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님, 첫눈이 찾아오고 얼음이 얼기 시작한다는 소설小雪입니다. 11월 경 가을 전시가 끝나면, 연말 전시 소식을 챙기느라 분주해집니다. 이맘때 쯤 열리는 전시는 합리적인 가격대로 작품을 판매하는 행사들이 많거든요. 사랑하는 이들과 나눌 연말 선물을 찾고 있다면, 혹은 나 자신을 위한 예술 작품을 고민하고 있다면 공예 전시를 방문해 보는 건 어떠세요? 이번 주 뉴스레터는 내일(11월 27일)부터 용산 숙명여자대학교에 위치한 문신 미술관에서 열리는 «아라크네 아이 ARACHNE EYE»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인 아라크네는 직조와 바느질에 뛰어난 인물입니다. 신에 필적하는 직조 능력을 지녔지만, 신과의 대결 후 저주를 받아 거미로 환생하게 되죠. 아라크네는 그리스어로 ‘거미’를 뜻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이번 «아라크네 아이» 전시는 매년 현대공예 전시를 기획해온 푸른문화재단이 올해 7번째로 선보이는 정기전입니다. 25명의 작가가 참여해 섬유나 실을 재료로 한 작품, 직조 weaving나 뜨개질 knitting 등의 기법을 사용한 작품, 아라크네의 속성을 인문학적으로 표현한 작품 등 130여 점을 선보입니다.
직조, 뜨개질, 크로셰, 자수
아라크네의 후손이 있다면 현대사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아라크네의 성정을 떠올려보면 그녀의 아이들은 창의성, 용기, 도전, 성실, 인내심 등을 갖고 있지 않을까 상상하게 됩니다. 이는 현대 공예 작가들이 지향하는 바와 상당히 부합하는 점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공예가는 아라크네의 후예가 아닐까요? 금기숙의 <끌림>은 작가의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작업에 대한 '끌림', 즉 작업에 몰입하게 하는 에너지와 작업으로 연결되는 생각을 상징합니다.
금기숙 작가는 1996년부터 업사이클링의 일환으로 철사를 비틀고 엮어 작품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한 줄의 철사를 다른 줄과 엮으면 하나의 면을 이룹니다. <끌림>의 근간이 되는 이전 작품 <깨달음(2004)>은 드레스 모양으로 철사를 엮은 부조 작업이었습니다. <끌림>에서 드레스는 바탕이 되는 배경에서 벗어나 독립된 조형물로 배경 앞에 위치합니다. 인간의 삶이 사람과 사람의 만남으로 이루어졌듯이, 작가는 철사와 비즈 그리고 다양한 소재들을 무수히 교차하는 과정을 거치며 작품을 완성합니다.
최성임 작가는 평범한 사물을 손으로 잇거나 엮어 또 다른 조형적 형태를 만들어냅니다. 가볍고 작고 연약한 재료를 반복해서 엮는 과정을 거쳐 평범한 재료는 예술이 되는 순간을 맞고 오랜 작업시간과 노동은 견고한 형태로 가시화됩니다. 작품은 한 장소를 점유하듯 설치되어 공간의 맥락과 결합하며, 마치 무대의 배역을 맡듯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작가의 삶과 경험은 작업을 통해 공간에 담기고 관람객은 작업이 주는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각자의 기억을 떠올리게 됩니다. 1)
부유하듯 매달린 구조물의 집합이라는 구축의 방식은 최성임의 작업에서 <끝없는 나무>라는 제목으로 2015년부터 최근까지 지속적으로 등장합니다. 최성임은 작은 유닛을 반복하여 거대한 구조를 이루는 형태의 작업을 선보여왔는데, 이는 네 아이를 키우는 작가가 일상에서 작업을 이어가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었습니다. "식물의 생장이 생명의 충동에서 비롯된 것처럼, 작가에게 공을 끼워 넣고 실을 자르는 등 같은 행위를 반복하며 작품을 증식시키는 행위는 예술의 충동인 동시에 생의 충동이다." 2)
아라크네와 거미
그리스어로 ‘거미’를 뜻하는 아라크네. 거미는 모성애의 상징이기도 하고, 포식자를 뜻하기도 합니다. 거미는 창조와 파괴, 질서와 혼돈, 수호자와 유혹자 등 양가적인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수미 작가의 <희망 A resurrection of hope>은 얇은 선의 형태를 한 거미 조형을 통해 연약함과 강인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수미는 이전부터 가는 다리가 큰 몸을 지탱하는 형태를 강조하는 작업, 혹은 가느다란 다리 형태의 작업을 여러 번 선보인 바 있습니다. 작품 안에서 곤충의 다리는 연약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인내와 지탱을 통한 강함을 내포합니다. 천장에 매달린 거미가 땅에 떨어진 알을 움켜잡고 있는 형상은 자식을 끝까지 지키려는 강한 모성애로 표현됩니다. 작가는 거미의 형태에 여러 재료의 물성을 함께 보여줌으로써 부드러움 속의 강함과 같은 양가적 의미를 구축합니다.
백재원 작가에게 있어 선의 교차와 반복이라는 무의식적인 작업, 체인을 꿰매어 고정하는 무한한 노동은 삶의 자세와 일맥상통합니다. 거미의 시야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베일 시리즈 Veil Series>는 헤드 피스로 착용 시 사방에서 체인이 흔들거리며 수많은 것들을 가리고 또 보여줍니다. 마치 거미줄에 가려진 세상을 바라보는 거미의 시야처럼, 작가는 거미줄 너머 흐릿한 시야로 세상을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보고자 합니다.
한편 요동치는 체인 아래 얼핏 보이는 착용자의 맨 얼굴은 마치 거미줄 위 화려한 포식자 같기도, 머리카락을 정갈하게 가린 성스러운 수호자 같기도 합니다. 옷을 입거나 벗는 것처럼 우리는 무엇을 드러내고 또 가릴지 끊임없이 선택하며 사회에서 생존해 왔습니다. 가려진 틈 사이로 보이는 양가적인 모습은 어느 쪽도 진실 혹은 거짓이라 할 수 없습니다. 가려졌다고 거짓이 아니며 드러났다고 진실이 아닌 것처럼 말이죠.
섬유, 실, 재료의 속성들
이준 작가는 학부에서 회화를 전공한 뒤, 섬유라는 재료에 매료되어 석사 과정에서 섬유학을 전공했습니다. 작가는 레진으로 제작한 인체 모형 위에 실을 감아 붙이는 방식으로 작업합니다. 여기서 실의 컬러와 패턴은 개인의 특수성을 표현하는 매개가 됩니다. 개성을 가진 개인으로서, 사회라는 집단을 이루는 구성원으로서 중간적이고 이중적인 <인간의 무게>를 탐구했습니다. 인간의 삶을 나타내는 동아시아적 소재인 실을 주 재료로 하여, 작가는 3인칭 관찰자의 시점에서 현대인과 현대 사회의 문제를 관망합니다.
이번 «아라크네 아이» 전시가 열리는 문신미술관은 섬유작업을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정영양 자수박물관을 운영하는 숙명문화원 산하의 미술관입니다. 미술관이 위치한 숙명여자대학교는 120여년간 여성 인재를 양성해온 교육 기관이기도 하지요. 직조와 바느질이 여성의 삶을 상징하는 도구이자 손노동으로 인식되어 온 배경을 생각하면 전시 공간 또한 의미가 남다릅니다. 전시를 주관하는 푸른문화재단은 매년 참여 작가들과 아트 주얼리나 소품 등을 판매하는 아트숍을 전시장에서 운영하니, 기회가 된다면 전시장에 한번 들러보시길 추천합니다.
뉴스레터의 전체적인 텍스트는 «아라크네 아이 ARACHNE EYE» 전시 텍스트에서 차용했습니다.
1) 최성임 개인전 «은 은 Silver» 프로젝트스페이스 우민 전시 텍스트에서 재인용
2) 최성임 개인전 «6인용 테이블» 공간 운솔 전시 텍스트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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