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에는 매주 다섯 점의 이미지를 전달합니다. 2주에 한번 돌아오는 편지를 쓰기 위해, 수많은 이미지 속에서 꼭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를 천천히 골라봤어요. 사람마다 좋아하는 이미지가 다르겠지만 그림 중에서 사람이 없는 풍경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도시의 건물과 빛을 그린 작품, 자연의 녹음을 화폭에 담아낸 작품, 색면으로 가득 칠한 작품을 보면 사랑에 빠지곤 하죠. 그리고 무엇보다, 정물화를 좋아합니다.
물건을 좋아하는 맥시멀리스트라서일까요. 무정물로 가득 찬 화면을 보면 절로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것 같아요. 각각의 사물을 묘사한 텍스쳐의 차이도 재미있고요. 시대별로, 또 나라별로 다른 정물을 보고 있으면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듯한 흥미로운 기분이 들거든요. 이 그림들이 구독자 님의 아침을 열고 밤을 닫는, 다섯 개의 다정한 사물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17세기부터 21세기까지, 500년의 시간을 천천히 걸어보아요.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의 시작은 네덜란드부터. 한때 still life를 키워드로 전세계의 박물관 소장품을 뒤적거리던 시절이 있었는데요(취미 아님). 네덜란드의 정물화는 정석적이면서도 섬세해서 한참 들여다보아도 질리지 않는 것 같아요. 미술사적으로는 바니타스를 포함해 많은 상징과 의미를 담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그냥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운 작품이기도 하죠.
고민 끝에 붉은색의 포인트와 명암의 대조가 화려하면서도 안정적인 아브라함 미뇽의 정물화를 골라보았습니다. "왼쪽에 있는 녹색 유리인 로머를 거꾸로 세웠다. 그 안에는 창문이 비춰지고, 미뇽이 살았던 위트레흐트의 교회 탑이 보인다. 아시아에서 온 도자기 그릇은 번영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식탁 위의 멋진 물건이기도 했다."
18세기 프랑스
미술사에서 정물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이름, 샤르댕입니다. 로코코가 유행하던 18세기 프랑스에서 정물화라니, 자신만의 길을 꿋꿋이 간 셈이죠. 오늘 고른 <산딸기>는 샤르댕의 마지막 정물화 중 하나로, 가장 최근에 루브르에 소장된 작품입니다. 소담하지만 균형잡힌 삼각형을 이루는 딸기 바구니와 투명한 물잔, 꽃의 균형이 돋보이는 작품이죠.
"샤르댕이 팔레트에 뿌린 것은 흰색, 빨간색, 검은색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사물의 실체이며, 붓끝으로 잡아 캔버스에 붙이는 공기와 빛입니다(드니 디드로, 1763년 살롱)." 샤르댕의 대표작 <가오리>를 비롯한 많은 정물화가 루브르박물관 2층, 설리 윙 919호실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북적이는 루브르에서 고요하고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어요.
19세기 일본
일본의 정물을 생각하면 부채로 가득한 병풍의 화폭이 먼저 떠오릅니다. 에도시대 린파(琳派)의 작품 등에 자주 등장한 소재였고, 유럽으로 건너가 모네를 비롯한 화가들의 작품에도 영향을 주었죠. 19세기 일본의 풍속화 장르인 우키요에를 대표하는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도 어김없이 부채를 그렸습니다.
앞서 네덜란드의 정물화가 그랬듯, 우키요에는 17세기 이후 에도 시대 일본의 경제적 성장을 배경으로 등장했습니다.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서 도시문화가 발전하고, 서민도 대규모로 예술을 즐길 수 있게 된 현장을 엿볼 수 있습니다. 화폭을 대담하게 구획한 부채꼴의 붉고 검은 색면, 푸르고 흰 배경을 수놓는 꽃과 그 위로 놓인 접힌 부채의 배치가 돋보입니다.
20세기 한국
우리나라에도 20세기 이전 꽃이나 도자기를 그린 기명절지도, 책이 층층이 쌓인 책가도가 있지만요. 한국의 정물화라는 단어를 들으면 아무래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도상봉이 아닐까요. 우리의 도자기, 꽃이나 과일이 함께 배치된 따뜻한 색의 정물화를 보고 있으면요. 작가가 추구했던 한국적 정서와 서양화 기법의 조화를 저절로 떠올리게 됩니다.
짙은 푸른빛이 감도는 도자기와 풍성한 초록빛의 포도 송이가 눈길을 끄는 도상봉의 <포도와 항아리>는 이건희를 거쳐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정적인 구도지만 변화와 색조의 미묘한 변주가 느껴지면서 생동감으로 충일한 정물화를 그린다. 오후의 따뜻한 햇살을 받고 있는 듯한 온화하고 여성적인 독특한 미감이 보는 이를 편안하게 한다."
21세기 미국
오늘날의 정물화에는 어떤 미감과 미덕이 담겨있어야 할까요. 미국 출신의 미디어 작가 제니퍼 스타인캠프가 그리는 3D 애니메이션에서 21세기의 정물화가 상상할 수 있는 많은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꽃, 과일, 나무 같은 정물이 화면 속 가상의 공간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캔버스를 벗어나 마치 우주 공간을 유영하는 듯한 <정물3>은 기존의 정물화를 비틀고 전복합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MMCA 뉴미디어 소장품전-아더랜드»에서 이 작품을 만나볼 수 있어요. "작가는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를 참조했으면서도 이 작품들이 지닌 전통적인 속성을 역전시킨다. 과거의 정물화는 삶의 유한함과 덧없음을 내재하고 있지만, 작가는 그림 속 정물에 한계 없는 생명력을 부여한다." 전시는 내년 3월 30일까지.
참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국립박물관 https://www.rijksmuseum.nl/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https://www.louvre.fr/decouvrir/vie-du-musee/tous-mecenes-du-panier-de-fraises-de-chardin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https://www.tnm.jp/
한국 국립현대박물관 https://www.mmca.go.kr/
현대화랑 https://hyundaihwarang.com/?c=artist&s=1&gbn=view&ix=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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