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공항 좋아하세요? 저는 출국할 일이 없어도 공항에 가고는 했어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공항이 ‘우범지대’처럼 느껴지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출국하고 입국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카페에서 글을 쓰고는 했습니다. 그러면 잠시 나도 이방인이 된 것 같은 기묘한 기분에 휩싸이게 됩니다. 마치 연극 <베를리너>의 우희와 태조처럼 말이죠.
가능성의 교차점
내전으로 비행기의 이착륙이 멈춘 윌마 국제 공항에 두 사람이 덩그러니 남아있습니다. 한국계 독일인, 안톤 차이면서 차태조(최호영 분, 이하 태조)와 한국인 사진가 우희(권슬아)입니다. 이들은 국경을 넘어가려는 사람과 국경을 넘어 도착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는 가능성 100%로 출발하여, 마침 내전이 벌어진 윌마 국제 공항(이하 윌마)에 가능성 0의 상태로 놓여집니다.
우희는 사진 전시를 위해 베를린으로 가기 위해 윌마를 경유지로 선택했고 태조는 전 연인의 부고를 전하러 윌마에 도착했습니다. 두 사람은 짐 찾는 곳에서 교차하지만 현재로서는 그 어떤 가능성도 찾아볼 수 없는 상태입니다. 짐을 찾아주겠다는 공항 직원만이 그들의 교착 상태를 해결해줄 유일한 실마리처럼 보일 뿐이죠.
이 둘의 가능성이 시작되는 시점은 책 ’베를리너’가 나타나면서 부터죠. 이 책은 잉그리드(박수진 분)와 클라우스(김세환 분) 부부가 그들의 아이 홀거와 함께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가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베를린 장벽을 통과하지만 반만 성공합니다. 잉그리드가 홀거의 울음소리를 막으려다가 홀거가 질식사하기 때문이죠. 부부는 자유의 땅인 서베를린에 도착하지만 오히려 자유의 목표를 잃어버린 상태가 됩니다.
공항에서 네 사람은 교차합니다. 시간과 공간이 교차되면서 목적지로 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한데 어우러집니다. 공항은 이륙하는 비행기에 실린 설렘과 불안, 착륙하는 비행기에 실린 안도감과 걱정이 교차하는 곳입니다. 짐 찾는 곳,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나오는 짐들에는 도착과 떠남, 경유까지 다양한 삶이 담겨있죠. 가능성이 0에 수렴한 상태를 우리는 무엇이라고 부를까요? 절망일까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베를리너> 속 우희와 태조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도 될 수 없는 상태에 놓입니다. 이것이 가능성이 0인 교차점에 놓인 상태죠.
그리고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도 될 수 없는 가능성 0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을 ’베를리너’라고 부릅니다.
목적지가 있어야만 떠날 수 있다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도 될 수 없는 0의 상태는 곧 가능성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자유로운 세계죠. 잉그리드와 클라우스에게 가능성의 세계는 서쪽입니다. 그들의 몸이 오히려 동독에 있을 때 더욱 자유로운 상태죠. 그들에게는 서쪽이라는 가능성의 세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행복을 꿈꾸고, 사랑을 이루면서 가능성의 세계를 끊임없이 목표로 삼습니다. 마침내 그들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오히려 그들은 자유의 목적을 잃은 상태가 됩니다. 도착지란 도착할 때 끝나고 말죠.
그래서 우희와 태조는 공항에 발이 묶인 채로 자신들의 가능성을 시험합니다. 우희는 자신의 전시가 잘 열릴지, 베를린이 정말 자신의 자유를 보장해줄지, 자신의 사진에 얽힌 언론의 자의적인 해석에 대한 오해를 풀 수 있을지 모르죠. 그렇지만 우희는 베를린행을 시도함으로써 이 모든 가능성의 목적지로 향합니다. 그러나 이 가능성은 경유지에 있기 때문에 유예되죠. 그러나 이 상태가 곧 우희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자유로운 상태입니다. 베를린에서 전시가 열리는 그 순간, 그녀의 가능성은 닫히고 목적지에 도착하고 말죠.
태조는 입국 심사를 마치면 목적지인 세르고에 갈 수 있습니다. 공항은 목적지이면서 경유지인 셈이죠. 태조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여러가지 길을 하나씩 닫아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할아버지를 고향인 한국에 묻고 온 일, 역시 그가 자신이 이민자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베를린에 정착한 온전한 독일인으로서의 삶은 한국에 도착함으로써 완결되죠. 그가 안톤이 아니라 ’태조’로 불리게 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가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접게 된 데에는 ’유리’라는 전 연인이 남아있습니다. 내전으로 인하여 세르고에서 독일에 난민으로 들어오게 된 유리는 목적지를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태조는 그녀와 함께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쌓아가고자 했지만 유리의 사망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공항은 목적지가 명확한 사람만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공항 안에서의 0에 수렴하는 무한한 가능성은 그 공간을 떠날 때 바로 유한한 가능성으로 전환되죠. 우희와 태조는 선택해야만 합니다. 무엇이 되거나, 무엇이 되지 않거나. 우희는 무엇이 되는 쪽을 선택하는 사람이었고 태조는 무엇이 되지 않기를 선택하는 사람이었죠.
완결난 세계의 사람들
유리와 버스커는 태조와 우희에게 중요한 인물들로 등장하지만, 둘은 가능성의 세계에서는 벗어나 있습니다. 유리는 이미 베를린에 도착한 상태이고, 세르고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유리의 세계는 완결난 상태입니다. 버스커 역시 난민 캠프에서 사람들의 가교 역할을 함으로써 자신의 세계가 완결난 사람입니다. 둘의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옅고, 무엇이 되거나 되지 않을 수는 없는 사람들이죠. 그들은 이미 ”무엇이 된“ 상태의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베를리너>는 다양한 시공간이 교차하기 때문에 버스커와 유리를 반드시 우희와 태조의 미래나 과거에서 찾을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그들은 독립적으로 완결난 세계를 살아가고 있고, 우희와 태조는 여전히 가능성의 세계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리는 행정적으로 ‘베를리너’가 되었지만 상징적인 ’베를리너‘가 될 수는 없었죠. 그녀의 자유이자 가능성은 타인으로부터 강제로 부여받은 것이기 때문이죠.
버스커 역시 자신의 삶에 충실하지만 가능성에는 열려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노래하고, 새로운 노래를 만들지만 사회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거나 적극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죠. 그는 이미 ‘무엇‘이 되어버린 상태기 때문이죠. 이러한 점에서 그는 서독에 도착한 잉그리드와 클라우스와 비슷한 상태에 놓여집니다. 그들은 비가역적인 사건에 휘말린 뒤, 완결된 세계에 머물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희, 태조, 잉그리드, 클라우스는 가능성을 쫓을 때 가장 아름답게 표현됩니다. 그들은 스스로 베를리너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죠. 오히려 그들은 ’베를리너‘이고 버스커와 유리는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죠.
영원히 떠나지 못하는 농담
<베를리너> 속 ’베를리너‘는 가능성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어요. 관객들 역시 중앙 무대를 양쪽에서 바라보며 베를리너가 되어갑니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돌아가면서 스스로 티켓을 끊고 목적지를 생각해보게 될 것입니다. 우희와 태조 역시 각자의 목적지로 향하겠죠.
극 안에서 평생 갇혀지내는 사람은 ’해석’입니다. 해석은 극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각주를 담당하죠. 때로는 브로커이기도 하고 윌마 국제 공항의 직원이 되기도 합니다. 관객들과 대화를 하기도 하죠. 그는 극 안에서 아주 자유로워보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반대로 그는 그 무엇도 되지 못하는 존재로 남습니다.
우희와 태조는 자신의 목적지로 떠나고, 잉그리드와 클라우스는 절망적이지만 목적지에 도착한 상태입니다. 버스커와 유리는 이미 완결된 채 존재하죠. 해석은 이 세 가지 시공간을 넘나들지만 결코 그에게는 일말의 가능성, 일말의 완결성도 부여되지 않습니다. 그는 부유하고, 어디에나 붙을 수 있으며, 책 베를리너와 극 <베를리너> 바깥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유령같은 인물입니다.
해석은 도넛같은 사람입니다. ’베를리너‘는 베를린 사람들을 말하기도 하고, 극 중에서는 가능성의 세계를 지향하는 사람들이지만 미국에서 판매한 독일식 도넛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해석은 말하죠. “그래서 나는 베를리너입니다, 라는 말은 나는 도넛입니다, 라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고요. 그는 <베를리너>에서 ’도넛‘을 맡고 있는 셈입니다. 해석은 영원히 떠나지 못하는 농담입니다.
당신은 베를리너입니까?
가능성의 아름다움은 ’무엇이 될 수 있다’라는 뜻으로 쓰일 때 나타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될 수 없는 것’ 역시 가능성이죠. 가능성이란 불안의 동의어입니다. 가능성이 100%가 되어서 완결되었을 때에는 이미 도착하고, 안정된 상태란 뜻이겠죠. 그러나 다시금 무엇이 될 수 없는 상태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불안정성이야 말로 자유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베를리너’입니까? 나는 베를리너입니다(Ich bin sin Berliner).
제1회 서울희곡상 수상작, 이실론 작 <베를리너>
희곡 <베를리너>는 서울문화재단에서 제정한 제1회 서울희곡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서울문화재단 대학로극장 쿼드 프로덕션 과정을 거쳐 2025년 4월 10일부터 4월 20일까지 공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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