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첫 음악단어편지 보냅니다. 저는 영기획을 운영하는 하박국입니다.
계산해 보니 지금까지 음반 수집을 해 온 기간이 30년이 넘습니다. 살아온 인생에서 음반 수집을 한 기간이 안 한 기간보다 배 이상 긴 것이죠. 음반 제작을 한 기간은 그 중 약 1/3 정도 되니, 아휴 다 징글맞게 오래 해왔네요. 여러 음반 포맷 중 카세트테이프를 수집한 건 길어도 3년이 넘지 않아요. 정확히 처음 음반을 수집하던 때부터 3년입니다. 카세트테이프 수집을 그만둔 건 듀스의 <DEUXISM>이 카세트테이프의 물리적 한계-하나의 테이프를 100번 이상 들으면 테이프가 늘어난다는 사실을 알려준 탓이에요. 그 후로는 CD만 수집했는데요. CD의 가격은 카세트테이프의 두 배 이상 비쌌고, 제 한 달 용돈에 가까운 금액이었기에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카세트테이프로 더 많은 음반을 들을 것인가, CD로 음반을 오래 소장할 것인가. 당시에는 음반을 사지 않으면 원하는 음악을 들을 수 없었기에 제게는 정말 중요한 결정이었어요. 특이점이라는 개념을 알기도 전 음반의 영생을 꿈꾸던 저는 후자를 택했고 덕분에 CDP도 없이 CD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지금까지 모은 1,500장의 가량의 CD는 어느순간부터 지금까지 제가 사는 곳 벽 한 면에서 박제된 동물 머리처럼 꼼짝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고요.
요즘 저는 음반을 수집하던 초기 시절로 돌아가 카세트테이프를 다시 모으고 있습니다. 핑계, 아니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가장 큰 건 요새 서울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인 부동산 문제입니다. 더는 집에 CD나 바이닐 레코드를 놓을 공간이 없어요. 물론 그러면서도 여전히 지옥에서 온 푸셔맨이 되어, 아니 그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집을 지옥으로 만들며 바이닐 레코드와 CD도 사고는 있지만. 뭐랄까요.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수집한다는 감각과는 달라요. 수집이라 하면 제약을 두지 않고, 또는 뛰어넘으며 거기에 최선을 다해야 하잖아요. 근데 CD나 바이닐 레코드는 최선을 다하지도 않고 적당히 타협하며 모으고 있거든요. 못 사서 아쉬운 CD나 바이닐도 없어요.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허허실실. 이제는 수집하지 않은 음악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시대니까요.
반면 카세트테이프는 그런 게 없어요. 물리적 공간을 크게 차지하지도 않고 심지어 그게 문제가 될 만큼 제가 수집하려는 카테고리에 속하는 카세트테이프의 수가 많지도 않습니다. 그렇기에 가능하면 구입하고 싶은 카세트테이프는 기를 쓰고 모으고 있습니다. 거기다 제가 사려는 카세트테이프는 모으는 이가 많지도 않기 때문에 조금만 모아도 금세 남들과는 다른 차별화된 컬렉션을 가진 컬렉터가 될 수 있기도 하고요. 이 얼마나 효율적인가요? 근데 대체 어떤 카세트테이프를 수집하냐고요?
카세트테이프 (2) 편에서 계속
퍼스트 에이드(FIRST AID) <Nostalgic Falling Down>
영기획에서 처음으로 제작한 피지컬 음반도 (샘플러를 제외하고) 카세트테이프였습니다. 퍼스트 에이드라는 음악가의 음반이었어요. 그는 회기동 단편선의 <백년>의 엔지니어로 참여하기도 했고, 이미 일렉트로닉 음악 신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던 음악가였는데요. 마침 <Nostalgic Falling Down>이라는 음반을 밴드캠프를 통해 발매했고 큰 화제를 모았어요. 당시만 해도 워낙 발매되는 일렉트로닉 음악 음반이 없었는데, 갑자기 높은 완성도의 음반이 나타났으니까요. 본래 피지컬로 발매되지 않은 음반이었는데 지글거리는 사운드를 듣자마자 카세트테이프로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얼마 후 ‘카세트폐허’라는 DIY 카세트테이프 페어가 열리기도 했고요. 그때 퍼스트 에이드에게 메시지를 보내 처음으로 얼굴을 봤습니다. 계약금으로 제가 쓰던 악기인 엠오디오 트리거 핑거(M-Audio Trigger Finger)를 건네고 (이 얘기는 나중에 한 번 더 할게요!) <Nostalgic Falling Down>의 카세트테이프를 100장 한정 제작하기로 했어요.
<Nostalgic Falling Down> 카세트테이프는 DIY로 제작했습니다.
카세트테이프 복사만 주로 교회 음반을 제작하는 공장에 맡겼고 나머지는 모두 제가 직접 만들었습니다. 사이드 라벨은 직접 스티커 라벨지를 구입해 프린트한 후 붙이고, 인쇄소에서 출력한 부클릿과 다운로드 코드를 하나하나 접어 직접 케이스에 넣었습니다. 이렇게 100장을 다 만들고 난 후 어깨의 뻐근한 감각이 지금도 생각나네요. 아직도 집에 혹시 몰라 추가로 찍고 아무 것도 붙이지 않은 카세트테이프와 사고 남은 카세트테이프 케이스가 남아 있답니다. 이를 계기로 퍼스트 에이드는 지금까지 영기획과 함께 일하고 있어요. 싱어송라이터 권월과 포워드(F.W.D.)라는 그룹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하고 곧 세 번째 음반을 발표하는 룸306(Room306)의 멤버이자 프로듀서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카세트테이프가 만들어 준 인연이랄까요. <Nostalgic Falling Down> 카세트테이프는 완판됐습니다. 다시 제작하기엔 제 어깨가 전보다 더 안 좋아졌고요. 대신 2015년부터 음원 서비스를 하고 있으니 여러분은 언제라도 편한 자세와 디바이스로 들으시면 됩니다. 위에서도 얘기했듯 수집을 해야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대는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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