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갑자기 추워졌는데 따뜻하게 입으셨나요? 저는 따뜻한 캘리포니아에 다녀왔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출장을 다녀왔는데, 시간을 내서 SF MoMA에 들렀습니다. 샌프란시스코는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인데, 처음 갔을 때에는 하필 공사중이라서 들어가지 못했거든요. 미술관과 전시는 때와 장소가 모두 맞아야만 갈 수 있다는 점에서 매번 한정판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전시를 많이 찾는 이유 중 하나이지 않을까요? 그럼 이번에는 어떤 전시에 기웃대고 왔을까요?
미디어 아트를 끝까지 본 적이 있나요?
저는 미술관에서 미디어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잘 안보는 편이에요. 우선 미디어 아트의 시작 시간을 맞춰서 간 뒤, 끝까지 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편한 의자에 앉아서 영화 한 편을 다 보는 일도 때로는 힘든 일인데, 영상으로 된 미디어 아트를 끝까지 보는 건 조금 더 어렵습니다. 또한 일행이 있다면 일행이 지루해하는데 미디어 아트 작품을 끝까지 다 보기란 쉽지 않죠.
또한 정지된 이미지는 관람자 위치에 있는 제가 직접 뜯어보며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면 움직이는 이미지는 조금 더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개념을 직관적으로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작년에 갔었던 런던의 폴 세인트 성당에 영구설치된 빌 비올라의 <순교자(흙, 공기, 불, 물)>을 오래도록 보지 않아도 빌 비올라가 표현하고자 했으며, 더 나아가 2023년의 관객들이 시간을 지나 느낄 수 있는 맥락들이 있습니다. 종교가 가지고 있는 장엄함과 숭고함, 순교를 이용하는 정치적 맥락, 가톨릭 역사에서 성자로 추대받았던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죽음, 오히려 핍박을 받았던 소수자들, 현대인으로서 마주치는 종교의 맹목성, 다른 종교와의 공통점과 차이점같은 것들을 떠올리게 되죠. 그러다보니 특히 영상으로 만들어진 설치 작품에 몰입하게 되는 것은 제게 흔치 않은 경험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했다는 뜻은 이번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영상 설치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봤다는 뜻이겠죠. 제 전시 리뷰를 읽기 전에 혹시, 구독자께서 영상 설치 작품을 끝까지 본 작품이 있다면 저희에게도 알려주세요.
방문자들(The Visitors)
SF MoMA에서 1월 26일까지 진행되는 라그나르 카르탄슨(Ragnar Kjartansson)의 작품 <방문자들(The Visitors)>에서는 하나의 음악을 60분에 걸쳐서 9개의 방에 나누어진 연주자들이 각자 부르고 연주합니다. 그리고 그 영상은 각각 분리한 뒤 화면 앞에 앉으면 크게 들리도록 세팅해두었죠. 즉, 전체적인 음악을 들을 수는 있지만, 큰 소리로 한 곡으로 들을 수는 없고 자리에 앉아 연주하는 사람의 영상을 보며 그 사람의 음악을 더욱 크게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작품에서 연주되는 음악은 합주되지만, 고르게 분포되지는 않습니다.
어두운 전시실에 들어가면 우선 청각이 매료됩니다. 같은 곡을 연주하고 부르고 있는데, 어떤 소리는 아주 작게 속삭이고 어떤 소리는 아주 가까이서 들리거든요. 그렇게 소리에 이끌려서 전시실의 중앙에 도달하면 동시에 한 곡을 연주하고 있는 9명의 연주자들의 개별 영상이 보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쉬는 구간이 오면 잠시 쉬기도 하고, 악기를 바꾸기도 하죠. 이 작품은 약 1시간 동안 이어지는데, 체감상 한 20분 정도 지난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화면이 분리되어 있지만 또 하나로 관통하는 장치들이 있는데, 이 장치를 쫓아가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화면만 들여다봐서는 알아챌 수가 없습니다. 결국 <방문자들(The Visitors)>의 전체적인 서사를 알아채기 위해서는 모든 것에 신경을 쓰거나, 한 사람씩 9번을 봐야 합니다.
1시간이 조금 넘는 작품을 9번이나 봐야한다는 사실이 2024년에는 비효율적인 일로 느껴질 수 있죠. 화면을 9개로 분할해서 동시에 보여줄 수도 있기도 하고요. 그러나 라그나르 카르탄슨은 그런 방식 대신 모든 연주자와 그들의 연주를 분리해 버립니다.
분리/분리하지 않음
우리는 보통 영상을 분리해서 보고, 음악은 분리하지 않고 듣습니다. 오케스트라는 현악기, 금관악기, 목관악기, 타악기의 연주를 합쳐 하나의 곡으로 연주해내면 청중들은 그 선율을 하나로 인식하죠. 즉, 다양한 선율과 악기의 음색을 합쳤을 때 만들어지는 앙상블을 인지합니다. 반대로 영상 역시 컷 편집과 편집 기법을 활용하여 분리한 뒤 다시 이어붙였을 때 생기는 것들로 내러티브를 만들어내죠. 하지만 라그나르 카르탄슨의 <방문자들(The Visitors)>은 영상은 원 테이크로 촬영해서 분리하지 않고, 음악은 지향성 스피커를 활용해 분리합니다. 이 과정을 말로 풀어내면 복잡하지만 전시실에 들어서면 직관적으로 느껴집니다. 평소에 소리와 영상을 인지하는 감각과 묘하게 어긋난다는 사실을요.
아마도 일반적으로 영화를 만들거나 영상 편집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긴 필름을 두고 극적인 부분만 편집해서 이어붙이는 것을 선택할 겁니다. 다른 파트에서 연주가 계속 되는데, 악기를 바꾸거나 파트가 없어서 쉬는 드러머의 영상을 계속 관객에게 보여줄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러나 이렇게 편집하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소음도 음악의 일부가 됩니다. 그리고 악기를 바꾸는 과정도 퍼포먼스의 일부가 되죠. 모든 과정이 작품이 되는 세계가 펼쳐집니다. 심지어 1시간이나 이어지기 때문인지, 중간에 파트가 없는 연주자들은 화면에서 사라진 뒤, 다른 사람의 화면에 나타나 담배를 피기도 하죠. 이러한 과정은 오히려 편집이 없이 내러티브를 만들어내는 과정입니다.
이 작품이 좋았던 점은 관람하는 동안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하는 점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욕심을 내서 9개의 스크린을 한번에 보려고 해도 사람의 눈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한번에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음악이 동일한 음량으로 들리는 장소에서, 모든 화면을 한번에 볼 수는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그 안에서 어떤 이미지와 어떤 연주를 들을 것인지 선택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이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다 듣고 내 안에서 조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9시간 이상 이 작품을 봐야 한다는 것도요.
어느 한 관람객은 한 영상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잡고 촬영을 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쉬고 난 뒤, 다른 화면 앞에 선채로 촬영을 했죠. 그 관람객은 과연 모든 영상과 음악을 촬영했을까요? 그리고 다시 편집해서 합쳤을 때, 전시실에서 봤던 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까요? 저는 아마도 영원히 모르겠지만요.
가장 아름다운 1시간
이 작품은 아이슬란드 태생의 작가 라그나르 카르탄슨(여기서 카르탄슨은 성이 아니라 부계 이름)이 자신들의 연주자 친구들을 불러 모아서 촬영한 작품입니다. 이중 일부는 아이슬란드의 밴드 시규어 로스(Sigur Ros) 출신이죠. 그들이 미국 뉴욕 북부에 있는 애스터(Astor)가문이 소유했고, 이후에는 리빙스턴 가문이 소유했던 로케비 팜(Rockby Farm)이라는 저택의 각 공간으로 따로 들어갑니다. 리허설은 일주일간 했고, 촬영은 일몰에 걸쳐 딱 한 번만 진행했습니다. 연주자이자 가수들은 모두 헤드폰을 착용하고 있는데 그 헤드폰을 통해 다른 연주자의 연주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각적으로는 완전히 그들은 분리되어 있습니다.
라그나르 카르탄슨의 이 작품은 2012년 스위스의 미그로스 뮤지엄(Migros Museum)에서 전시되었고, 구겐하임 미술관, 보스턴의 현대미술관 등에 전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017년에는 그룹전 “사운드트랙(Soundtrack)”의 한 작품으로 SF MoMA에 전시되었죠. 그 이후 SF MoMA에서는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 7년만에 다시 전시되고 있습니다. 첫 전시와 달리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 격리와 분리를 겪은 2024년의 우리에게는 조금 더 다른 모습으로 느껴질까요?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가서 이 작품을 볼 기회는 다시 없지만, 지금이라도 이 작품을 샌프란시스코에서 관람했던 일이 짧은 일정 중에서도 가장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아름다운 1시간이었어요.
참고
The Guardian, "The Best art of the 21st century" 링크
The Guardian, "Death, volcanoes and Nazis in the family: Ragnar Kjartansson, wild man of Icelandic art", Adrian Searle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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