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비가 오더니 여름이 성큼 왔습니다. 찌는 듯한 더위, 내리쬐는 태양, 90%를 넘기는 습도. 여름을 구성하는 극단적인 성질은 청춘을 떠올리게 합니다. 무작정 무엇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청년기의 즐거움 같습니다. 헤르난 바스는 그 시기의 위태로움과 에너지, 혼란스러움을 오컬트와 소년들의 초상으로 풀어냅니다. 리만 머핀 서울에서 개최된 이번 개인전에서는 그간 분출하는 에너지를 갈무리한 작가의 성숙도가 느껴졌습니다.
소년은 위태롭다
헤르난 바스가 그려내는 소년들의 초상은 항상 어딘가 위태로웠죠. 2000년~2010년대 그림이 복잡한 구도, 사이키델릭한 컬러감으로 위태로움을 전면으로 표현했다면, 2010년대 중반부터는 소년들의 표정, 작품을 구성하는 정물(object), 그 안에서 벌어지는 드라마로 위태로움을 나타냈습니다. 여전히 사이키델릭하거나 야수파의 흐름에서 느껴지는 컬러감도 남아있었죠. 2021년 스페이스 K에서 열렸던 헤르난 바스 개인전, <모험, 나의 선택>에서 작가가 새롭게 정의하는 ‘위태로움‘이 있었습니다. 낚시를 하거나 사냥을 하는 모습, 자연 속에 몸을 던지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이 있었죠. 그들은 언제라도 질서와 혼란 사이에서 혼란을 선택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2021년도 전시까지 헤르난 바스가 그려낸 위태로운 소년들은 “언제라도 혼란해질 사람들”을 바라보는 위태로움이었어요.
<필요와 불필요 사이의 공간>에서 작가는 이제 소년들을 현실적인 공간을 데려옵니다. 그러나 혼란도 함께 묻어있죠. 닭들이 검정색 알을 낳기도 하고, 위자보드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기도 합니다. 플로리다의 정글에 몸을 담그기도 하고, 벌새들을 만나러 가기도 하죠. 작가는 소년들을 ’필요의 세계’로 불러들입니다. 하지만 소년들이 즐기고 있는 스포츠인 ’요요‘, 오컬트적 상황, 연극, 정글에서의 탐험 등은 어딘가 ’불필요한 행동’이기도 합니다. 헤르난 바스의 소년들은 늪에서 건져져 땅을 디뎠지만 그들에게는 여전히 늪의 행태가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그들은 위태롭죠.
질서와 혼란, 이분법적 세계
소년들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은 소년들의 행동이 아니죠. 현실 세계가 그들을 그렇게 바라볼 뿐이이에요. 소년들이 질서가 아니라 혼란을 선택하는 것을 위태롭다고 판단하는 것은 세계가 ‘질서’를 지향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질서는 필요에 등치되고, 혼란을 불필요로 등치됩니다. 이 치환된 세계관에서 그 사이에 존재하는 소년들은, 그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동물 심령술사인 소년은 닭장에서 검은색 달걀을 낳은 닭을 살펴보러 옵니다. 그는 하얀 닭을 안고 있고, 닭은 약 70여개의 검은 알과 4개의 하얀 알을 낳았죠. 우리는 하얀 알을 필요와 정상, 질서로 인식하고 검은 알을 불필요와 비정상, 혼란으로 인지합니다. 그러니 검은 알을 70여개 이상 낳은 닭이란 해결해야할 문제로 정의됩니다. 그렇지만 과연, 검은 알이 정말 문제일까요? 놀라운 현상이고 으스스한 현상이지만 반대로 검은 알이 야기하는 문제는 작품에 묘사되지 않죠. 이 현상을 으스스하다고 규정하는 것도 현실이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소년이 온 것 역시 현실적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도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아요. 그리고 이것을 꼭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검은 달걀이 그러니까, 문제일까요?
전시의 제목과 같은 작품인 “필요와 불필요 사이의 공간”은 분리와 절단 마술을 보여주는 남성 마술사와 모델 듀오를 보여줍니다. 두 개의 캔버스로 구성되어서 액자도 두 개를 따로 걸 수 있죠. 작품의 설치를 위한 가이드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두 개의 액자는 더욱 멀어질 수도 있고 최대한 가까워질 수도 있습니다. 작품을 구매한 사람, 혹은 작품을 설치하는 사람이 이 “공간”을 무한히 설정할 수 있어요. 결국 이분법적 세계는 이렇게 작품 외적인 공간에서 실현됩니다.
무목적적 합목적성
예술의 정의를 말할 때 “아무런 목적이 없는 것이 곧 목적이다”라는 칸트의 말을 자주 인용하게 됩니다. 문학비평용어 사전에서는 무목적적 합목적성을 ‘자주적인 미적 경험’으로 정의합니다.
미적 경험은 실용적 목적이나 이해관계가 없이 그 자체가 목적이 될 때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는 다른 궁극적 목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주성을 가진 범주라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었다. 이런 미적 경험이야말로 만족의 쾌감을 준다고 칸트는 보았다. 즉, 그의 이런 관점은 예술을 놀이로 보는 태도로 미적 쾌락을 중시하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문학비평용어사전, <무목적적 합목적성>
요요를 하는 소년들을 볼까요. 요요는 세계 선수권 대회가 열릴 만큼 권위가 있는 스포츠이기도 하지만, 주류의 스포츠는 아니죠. 이번 전시에서 요요는 가장 눈에 띄는 선을 만드는 스포츠입니다. 그리고 요요는 되돌아온다는 점에서 ‘불필요‘해 보이죠. 감량하는 사람들에게 ’요요현상’이 원상태로 돌아간다는 의미라는 점에서 그간의 노력을 헛되게 만드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요요의 줄이 만드는 아름다운 색은 회화 안에서 영원히 살아숨쉬죠. 그래서 이 그림이 한편으로는 전시에서 말하는 필요와 불필요 사이의 “공간”을 이어주는 선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헤르난 바스의 작법을 보여주는 ’메타 작품‘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시간은 ‘순간적‘이며 “실용적 목적이나 이해관계가 없이 그 자체가 목적이 될 때 경험”될 수 있는 것이죠.
결국 헤르난 바스의 이번 개인전을 통해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한 번 해볼 수 있습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 sake)”처럼 읽힐 수도 있지만 예술이란 결국 ’쓸모와 무쓸모‘ 사이의 공간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추는 기울어져 있죠. 예술은 ’무쓸모‘와 ’혼란‘으로 언제든지 기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준비가 된 상태에서 사이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을 때 예술은 아무 것도 달성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달성합니다.
우리에게는 필요없는 것들도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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