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팽팽하고 날 선, 한없이 연약한

론 뮤익 «Encounter» 뉴사우스웨일스미술관 시드니

2026.02.12 | 조회 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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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예술, 방문하고 보이는 것들에 대해 씁니다.

<Couple Under an Umbrella> 2013
<Couple Under an Umbrella> 2013

구독자, 입춘과 함께 기승을 부리던 추위가 조금 사그라드는 듯 합니다. 올 겨울은 유난히 추운 날이 이어졌죠. 여름의 강렬한 햇볕을 연상시키는 작품으로 글을 열어 봅니다. 호주 멜버른 출신의 조각가 론 뮤익의 전시 «직면 Encounter»이 시드니 뉴사우스웨일스아트갤러리에서 2026년 4월 12일까지 개최 중입니다. 작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전시로 한국에서도 친숙한 작가죠. 극사실주의적이고 거대한 혹은 축소된 인물의 모습이 관람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론 뮤익의 작품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까닭에는 일차적으로 정교하게 조각된 인물의 형태에서 오는 순수한 경탄이 있을 겁니다. <우산 아래의 커플 Couple Under an Umbrella>에서 노년의 부부는 서로 기대어 있습니다. 전시장의 조명을 가리는 파라솔 아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모양새가 꼭 뜨거운 태양을 피하는 듯합니다. 내리쬐는 빛 아래의 잡티와 주근깨, 주름과 핏줄, 처진 살에서 드러나는 노화의 흔적은 그 자체로 감탄을 불러 일으킵니다. 이 작품은 일반적인 성인에 비해 몇 배는 큰 크기로 제작되어 더욱 섬세하게 외양을 꼼꼼히 살펴볼 수 있죠.

하지만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물의 외관은 작가가 표현한 세계의 일부이자 표면일 뿐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여자의 손에 끼워진 오래된 (결혼) 반지에 눌린 손가락의 살, 여자의 팔을 누르는 남자의 손에서 느껴지는 압력, 남자의 편안한 발끝과 대비되는 여자의 발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텐션이 작품의 주변을 맴돌고 있습니다. 거대한 크기를 가까이 들여다볼 때는 잠시 압도되었던, 물러나서 다시 보면 보이는 완고하고 연약한 인물의 표정. 이 커플이 지나온 시간을 가늠해 봅니다. 한 사람의 삶, 인생의 배후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요?


긴장의 순간과 서사

<This Little Piggy> 2023–25
<This Little Piggy> 2023–25

이번 전시 «직면 Encounter»에서는 신작 <이 작은 돼지This Little Piggy>와 <대혼돈 Havoc>이 전시되어 눈길을 끕니다. 이 두 작품을 보면 전시 제목이 왜 'Encounter'인지 한 눈에 알 수 있는데요. 이전 작업에서 느껴지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미묘한 순간의 긴장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연출된 극적인 순간의 긴장이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이면의 갈등이 아닌 가급적이면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첨예하고 폭발적인 대립입니다.

새로 선보이는 작업에서 론 뮤익이 그리는 세계는 좀더 적극적인 허구의 세계로 확대된 듯 합니다. <이 작은 돼지>를 보세요. 여러 사람이 한 덩어리로 달려들어 겨우 제압하고 있는 듯한 돼지의 육중한 몸체가 보입니다.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로 제작된 이 조각을 보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있는 힘껏 틀어막은 입과 경동맥에 갖다댄 날카로운 칼날이 긴장을 불러 일으킵니다. 하나의 장면에 무수히 많은 상상 속 이야기가 스쳐 지나갑니다.

이번 전시를 위해 뉴사우스웨일스아트갤러리에서는 재미있는 오디오 가이드를 선보였는데요. 호주의 유명한 작가들이 론 뮤익의 작품을 주제로 환상적인 허구의 이야기들을 들려줍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식인데요, 더 많은 이야기는 링크에서 만나보세요. "우리는 자기가 왕이라고 생각하는 이 돼지를 없애기로 결심했습니다. 우리는 그 돼지를 붙잡아 죽였고, 말하는 동물은 모두 죽이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습니다." (Yumna Kassab) 


직면하고 상상하기

<Havoc> 2025
<Havoc> 2025

거대한 크기의 개 무리로 가득찬 작품 <대혼란 Havoc>은 이 전시의 백미입니다. 앞서 살펴본 <이 작은 돼지>가 영화의 스틸컷을 연상시킨다면, <대혼란>은 고대 신화나 설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3D프린터로 뽑아낸 듯 매끈하면서도 이질적인 개의 형태가 서사를 재현한 컴퓨터그래픽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극사실적인 인물들과 달리 균질하게 다듬어진 이 개체들을 현장에서 마주하면 공간을 채우는 매스감이 느껴집니다. 짙은 회색의 더미로 제작된 이 개들은 흙으로 제작되고 레진으로 마감되었습니다.

<대혼란>에서 작가는 기존 대형 인물 조각이 주는 무게감을 유지하면서, 극적인 연출과 허구적 서사를 더욱 강조합니다. 작은 돼지의 미시적 세계를 들여다볼 때 우리가 완벽한 타자였다면, 대혼돈의 거대한 세계로 걸어들어간 우리는 사건에 휘말린 주체가 됩니다. 개들의 싸움을 엿보며 그들의 사정을 상상해도 좋겠습니다. 또는 이 개들에게 둘러싸여 포토존처럼 사진을 찍어봅니다. 연출된 한 장의 사진 속에서 우리 자신도 이 서사의 일부가 되어, 1인칭 시점에서 또는 전지적 시점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도 좋습니다.

Yumna Kassab가 상상한 개들의 이야기를 또 한번 인용해봅니다. "평화는 누구의 것일까요? 소수의 것인가요, 모두의 것인가요? (중략)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수없이 많은 논쟁을 벌여왔습니다. 수없이 싸워온 주제인 데도, 논쟁할 때마다 모두 감정이 격해지는 건 어쩔 수 없죠. 논쟁은 근본적으로 철학적인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이 세상 모든 개는 평등한가요? 아니면 평화로운 삶은 소수의 개들만을 위한 것이고, 다른 개들이 누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인가요?"

<Havoc> 세부, 2025
<Havoc> 세부, 2025

연약함과 유대하기

<Old Woman in Bed> 세부, 2000/2002
<Old Woman in Bed> 세부, 2000/2002

론 뮤익은 지난 30여 년 동안 약 50여 점의 작품을 제작해 왔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신작 뿐 아니라 기존에 작가가 제작한 다양한 인물상이 등장합니다. 한국 전시에서도 소개된 적 있는 <나뭇가지를 든 여인 Woman in sticks>, <치킨/맨 Chicken/Man>과 같은 작품에서 우리는 계속 이어져온 팽팽한 긴장의 순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유령 Ghost>, <젊은 연인 Young Couple>, <쇼핑하는 여인 Woman with shopping>, <어두운 장소 Dark Place> 와 같은 작품에서는 인생의 배후에 숨겨진 이야기를 상상해보게 되지요. 

섬세하게 조각된 인물의 얼굴을 다시 마주봅니다. 비교적 젊은 사람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지나, 나이든 사람들의 피로와 휴식의 순간을 응시합니다. <침대 속의 노파 Old Woman in Bed>는 깊이 잠들어 있습니다. 노인의 얼굴을 이토록 자세히 바라본 적이 있는지 떠올려봅니다. 연초 할머니의 병문안을 다녀온 기억, 나이 들어가는 내 부모님의 얼굴, 그들을 닮아가는 나의 얼굴, 그 모든 것들이 이 취약한 얼굴에 차차 겹쳐집니다. 숨을 쉬는 듯 연약한 조각에 가까이 몸을 기울여보면서, 새해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들과 사랑하는 얼굴들을 그려보면서.

<Old Woman in Bed> 2000/2002
<Old Woman in Bed> 2000/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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