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3025의 서울, 혹은 그 어디에

다니엘 아샴 <기억의 건축> 7.10-8.16

2025.07.16 | 조회 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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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예술, 방문하고 보이는 것들에 대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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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 님, 다니엘 아샴이 서울에서의 세 번째 개인전 <기억의 건축>을 8월 16일까지 페로탕에서 개최합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고전주의에 기반을 둔 작품을 주로 선보이는데요. 전시장 입구에서부터 고대 비너스 조각을 스테인리스 스틸, 청동 등 재료를 결합하여 재구성한 조각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미래에 아샴의 조각 일부를 유물처럼 발견하게 된 소수의 인물들이 선 풍경을 마주하게 되고요. 2층에서는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선보인 ‘미로 속 계단 Stairs in the Labyrinth’을 볼 수 있어요. 

아샴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두 가지 포인트를 짚자면 '상상의 고고학 Fictional Archaeology'이라는 미래-시간적 개념과 물질 그 자체, 재료의 물성이 두드러지는 점일 거예요. 아샴의 고대 비너스 조각 연작은 이런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우선 상상의 고고학이라는 개념에 있어, 천년 뒤 지구 어딘가에서 발견될 수 있을만큼 멋지게 고대 그리스 조각을 재해석한 현대 조각을 만들었어요. 조각-오브제의 중심 소재를 선택할 때 아샴은 2025년 동시대인의 인식과 미감을 영리하게 활용합니다.


시간과 물질

<Amalgamized Venus of Arles> 2023, Patinated bronze, polished bronze, stainless steel, 200×90.9×72.8cm
<Amalgamized Venus of Arles> 2023, Patinated bronze, polished bronze, stainless steel, 200×90.9×72.8cm

티파니, 포르쉐, 디올 등 브랜드와의 협업, 포켓몬을 소재로 한 작업들, 그리고 루브르의 그리스 조각 컬렉션은 개별적으로 놓고 보면 이질적이지만 공통적으로 한 시대를 관통하는 아이콘이라는 특징이 있죠. 3025년의 서울 어딘가에서 발굴이 이루어진다면, 2020년대를 대표하는 유물을 고른다면 아샴이 만든 티파니 콜라보와 포켓몬 콜라보는 꽤 괜찮은 미래-유물로 선택될 것 같지 않나요? 그리고 루브르의 조각 컬렉션은 천년 뒤에도 여전히 (지구가 그때까지 잘 있다면) 유효한 시대적 키워드일테니까요.

게다가 아샴은 2020년대 버전으로 그리스 조각을 훌륭하게 만들었잖아요. 형태적으로는 동일한 복제품이지만, '청동'을 인위적으로 차용하면서 '스테인리스 스틸'을 사용해 개별적인 재료의 물성을 드러내면서 현대적 미감을 더했죠. 석고, 화산재 등 그레이 스케일(Grayscale)의 색으로 작품을 표현해온 아샴은 사실 일반적인 색과 음영의 20%정도만 볼 수 있는 색맹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특수 안경을 통해 색과 음영의 60% 정도까지 구별할 수 있는 경험 이후, 보다 다양한 물성-색이 이후 작품에 반영되었다고 합니다. 

<Amalgamized Crouching Venus> 2022, Stainless steel, patinated bronze, 91.4×30.5×43.2cm
<Amalgamized Crouching Venus> 2022, Stainless steel, patinated bronze, 91.4×30.5×43.2cm

상상의 고고학

<Members of the Future in the Cave of Zeus> 2024, Acrylic on canvas panel, 102×127.3cm
<Members of the Future in the Cave of Zeus> 2024, Acrylic on canvas panel, 102×127.3cm

이번 전시에서는 상상의 고고학을 그대로 시각화한 듯한 회화 작품을 여러 점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전에도 선보인 연작이지만, 최근 회화 속 구도에서는 거대한 조각과 미래의 인물의 대비가 보다 극적으로 두드러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풍경화 속에 낯설게 등장한 대형 조각의 화면 구성에서, 조각은 더욱 거대해지고 주변의 풍경은 축소 또는 생략되었습니다. 이를 바라보는 인물은 상대적으로 작게 묘사되어, 숭고 또는 경외에 가까운 감정을 느낄 수 있어요.

작가은 2010년 남태평양 이스터상을 방문해 유물 발굴 현장을 목격한 경험이 있는데요. 이때 '역사는 진실과 허구로 구성되었다'는 점을 새삼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래-유물을 목격한 미래 인류가 보고 느낄 2025년은 지금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느끼는 것과 아마도 많이 다르겠지요. 고대 그리스에 살던 그리스인이 보던 조각도, 지금의 우리에게는 전혀 다르게 보일 것처럼요. 미술품-유물의 아우라는 작품에 축적된 시간에 의해 한번, 지금 전시된 공간에 의해 한번 더 가공되는 것이 아닐까 고민해 봅니다.

<In the Blue Mist> 2025, Acrylic on canvas, 150.2×107.8 ×5.1 cm
<In the Blue Mist> 2025, Acrylic on canvas, 150.2×107.8 ×5.1 cm

기억의 건축

<Stairs in the Labyrinth> 2025, Sand, 73×45×46.4cm
<Stairs in the Labyrinth> 2025, Sand, 73×45×46.4cm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선보인 ‘미로 속 계단 Stairs in the Labyrinth’은 2층 전시장 한가운데 전시되어 있습니다. 주제적으로는 그리스 조각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기법적으로는 디지털 렌더링, 3D 프린팅 등 동시대 기술을 도입한 작품입니다. 조각의 재료로 '모래'를 선택해 작업한 최초의 작업이라는 점이 특징적인데요. 앞서 말한 것처럼 아샴에게 재료에 대한 탐구는 작품의 중요한 한 축으로, 쉽게 형태가 무너질 수 있는 모래에 수지를 섞은 작가만의 공정을 개발해 '캐스트샌드 cast-sand' 시리즈를 탄생시켰습니다. 

전시장에는 조각과 함께 종이에 목탄으로 그린 드로잉 연작이 배치되어 있는데요,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속 또는 네덜란드 판화가 에셔 Maurits Cornelis Escher의 상상 속 계단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는 작가의 말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 기억의 잔상을 끄집어내 건축한 것처럼, 조각의 모티프가 된 고대 그리스 인물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기도 했어요.  작가는 이러한 작업이 향후 수년간 주요 탐구 영역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In Her Mind Study> 외, 2025, Charcoal on paper Framed, 120.3×90.3cm
<In Her Mind Study> 외, 2025, Charcoal on paper Framed, 120.3×90.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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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회화 작품 하단에 기재된 '3025'라는 연도 표기를 보고 있으면, (신)서울의 1000년 후를 상상하게 됩니다. 작가는 어린 시절 마이애미에서 허리케인을 경험하면서, 폐허가 된 도시를 보고 인간의 무력함, 자연의 압도감, 문명의 덧없음 등을 느꼈다고 하는데요. 오지 않은 미래,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떠올리도록 하는 작품들 사이를 걷다 보면 그 감정을 같이 공유하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영리하게 취사선택되고 다듬어진 미감을 마주하는 일은 언제나 설레는 일인 것 같아요.

다니엘 아샴의 지난 전시를 미처 방문하지 못했던 분들에게도 이번 <기억의 건축> 전시를 추천합니다. 페로탕 갤러리는 별도의 입장료가 없으니 도산공원 근처에 갈 일이 있다면 한번 들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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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페로탕 갤러리 <기억의 건축> 전시 소개

하입비스트, <다니엘 아샴 인터뷰: ARSHAM WAS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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