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풍성한 추석 연휴를 보내셨나요? 저도 지난 2주간 바쁘게 누비던 아트 현장을 잠시 내려두고 푹 쉬며 보냈습니다. 이번 키아프리즈 기간 정말 많은 전시와 작가, 작품을 만났는 데요. 푸투라 서울의 개관전, 레픽 아나돌의 작품이 유난히 기억에 남았어요. 기억의 해상도는 기술의 진보와 비례하는 걸까요? 디지털 아트가 현실 세계로 호명되는 순간, 필연적으로 열화될 수밖에 없는 아쉬움을 최대한 해소한 듯한 선명한 영상이 인상적인 경험이었습니다.
레픽 아나돌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디어 아티스트이자 감독입니다. 기계 학습 - 머신 러닝에 바탕을 둔 예술의 선구자로 잘 알려져 있죠. 1985년 터키 이스탄불 출생으로 현재 LA에 거주하며 레픽 아나돌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위 사진 속의 작품은 그의 대표작인 '기계 환각 - LNM' 시리즈입니다. 자연을 주제로 수집된 오픈소스 이미지를 바탕으로, 생성형 AI 모델 '대규모 자연 모델(Large Nature Mode, 이하 LNM)'을 활용해 제작되었습니다.
인공지능과 할루시네이션 Hallucination
환각이라는 뜻을 가진 할루시네이션 Hallucination 은 영국 케임브리지 사전, 미국 딕셔너리닷컴 등에 의해 작년 말 올해의 단어로 선정된 바 있습니다. 환각이라는 단어가 사전적 정의를 넘어, 잘못된 정보를 수집한 대규모 언어 모델 LLM 이 흔히 저지르는 오류를 잘 설명해주기 때문인데요. 일례로 잘못된 정보를 학습한 AI는 '세종대왕은 아이패드로 케이팝 영상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와 같은 같은 문장을 만들어냅니다. 이 문장을 세종대왕이 누군지 전혀 모르는 외국인이 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인공지능의 잘못된 '환각'으로 만들어진 답변이 재배포되고, 학습되고, 진실이 될 수도 있다는 위험성을 경고하는 듯합니다. 1)
레픽 아나돌은 보다 가치중립적이고 예술적인 관점에서 기계 환각에 접근합니다. 우리가 자신이 누구인지 확신할 수 있다면, 인공지능은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건데요. AI를 통해 과거에는 하지 못했던 것들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리라는 긍정적인 유토피아를 그리죠. 그는 인터뷰에서 작업의 시작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제가 처음 가졌던 질문은 기계가 학습할 수 있다면 환각을 볼 수 있을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를 극사실적으로 재현하는 AI 작업에서는 저는 영감을 받지 못했어요. 우리가 볼수 없고, 느낄 수 없지만 자동적으로 (생성되어) 존재하는 가상의 공간을 어떻게 시각화 할 것인가가 저의 관심사였습니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뉴스레터 제목에 차용한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는 필립 K. 딕이 1968년에 발표한 SF소설 제목입니다. 이 소설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이기도 하죠.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한 근미래에서 인간과 인간을 닮은 안드로이드의 관계를 그리며, 인간성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레픽 아나돌은 어린 시절 비디오로 영화를 봤던 경험을 언급하며, 선명히 기억하는 한 장면과 대사를 인용합니다. “이 인간, 이 안드로이드가 다른 안드로이드에게 이 기억은 너의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어.” 영화는 로스앤젤레스의 미래와 함께 그에게 엄청난 영감을 주었고, 날아다니는 자동차와 미래의 미디어 파사드는 아름다운 이미지로 오랫동안 그에게 남아있었습니다.
"로스앤젤레스로 MFA 학위를 받으러 왔을 때, 제가 처음으로 한 일은 차를 몰고 ‘블레이드 러너’의 장소를 찾으러 다운타운 로스앤젤레스로 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새벽 2시쯤에 그곳은 너무 어두웠습니다. 다운타운의 건물들은 모두 완전히 어두웠고,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저는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LA가 세계에서 가장 밝고 빛나는 환경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로, 저는 건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꿈을 마음에 품고 있었습니다. 제 MFA 학업 내내, 저는 그것을 꿈꿨습니다."
레픽 아나돌은 기계 환각을 구현하기 위해 긴 연구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는 먼저 ‘집단 기억’의 패턴을 찾았습니다. 국립공원의 이름, 종의 종류—식물과 동물—를 조사했고, 그 후에는 소셜 미디어와 인터넷에서 데이터를 찾았습니다. 데이터를 모은 후에는 이를 정제하고 정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련의 미세한 조정을 거쳐 AI 알고리즘을 훈련시켰습니다. 환각과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은 AI가 설계된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술적인 계산식을 거치면 현재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패턴과 형태를 볼 수 있는 단계가 됩니다. 2)
AI - LNM이 그리는 환각의 미학
이번 푸투라 서울에서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완성된 일련의 기계 환각 시리즈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사진 속에서 볼 수 있듯, 좌측과 우측 스크린에는 실제 산호(또는 동물, 식물, 풍경)의 이미지가 재생되고 있는데요. 중앙 스크린에는 두 이미지의 색, 에너지, 힘이 상호 작용하는 듯 물결치고 뒤엉키며 AI를 사용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환상적인 할루시네이션 hallucination 을 재생하고 있습니다. (아마 감정은 없지만) 현실과 환각을 뒤섞어 가상의 공간을 재현해내는 인공지능을 통해 작가가 그리는 유토피아는 그 자체로 놀랍도록 아름답습니다.
가장 어두운 디스토피아적인 것 속에서도 좋은 점을 찾는 자세로, 레픽 아나돌은 AI를 대하면서 유토피아를 보는 마음가짐을 의식적으로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는 이 인공지능의 언어가 우리 모두의 ‘집단 기억’을 표현할 수 있고, 그것이 ‘집단 꿈’으로 변하고 결국 ‘집단 의식’으로 변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작가가 삶을 진정으로 연결해주는 주제로서 자연을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물론 자연은 매우 복잡한 여러 층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건 매우 긴 여정이 될 겁니다. 우리 모두가 우려하듯 AI는 그 자체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AI가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한다면 레픽 아나돌의 작품은 인류를 향한 하나의 경고이자 질문을 제기하는 산파술의 도구가 될 수 있겠죠.
AI가 만들어낸 이 가상의 공간 - 환각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작품을 보며 미래가 도래한 것 같은 감각을 느낍니다. AI와 공존하는 미래의 모습은 결국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어디까지가 진실이 아닌지에 대한 논의에 달려있으니까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기계 환각 시리즈는 미래에 새롭게 등장할 불쾌한 골짜기 uncanny valley 의 모습을 반영한 셈이죠. 인공지능이 꿈을 꾸거나 환각을 본다면 끊임없이 변화하고 모양이 바뀌고 새로운 패턴과 형태로 나타날 거라는 작가의 상상은 지금도 여전히 확장되고 있습니다.
예술가로서 레픽 아나돌은 한 인간입니다. 하지만 기계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작가에게 AI는 자연의 모든 사진을 수집하고 살피고 맥락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인식할 수 없는 것을 지원하는 도구입니다. 그는 직접 그림을 그리지 않지만, 마음으로 꿈을 꾸는 방법을 알고, 컴퓨팅과 기하학적, 수학적으로 사물을 창조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선하면, AI도 선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인류를 믿습니다. 저는 AI가 인류에게 창의성, 현실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중요한 가능성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레픽 아나돌이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입니다.
"저는 단지 반짝이는 픽셀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인공지능 예술 작품을 만들지 않습니다. 저는 먼저 안전한 공간을 만들려고 합니다. 데이터가 어디서 왔는지, 어떤 알고리즘을 사용하는지 볼 수 있는 안정된 공간이요. 나아가 저는 사람들이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질문하고, 대면하길 바랍니다. 안전하고 안정된 공간에서요. 끝으로 웰빙이 가장 중요합니다. 저는 세상과 삶이 어렵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 작품들이 마음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세계 각지에서 제 작업을 통해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받았을 때, 예술가로서 매우 감사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예술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3)
*뉴스레터에 게재된 레픽 아나돌 관련 내용은 "루이지애나 인터뷰, 레픽 아나돌 한글 번역본 및 유튜브 영상 원본"을 참고하여 요약, 인용되었습니다.
참고 자료
1) [신조어 사전]인공지능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 서울경제 2023.06.04
케임브리지 사전, 올해의 단어로 '환각' 선정 AI타임스 2023.11.23
딕셔너리닷컴 선정 올해의 단어는 진짜 같은 가짜 ‘환각’ KBS 뉴스 2023.12.13
2) 푸투라 서울 홈페이지 (https://futuraseoul.org/)
레픽 아나돌 홈페이지 (https://refikanadol.com/)
3) AI Is an Extension of My Mind | Artist Refik Anadol | Louisiana Channel
Art in the age of machine intelligence | Refik Anadol | TED
How AI Art Could Enhance Humanity’s Collective Memory | Refik Anadol | 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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