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참 열심히 살았네요. 숨가쁘게 달려와서 그런지 연말이 다가올 수록 몸과 마음의 근육이 힘에 부치는 걸 느낍니다. 영혼의 충전이 절실해지는 요즘 같은 때 저는, 제주의 오래된 도심을 찾습니다. 캐리어도, 렌터카도 없이 홀가분하게 찾은 그 곳을 조용히 걷다 보면 기분이 정돈되고 비로소 올바른 감각들이 들어올 자리가 나거든요.
이번 레터에서는 제가 자주 찾는 구제주의 사적인 장소들을 구독자님과 나눠볼게요.

로컬처럼 일멍쉬멍 하고 싶다면 맹그로브 제주시티
이번 해에만 세 번이나 묵었던 맹그로브는, 일상에서 벗어나 기분 좋게 몰입하는 공간을 지향하는 워크앤스테이 숙소입니다. 군더더기 없는 객실과 깔끔한 공유 키친, 그리고 바다가 보이는 워크 라운지가 있어요. 원래 옛날 호텔 자리가 교통과 뷰가 좋은 거 아시죠? 맹그로브는 제주 탑동 사거리의 오래된 관광 호텔을 리모델링해서, 바다가 잘 보이고 공항 접근성도 좋습니다. 택시 기사님에게 ‘탑동 사거리요’ 하면 네비 없이도 금방 데려가 주실 거에요.
TV 없이 딱 필요한 것들 만으로 정돈된 객실에서 기분 좋게 자고 일어나, 공유 키친에서 커피 한 잔을 내려 조용한 사무실로 들어서면, 뒤죽박죽이던 머릿속이 정리되면서 정말 중요한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읽고 쓰고 멍때리다 슬슬 여행이 하고 싶어지면, 맹그로브에서 만든 로컬 가이드맵을 따라 길을 나설 수 있어요. 감각적인 공간도 많고 투숙객 할인을 해주는 가게도 있어서, 취향껏 골라서 가볍게 들려봐도 좋아요.
디앤디카페 제주에서 차 한잔
탑동 사거리 건너편에는 롱 라이프 디자인을 추구하는 디앤디파트먼트 (D&DEPARTMENT) 프로젝트의 제주점이 있습니다. 로컬 식재료와 로컬 창작자가 만든 소품을 판매하고, 제주다운 메뉴로 가득한 카페도 운영하고 있어요. 저는 d 오리지널 티 블렌드인 제주 흑보리 볶음녹차를 마셨는데, 구수쌉싸름한 찻물에 혼탁했던 속이 맑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카페 입구에는 로컬 농장에서 받아온 타이벡 감귤을 1kg 씩 종이 봉투에 담아 판매하고 있어요. 맛도 좋고 가격도 육지보다 저렴한 편이라 가시면 꼭 한아름 안고 나오시길 추천드려요.
무언가 읽고 싶어진다면, 종이잡지클럽 제주

영혼을 충전하는 여행에 책이 빠질 수 없죠. 충동적으로 제주행 티켓을 끊었던 어느 날, 좋은 문장이 너무나 읽고 싶어져 근처 서점을 찾다가 알게 된 곳입니다. 1층에는 드립커피와 구좌당근주스를 파는 내음커피바가, 2층에는 음료와 사운드를 즐기며 벽면을 가득 채운 잡지들 속에 숨을 수 있는 종이잡지클럽이 있습니다. 디자인, 문학, 건축, 철학.. 세상에는 이렇게 많은 잡지가 있구나 하며 놀라다가 어느새 내 취향에 맞는 한 권을 들고 손에 놓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실 거에요.
제주의 사계절을 감상할 수 있는 김택화 미술관
제주에 수없이 와봤지만, 김택화 미술관이라는 이름은 초면이었습니다. 맹그로브 라운지에서 우연히 김택화 작가가 그린 산방산이 인쇄된 포스트잇을 보고, 작품 실물이 너무나 보고 싶어졌어요. 뿌연 안개 뒤로 봉긋 솟은 산방산의 모양이 너무나 온전해서, 산방산 앞을 지나던 날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거든요. 그렇게 산방산 이미지 하나만 품고, 동문시장에서 버스를 타고 미술관으로 향했습니다.
김택화 미술관은 조천읍의 신흥리라는 마을에 있습니다. 함덕고등학고 옆 마을 버스정류장 뒷편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어요.
전시장에 들어서면 사면의 벽을 가득 채운 풍경화의 방이 있습니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김택화 작가는 홍익대 서양화과 재학 시절 김환기 화백의 애제자였고, 한국 최초의 추상표현주의 그룹 ORIGIN의 창립 멤버였을 정도로 서울에서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 1965년 고향에 잠시 돌아왔다가 제주 자연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이후 평생 동안 제주의 풍광을 그렸다고 해요.
김택화 작가의 제주는 한 자리에서 보고 그린 그림이 아닙니다. 수도 없이 그리고 바라봐서 눈을 감아도 360도 펼쳐지는 그 선과 색을 그려낸 느낌이에요. 동서남북에서 바라본 한라산의 능선, 육각형으로 뻗은 주상절리, 눈으로 뒤덮힌 마을과 유채꽃밭이 펼쳐진 제주까지. 미술관을 가득 채운 풍경화들을 보다 보면, 내 안에도 ‘제주스러움’이 자연스레 자리 잡게 됩니다. 김택화 미술관을 다녀오고 나니, 눈 감고도 잔상이 떠오를 정도로 더욱 가깝고 깊게 제주의 자연을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천하제일 오라방에서 뻘건 고기국수 한 그릇


작년 겨울 한라산 트레킹 후에 와보고, 이제는 제주 올 때마다 꼭 찾는 식당이 있어요. 제주 삼성혈 근처에 얼큰한 고기국수를 파는 천하제일 오라방이에요. 구도심의 오래된 건물에 간판 하나를 새로 달아둔 외관이 인상적입니다. 여기를 자주 찾는 이유는, 고소하고 진한 국물에 마늘과 고추의 개운함이 더해진 이 뻘건 고기국수를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한 때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라는 책이 유행했는데, 저에게 영혼을 위한 한 그릇을 묻는다면 천하제일 오라방의 뜨끈하고 얼큰한 고기국수를 고르겠습니다. 같이 나오는 알싸한 파김치도 환상의 궁합이에요! 지금 글을 쓰면서도 침이 고이네요. 고갈된 영혼을 충전하러 곧 다시 가야겠습니다.
구독자, 꽤나 사적인 제주 여행 취향을 들려드렸는데 어떠셨나요?
제주에는 특급 호텔도 많고 오션뷰 카페나 웨이팅이 긴 맛집도 많지만, 때로는 구도심에서 느껴지는 찐 로컬 바이브를 느껴 보시는 것도 추천합니다. 오래된 도심의 구석구석, 본인만의 의미와 정성을 담아 가꿔낸 공간들이 참 많아요.
저는 조만간 한번 더 제주 구도심을 찾을 예정입니다. 구독자님도 취향 가득한 나만의 공간에서 한 해 동안 애썼던 몸과 마음을 충전하는 따뜻한 연말 보내시길 바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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