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들은 튀긴 음식을 좋아한다. 8살이나 13살이나 똑같다. 그날은 조금이라도 더 커 보이는 새우까스를 받기 위해 애들이 아웅다웅했던 날이었다. 건강 걱정 때문에 호기롭게 튀김을 먹을 수 없던 나는 식사를 잠시 멈추었고, 이런 대화를 듣게 되었다.
“지아야, 왜 새우까스 안 먹어?”
“알레르기.”
“새우 알레르기 있어?”
“응.”
“기억할게. 내가 이제 아침마다 말해줄게.”
‘아나필락시스’라던가? 짧은 대화였지만 몸에 온갖 알레르기가 퍼지는 느낌. 정말 오글거렸다. 알레르기가 과민해지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더니. 그래도 ‘자기야.’라고 부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학급 규칙으로 ‘애칭 금지’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 건욱이는 지아보다 일찍 등교하기 시작했다. 식단표에서 ‘새우 및 갑각류 알레르기’를 칭하는 기호를 찾아 형광펜으로 칠해놓고, 지아가 등교하면 피해야 할 음식과 먹어도 괜찮은 음식을 알려주었다. 알렉스의 세족식에 버금가는 건욱이의 메뉴 낭독회였다.
게리 체프먼은 사랑의 언어를 다섯 가지(인정하는 말, 함께하는 시간, 선물, 육체적 접촉, 봉사)로 나누고, 사람마다 제1의 언어가 다름을 역설한 바 있다. 건욱이의 ‘사랑의 언어’는 무엇일까? 좋아하는 사람을 기억하고, 기억을 맹세하고, 맹세를 실천한 것으로 보아 답은 딱 하나다.
사실 건욱이 이야기는 아주 말랑한 편이고, 요즘 애들 연애는 어른 입장에서 마뜩잖은 장면도 많다. 투투데이에 서로에게 고가의 선물의 주는 문화를 즐기고, 선물 밑에 영수증을 넣어 갚아야 할 빚임을 암시하는 요즘 아이들이 가끔은 무섭게도 느껴진다.
낭독회 마다 친구들이 놀린답시고 온갖 러브송을 BGM으로 불러댔지만 건욱이는 멈출 줄을 몰랐다. 정말 영원할 것만 같았다. 지아가 ‘노잼’이라며 일방적으로 이별을 선언하기 전까진 말이다. ‘어떻게 재미없다고 사람을 차버릴 수 있지? 그거 너무 잔인한 것 아니야?’ 난 꽤나 큰 충격에 빠졌다.
“건욱아, 괜찮아?”
“뭐가요?”
“지아랑 헤어졌다고 들었거든. 선생님이 걱정이 돼서.”
“다른 애 좋아하면 되죠.”
대답을 끝낸 건욱이는 옆에 있던 친구와 가위바위보 다리 찢기를 시작했다. ‘맞아. 다른 애를 좋아하면 되는 거구나. 왜 하나만 사랑해? 하나 끝나면 다른 하나 사랑하면 되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내 속에 무언가 용기가 솟기 시작했다. ‘사랑, 다시 시작할 수 있구나.’
어른보다 작은 체구로, 어른만큼 먹지도 못하면서, 어른의 두 배 이상 뛰어다니는 애들의 힘은 어디서 나올까? 그들의 ‘단순함’에서 기인한다고 굳게 믿는다. 경험의 누적치가 얕아서 간단한 셈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에너지가 남는 거겠지.
엄지와 검지 그리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며 계산하는 만남, 영리하게 밀고 당기는 연애가 무슨 소용인가? 좋은 이별 운운하며 이별마저 성장의 발판으로 삼으라는 계발서들 때문에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복잡하면 미로가 된다.’ 길을 잃게 만들 목적으로 만든 것이 미로라는 점을 늘 명심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한낮의 숲, 어린잎에 맺힌 물방울을 본 일이 있다. 흔들리는 바람에 떨어질 듯 꺄르르 굴러다니는 작은 몸짓들을. 꼭 어린애들 소꿉장난 같은 그 장면을 한참을 보았다. 단순해 보이지만 복잡한 일이다. 사랑하고 헤어지는 일, 다시 사랑할 마음을 먹는 일. 애들 장난 같은 사랑.
*결국 지아가 새우 알레르기 있는 건 나만 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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