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늦었습니다. 금요일에 레터를 보내드리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전 레터들을 쓸 때도 생각보다 힘에 부친다는 느낌이었는데, 목요일에 영상 발행을 마치고 나니 정말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더라고요. 다음날 일어나서도 글쓰기 엔진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이틀 동안 고민해본 결과, 지금 수준의 글쓰기를 매주 유지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스로의 용량을 객관적으로 진단했다면 좋았을 텐데, 아무래도 처음 해보는 시도다 보니 의욕이 과했나 봅니다.
그렇다면 지속가능한 글쓰기를 위해 분량과 밀도를 낮출 것인가, 발행 빈도를 줄일 것인가의 기로에서 저는 후자가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앞으로 [사고실험] 레터의 발행 주기는 게스트당 1회, 격주간 발행으로 수정하고자 합니다. 처음 구독하실 때 드렸던 약속을 번복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어쩌면 이번 레터의 내용도 예상하셨던 것과 좀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의 제가 써야만 했던 글을 써보았습니다. 뻔뻔한 소리지만 이런 시행착오의 과정도 [사고실험]의 여정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즐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0 [사고실험] 레터를 구독해주신 분들의 수가 1000명을 넘었습니다. 이 글을 발송하는 지금은 정확히 1447명입니다. 5~6월까지로 예정된 이번 시즌의 최종 목표치가 2000명이었는데, 당초 예상보다 3배쯤 빠른 추세인 셈입니다. 물론 제가 이전에 뉴스레터를 운영해본 경험이 없어서, 2000명이라는 숫자도 엄밀한 추정을 바탕으로 한 계산보다는 희망사항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지금의 수치는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1 저는 기대 이하의 성과에는 침울해하고 기대 이상의 성과에는 불안해하는 인간입니다. 한 마디로 인생 피곤하게 사는 타입인데요. 솔직히 말해 지금의 기분은 마치 사기꾼이 된 듯한 기분입니다. 혹시 내가 사람들에게 잘못된 기대를 심어준 건 아닐까. 분명 정수기 물을 담았다고 써두었는데 어딘가에 에비앙으로 오해할 법한 표현이 숨어있었던 걸까. 앓는 소리는 이쯤 해두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객관적으로 진단해보겠습니다.
2 현재 [사고실험] 레터의 구독 링크가 노출되는 경로는 유튜브 EO 채널, 제 인스타그램 계정, 그리고 입소문을 통한 추천이 있습니다. 뒤의 두 가지가 사실상 무시가능한 수준이라고 가정하면, 구독자분들은 대부분 한 가지 경로를 통해 [사고실험] 레터에 유입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튜브 영상 하단에 달린 고정댓글의 링크를 통해서인데요. 그렇다면 구독자 수 = 조회수 X 링크 클릭률 X 구독 전환율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각각의 퍼널에서 어떤 예상과 다른 일들이 벌어졌는지 살펴보겠습니다.
3 첫 번째로, 조회수가 생각보다 높게 나오고 있습니다. 재용님과 지윤님을 게스트로 모실 때부터 어느 정도 기대감은 있었지만, 두 분의 영향력이 제 생각보다 더 거대했다는 걸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토크/인터뷰 콘텐츠의 흥행이 게스트빨(?)이라는 건 원래부터 자명한 사실이지만, 특히 두 분의 팬덤과 EO 기존 구독자분들의 유사도가 높았다는 점이 주효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4 두 번째로, 링크 클릭률을 높이는 데 작용한 고정댓글 자체의 힘이 있습니다. 그 댓글을 쓰고 나서 지인으로부터 "왜 그렇게까지 절박해보이게 썼냐?" 라는 말을 들었는데요. 부정적인 의도의 피드백이라기보다는 너 스스로를 그렇게까지 낮출 필요가 있냐는 의문에 가까웠습니다. '빌었다'라는 표현을 여러 번 반복하는 것도 그렇고, 평균 조회수 12.6만회도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만한 숫자 아니냐, 네가 스스로를 낮춰 말하면 타인도 너를 낮춰볼 수 있다는 염려였죠.
5 사실 저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그렇게 읽힐 수 있겠다는 사실을 인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글을 쓰는 동안은 정말 미치도록 절박했거든요. 최소 올해 1년은 더 해보겠다고 선언했는데, 재용님이라는 훌륭한 게스트까지 모셨는데, 작년보다 성과가 나아지지 않으면 부끄러워서 어떡하나. 그 글에는 제가 발휘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간절함이 담겨 있고, 그래서 읽으시는 분들이 PD를 긍휼히 여겨주셨다는 분석이 가능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그 정도 수준의 간절함을 일년 내내 유지하기는 어렵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6 마지막으로 구독 전환율입니다. 여기에는 많은 요인들이 개입했을 테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게스트의 일관성에 대한 기대감입니다. 아까 재용님과 지윤님께서 제 예상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갖고 계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거기에 더해 두 분이 연달아 출연해주셨다는 데서 오는 시너지가 있습니다. 박학다식하며 뛰어난 전달력과 선한 의지로 무장한, 이 시대 최고의 ISTJ 두 분. 앞으로도 비슷한 분들이 출연해주실 거라는 기대로 구독해주신 분들이 많이 계실 겁니다.
7 하지만 앞으로 출연해주실 게스트분들은 두 분과 같지는 않을 겁니다. 감히 개인의 고유함에 대한 평가를 내리려는 의도가 아니라 사회적 프로필이 다르시다는 의미입니다. 성격도 연령대도 직업군도 전문분야도 어느 하나 다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첫 두 번의 훌륭한 게스트분들이 만들어주신 일관성이, 긍정적인 의외성으로 이어지도록 만드는 것이 저에게 주어진 책무겠지요.
8 성과가 좋으면 기뻐하고 감사해하면 그만이지, 왜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따져서 생각을 하느냐. 그 이유는 실제 제가 가진 역량보다 스스로를 더 크게 여기고 싶은 마음도, 그렇게 보여지고 싶은 마음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올바름이나 겸손함의 문제가 아니라 장기적인 효율과 최적화의 문제입니다. 유튜브 세계에 몸담은 3년 반 동안 가장 중요하게 배운 점은, 크리에이터에 대한 구독자분들과 자기 자신의 기대를 적정선으로 관리하는 것이 롱런의 비결이라는 사실이거든요.
9 [사고실험] 1번째 레터에서 제가 연극 동아리 생활을 오래 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그중 배우로서 무대에 올랐던 건 신입생 정기공연 한 번뿐이었는데요. 제가 연기했던 작품의 제목은 <빨래>로, 동명의 뮤지컬을 연극으로 옮긴 작품이었습니다. 저는 남자주인공의 친구인 필리핀 이주노동자 '낫심' 역할을 맡았습니다.
10 낫심은 단역이었기에 저는 낫심 외에도 3개의 단역을 더 겸해서 연기했습니다. 하지만 훌륭한 작가는 작은 배역에게도 기억에 남을 대사 한 마디를 분배하는 걸 잊지 않습니다. 낫심에게도 그런 대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겠어!" 그 대사를 서툰 한국어 발음으로 뱉은 뒤, 쾅- 닫은 문 뒤에서 관객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때의 흥분을 저는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 뱉은 약속을 항상 지키면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11 메일로 보내주시는 응원에서, 유튜브 영상에 달아주시는 댓글에서 종종 '초심을 잃지 말아달라'는 문장을 발견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그 단어가 무섭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는 제 초심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합니다. 흥미롭다고 생각해서 모신 게스트가 구독자분의 기대를 벗어날 수도 있고, 지속가능한 제작을 위해서는 언젠가 광고도 받아야 합니다. 아무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건 지나치게 나이브한 생각이겠지만, 굳이 실망의 단서를 많이 남겨두고 싶지도 않습니다.
12 그래서 제가 약속드릴 수 있는 초심은 단 하나뿐입니다.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콘텐츠는 만들지 않겠다는 것. 다소 헐렁하게 들리는 기준이라서 죄송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에게는 이것이 최선으로 느껴집니다.
13 그러니까, 저는 저희 사이가 쿨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이건 구독자분들에게 드리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 하는 다짐입니다. 요즘 분수보다 과한 칭찬을 받으면서 점점 행동이 무거워지는 제 자신을 발견했거든요. 구독 취소 숫자와 오픈율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말기. 실행으로 이어질 수 없는 부정적 댓글에 잠 못 이루지 말기.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해서 오늘처럼 정색하고 질척거리는 글 쓰지 않기. 저를 가장 기쁘게 만드는 칭찬은 "내용이 좋다" 보다 "재밌다"는 것이거든요. 어디까지나 경쾌하게 술술 읽히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누구보다 이 글의 첫 번째 독자인 저를 위해서요.
(추신 : 보내주시는 메일은 정말 하나하나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까지는 물리적인 시간과 에너지 부족을 핑계로 제대로 된 답장을 못 보내드렸는데요. 격주 발행으로 바꾸면서 레터를 쓰는 시간이 줄어들 예정이니, 앞으로 2주에 한번씩 메일 답장을 몰아서 작성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오래 기다리게 해드려 죄송하고 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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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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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끼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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