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참고 보면 숨 막히는 몸매

2023.04.16 | 조회 60.4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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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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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꿀떡같이 “헬스요.”라고 대답하면 좋겠다. “헬스장 가서 회원들 관찰하면 재밌지 않나요? 크크크.” 이렇게 대답하고 나면 스스로 음흉해 보인다. 고물 다 흘리고 먹는 시루떡 같달까 개떡 같달까… 그런 대답이다. 내 입에도 넣고 싶게 서너 글자로 딱 떨어지게 대답하는 사람들 보면 정말 부럽다. 아무튼 특별한 준비물 없이 실내용 운동화 딱 하나만 챙겨도 된다는 것, 10년 전 헬스를 선택한 이유다. 장갑이나 그립, 덤벨까지 들고 다니는 사람도 흔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들만의 리그일 뿐. 사는 동안 건강하게 숨 쉬는 것이 목표인 나는 나이키 운동화 한 켤레면 족하다. 더구나 헬스장에 회원복이 있으니까.

 

얼마 전 ‘회원복과 개인복 비율에 따른 피트니스 클럽 분위기 차이’라는 야매 보고서를 상당히 재밌게 읽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개인복을 입은 회원이 많은 헬스장은 높은 긴장감을 유발하여 운동 효율을 극대화하는 반면 기구 선점에 어려움이 많다고 했다. 반대로 회원복을 입은 회원의 비율이 높은 헬스장은 느슨한 분위기가 단점이지만 인기 있는 기구를 쉽게 차지할 수 있다고 했다.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도 야매라고 생각하는 이유? 사실상 회원복을 입어도 터질듯한 육체미를 자랑하는 행님들이야말로 고인 물 중 으뜸이다. 게다가 이마트 장바구니를 짐백으로 쓴다면? 바로 루틴 스캔하느라 바빠진다. 그런데도 나는 개인복 비율이 높은 헬스장을 고르곤 한다. 개인복 입은 회원들이 많아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니까!

 

찌나시란 가슴과 복근이 훤히 드러나는 민소매를 부르는 은어인데, 그것만 입으면 사람이 귀여워진다. 보통 처음에는 아주 헤비한 후드를 입고 시작하는데, 가슴이나 어깨 운동이 끝나자마자 후드를 벗는다. 운동 수행성을 직관하기 위해 찌나시를 입었을 텐데, 펌핑 후에야 세상 밖으로 나오는 이유가 뻔하지 싶다. ‘매끈한 몸을 포장하려고 운동복을 사는 건 낭비 아닌가?’ 용도가 욕망에 전복된 순간! 찌나시가 천하에 공개되고 회원 모두를 관객으로 전락시키는 순간! 재빨리 동공을 움직여 관찰한 그들의 표정, 정말 귀엽다. 새로 받은 RC카를 놀이터에 가지고 온 어린아이의 표정 비슷하다. 사실 귀여움 말고 질투의 마음도 어지간히 있긴 하다. 상대편과 내 편의 그라운드가 정확히 반반, 한 치 오차도 없는 축구나 농구와 달리 헬스장은 경계 없이 몸, 몸, 몸들이 계속 내 쪽으로 침범한다. ‘와, 정말 숨 막히는 몸이군.’ 헬스장엔 공정함이란 없다. 자비도 없고.

 

매주 토요일 아침, 사이클 존은 화원이 따로 없다. 검정 회원복 사이로 라일락이며 민트 그리고 개나리 레깅스가 아드레날린을 뿜뿜 터트리며 회전한다. 구입처가 궁금할 정도로 채도가 높은 레깅스에 단정한 메시 소재 흰색 반소매 티셔츠를 입은 주인공들은 다름 아닌 할머니 운동모임. 나는 속으로 소녀시대라고 부른다. 관음이 아니라 존경의 눈빛이니 이해해 주시리라 믿으며 운동 에너지를 가득 채운다. 사실 할머니들이라고 지칭하여 죄스러운 마음이 든다. 그녀들의 직업을 알았다면 아마 윤여정 배우처럼 직업으로 불렀을 터.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지만, 종종 하나를 보니 열이 궁금해지곤 한다. 그녀들이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이유, 계속 움직이고 땀 흘리는 삶의 모토를 단지 형형색색의 레깅스에서만 찾고 싶지 않다. 운동을 끝내고 구석구석을 씻어내는 동작, 엄지발가락부터 정수리까지 뻐근함을 살피는 정성 그리고 트지 않도록 바르는 로션… 운동복을 벗은 후에도 이어지는 나를 긍정하는 시간, 아마 그녀들도 그렇지 않을까?

 

2년 전 아무 날 정말 충동적으로 PT 32회를 끊으며 먹은 마음. ‘깨작깨작 덤벨 들던 지난 8년의 헬스 인생을 정리하자!’ 주 6회 출석 도장을 찍고 있고, 옷장 한 섹션을 운동복으로 가득 채우게 된 지금, 어쩐지 스스로 대견하다. 어린 시절부터 지독하리만치 타인에게 경쟁심이 들지 않았기에 어떤 운동도 끌리지 않았다. 축구, 농구… 심지어 스타크래프트마저! 우습게 생긴 게 맘에 들어 저그를 골랐던 날에 저글링만 뽑아대다 동기 형들의 무례한 질타를 받았던 기억도 선하다. 경쟁이 아닌 단련하는 운동, 헬스에 평생 취미라는 자격을 주고 싶다. Fitness center나 Gym이 아니라 헬스장이라고 부르면 어쩐지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양손도 가볍고! 운동화 한 켤레면 나에게 충분하니까. 숨 막히는 몸매? 그까이꺼 별거 없다. 숨 참고 보면, 나도 숨 막히는 몸매!

 

*취미란 가벼운 거네요.

 

 

글을 쓰며 들은 노래 / Ryuichi Sakamoto - energy f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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