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

2023.07.10 | 조회 8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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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은 결코 슬픈 영화가 아니다. 이 감상을 풀어내는 모든 이유가 되는 하나의 장면이 슬플 뿐. 곧 결혼 29주년을 앞둔 애드워드(빌 나이)와 그레이스(아네트 베닝)는 오랜만에 상경한 아들 제이미(조쉬 오코너)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한다. 먼저 식사를 마친 제이미가 방으로 들어가고, ‘우리의 이야기’를 하자는 그레이스의 청에 애드워드는 마지못해 위키피디아 한 대목을 읊을 뿐이었다. 사랑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것이라며 다그치던 그레이스는 격해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애드워드의 뺨을 갈긴다.

 

냉정을 유지하던 애드워드는 “피곤해. 이만 잘래.”라는 말을 남기며 떠나고, 그레이스는 그의 꽁무니를 향해 이런 훅을 날린다. “날 죽이고 싶다고, 날 싫어한다고 말해.” 하지만 아무런 대꾸가 없다. 뺨을 때려놓고, 당신도 때려달라고 뺨을 내놓는 그레이스의 심정이 끔찍하게 공감 되었다. 또 하나의 애정하는 영화 「시인의 사랑」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시 말고는 모든 것이 심드렁한 시인(양익준)에게 아내(전혜진)는 울분을 토하며 이런 말을 뱉는다. “너, 나 사랑해? 나 만지고 싶고, 핥고 싶고, 내 몸속 깊숙이 들어오고 싶고, 내 똥까지 먹을 수 있어?”

 

어릴 적 엄마와 아빠가 말다툼이라도 붙을라치면 사소한 이유들이 불쏘시개가 되고, 싸움으로 번진 뒤에 모두 타버릴까 봐 무서웠다. 그들이 다투기 시작하면 나는 푹 꺼진 어깨로 내 방 청소를 시작했다. 싸움의 이유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나 시간이 증명하길 그들의 다툼은 일종의 ‘사랑의 의식’이었다. 마음이 가득차면 덜어내기 위해 일부러 빵꾸를 내어 흘려보내는, 그들만의 사랑 확인법. 부딪히고 스파크를 틔우며, 덜어내고 다시 채우는 2인극. 요샌 그들이 아웅다웅할라치면 이렇게 말한다. “아이고, 금슬 좋네.”

 

나의 연애에서도 ‘다툼과 화해’는 몰입도를 높이는 유용한 클리셰가 되어주었다. 그녀와 함께 어린이대공원에 벚꽃 구경을 가던 어느 날, 7호선으로 환승하기가 귀찮았던 우리는 건대입구역에서 내렸다. 상점에 걸린 상품마다 가지고 싶은 것을 고르고, 상대에게 적당한 가격을 묻는 우리끼리 재밌는 장난을 하다가 문득 다투고 싶어졌다. 갑작스러웠지만, 사랑이 가득찼음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빵구를 내고 싶었다. “(망고 쥬스를 가르키며) 나 저거 사줘.” 그녀가 흔쾌히 사준다고 하자 나는 이렇게 말했다. “(작은 목소리로) 곧 저녁 먹어야 하니까 단 것은 안 된다고 말해. (목소리를 키우며) 왜? 나 저거 먹고 싶단 말야. 사줘.”

 

땡깡 부리고, 조르고, 조금 다투고, 다시 그녀가 내 품에 안기는 걸 확인하는 일은 늘 짜릿했다. 그녀를 정말 사랑하지만 이따금씩 결례를 범하고 싶고, 무리한 요구를 해대고 싶은 순간이 찾아왔다. 그럴 때면 그녀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너에게만은 황당무계 아니면 요령부득의 인간으로 남고 싶어. 내가 거지같이 행동하면 네가 한숨 쉬고, 고개를 젓겠지? 그럼 왜 날 더 사랑하지 않느냐고 치졸하고도 연약한 소릴 해대고 싶어.” 지하철 개찰구 앞에서 지긋지긋하게 싸우다가 보내고, 아차 싶어서 혼비백산 에스컬레이터를 뛰어내려가서 다시 손잡는 연인이 되자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엔 물이 흐르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손잡고 걷다 보면 사이가 멀어지는 날도, 다시 가까워지는 날도 있다고 한다. 비가 퍼부어 물이 불어버린 날엔 나라도 살아야지 싶어 손을 놓고 싶고, 각자가 그리는 미래가 달라 등을 돌리고 싶은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마주 잡은 두 손, 끝까지 놓지 않을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나를 지독하게 갈구하고 있구나.’ 일종의 환희, 요구하고 보채고 기대는 모든 것들의 총체, 바로 ‘다툼’이 발원지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은 사랑이라는 메달을 목에 걸기 위해 매일 다투고 싶었던 여자와 처음으로 다툴 용기를 낸 남자의 이야기이다. 물론 그것도 사랑이라고 믿는다.

 

*원제는 ‘Hope Gap’입니다.

 

글을 쓰며 들은 노래 / pigfrog - is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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