃을 사요. 마트에 가면 항상 있고, 가격도 비싸지 않거든요. 하지만 한 번도 튤립을 사지 않은 건 튤립 다발의 꽃봉오리가 늘 너무 작고 볼품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왠지 튤립을 한번 사보고 싶더라고요. 옆에 있던 거베라가 좀 시들해 보여서 그랬던 것도 있겠지만, 곧 생일이었거든요. 아픈 것도 서러운데 꽃이라도 한 다발 사줘야겠다 싶은 마음이 들어서요.

근데 이게 웬걸. 집에 와서 화병에 꽂아두었더이 녹색의 작고 볼품없던 꽃송이들이 하루가 다르게, 아니 시시각각 커지는 거예요. 테이블에 앉아 가만 꽃을 보고 있으면 색도 점점 노오랗게 변하고요. (그게 느껴질 정도라니!) 며칠이 지나 생일 즈음엔 사진에서 보던 그 커다랗고 예쁜 튤립송이들이 한가득 피게 되었어요. 이렇게 필 거라는 걸 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을까요. 너무 드라마틱해서 그래요. 진짜 커다래졌거든요, 믿기지 않을 만큼. 째깍째깍 변하는 튤립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어요. 꽃 한 다발로도 어쩐지 테이블이 화사한 봄으로 가득 찬 것 같고 쉽게 행복해지더라고요. 아직까지도 너무 싱싱하게 집 한 구석을 지켜주고 있습니다.

 

지난겨울 한국에 갔을 때 엄마 집 베란다 한켠에 튤립과 수선화 구근을 사서 심어 두고 왔거든요. 마침 엄마의 화분에서도 꽃대가 길쭉하게 올라온다고 하더라고요. 진짜 봄이 오나 봐요, 길었던 겨울이 가고요. 그 꽃들이 잠깐이나마 엄마에게 봄의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사나흘 푹 쉬면 나을 줄 알았던 감기는 열흘이 지나는 동안에도 별 차도가 없었습니다. 기침가래가 들끓어 밤엔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낮에도 집에 갇혀 지냈어요. 폐렴이 될까 걱정스러울 만큼요. 감기가 이렇게 오래간다고...? 하는 황당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쩌겠어요. 어차피 이 동네 의사들은 여간해서는 감기에 약(항생제)을 처방해주지 않거든요. 코로나 덕분에 사람들이 바이러스에 취약해져서 더 감기가 오래가는 거라고도 하고요. 열심히 레몬생강차를 끓여 먹고 따뜻한 수프로 위장을 달래주면서 버티는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매년 이맘때 즈음 아팠던 것도 같고요.

 

그래도 생일날엔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티라미수를 만들었습니다. 미리 재료를 사두었거든요. 치킨 수프의 힘을 빌어 꾸역꾸역 굳이 뚝딱, 만들어 냈죠, 티라미수. 짠. 

입맛이 없어서 한 입 떠먹고 냉장고에 넣어두고 말았지만,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싶었던가봐요. 노오란 튤립 한 다발과 티라미수,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걸로 치자고요.

 

 

전체화면으로 비비의 표정과 함께 감상하시기를 추천드립니다!

 

 

내가 바란 건 오직 달디단 밤양갱이었다는 가사처럼, 사실 내가 바란 건 사람들의 따뜻한 포옹과 다정한 인사였지만, 어쩔 수 없죠 뭐. 조금 이르지만 내년의 안녕을 미리 바라봅니다.  

 

튤립이 질 때쯤이면 그래도 좀 나아지면 좋겠어요. 

레몬과 비타민 C로 채워가는 노오란 날들 사이로 소식 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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