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대탈출

2024.06.30 | 조회 5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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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의 주석

말보다 글이 유창한 인간의 주절주절

1월 20일 23시, 위치는 긴시초역 플랫폼 위. 하네다 공항으로 돌아가는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쿄의 취객들도 서울의 취객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뒤엉켜 어깨동무를 하고 거침없이 웃고 떠드는 사람들. “엥? 갑자기 노선이 바뀌었어.” 초 단위로 최적경로가 바뀌는 구글맵 때문에 두통이 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시금 결단의 순간이 찾아온 셈. ‘새로운 노선으로 가자면 개찰구 밖으로 환승하는 모험을 해야 하는데, 지금 기다리는 열차가 진짜로 사라진 거라면?’

 

‘사실 나도 도쿄의 취객이었음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뜨뜻한 사우나를 마치고, 연거푸 들이킨 넉 잔의 맥주 그리고 여행 마지막 날의 피로감이 내 사고체계를 장악했으리라. 환승과 함께 열차는 떠났고, 그 순간 구글맵은 하네다로 가는 내일 일정을 말했다. ‘이럴 거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구글아…’ 내가 허둥이라면, 친구는 지둥이었을까? 하네다 공항과 가장 가까운 역을 찾고, 택시를 잡기 가장 쉬운 역을 짚어보는 동안에도 야속한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십 년 전, 똑같은 일을 겪었다. 저스트고 도쿄 한 권 들고 떠났던 밤도깨비 여행이었다. 츠키지 시장에서 가성비 초밥을 먹고, 낮맥을 들이켜고 캡슐호텔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잤던 기억이 난다. 그러곤 마지막 날에 도쿄 타워만 보고 후다닥 공항으로 가는 일정이었다. 역시나 늦은 밤이었고, 우리나라의 우수한 환승 시스템을 조잘거리던 찰나 역무원 아저씨는 공항까지 가는 열차가 끊겼다고 했다. 지나치게 친절한 음성으로 말이다.

 

하네다 공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십 년 전 이야기를 친구에게 들려주니 그야말로 목젖 보이게 웃었다. “나 진짜 멍청하지 않냐?”, “근데 약간 귀엽기도 해.” 주거니 받거니 하며 트래블월렛에 엔화를 넣으려는데 친구의 유심이 딸깍 끊겨버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정엔 공항에 있겠지 하는 계산으로 3일권을 신청한 탓이었다. 그렇다. 실수는 실수를 낳고 실수 뭉치가 되어 데굴데굴 구르며 다시금 폭소할 수밖에 없었다.

 

작년 여름, 자전거에서 굴러떨어진 적이 있었다. 잠시 한 눈을 판 사이에 앞 바퀴를 벤치에 박았고, 몸이 붕- 떠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운동 가방과 텀블러가 요란스레 널브러지는 장면, 사람들이 힐끔거리는 장면이 연이어 보였다. 멋쩍게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에 웃음이 삐쭉 튀어 나왔다. ‘완전 예술점수 10점 만점.’

 

갑작스러운 재채기에 긴장이 풀린 격이었다. 답답했던 코가 뻥 뚫리듯 개운했다. 살다 보면 플라스틱 쟁반 위에 음료 열 잔을 들고 계단을 오르는 아슬아슬함을 느낄 때가 있다. ‘절대 엎지 말아야지.’ 자꾸만 되뇌게 되는 순간들 말이다. 그런데 사실 한두 잔 엎어봐야 별일 생기지 않는다. 아무런 유익함이 없다고 믿었던 실수들은 작은 빈칸, 웃음을 만들어주었다.

 

하네다 공항을 바로 앞에 두고 택시 기사님은 실수로 길을 잘못 들었다. ‘이거 완전 코로나 이후로 가장 강력한 전염병인데?’ 생각했다. 도착하자 기사님이 하얀 장갑을 끼고 고상한 쟁반에 영수증을 고이 접어 올려놓으셨다. ‘분명 공항 체크인 시간이 늦었다고 말했더니… 망할 형식주의. 근데 한편으론 아름다운 문화!’ 실수로 물든 도쿄의 밤이 깔깔깔 저물고 있었다.

 


*‘한국 대사관에 가면 우리를 도와주려나, 한국 대사관까지는 어떻게 가야 하지, 이 순간에도 포켓 와이파이는 더럽게 무겁네…’같은 생각을 하며 역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 검은 재킷을 입은 여자가 우릴 향해 다가왔다. “한국 분이세요?” 화음 맞춰 “네!”라고 외쳤음에도 민망 뻘쭘한 기색 하나도 없었고, 이 밤에 왜 여기에 있게 됐는지를 옹알옹알 댔던 어리석은 여행객 두 명만 오롯이 있었다.

 

기념품으로 바나나빵 사 간다고 천 엔씩 남겨뒀던 나와 친구 주머니를 털어봤자 이천 엔이었다. 공항까지 삼천 엔이 든다는 택시를 타려면 천 엔이 막막했다. 사정을 들은 그녀는 선뜻 천 엔을 빌려주었다. 너무 고맙지만서도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돈을 빌리고 갚을 방법도 막막해서 연거푸 손사래를 쳤다. 그럼에도 그녀는 싱긋 웃으며 천 엔을 쥐여주고 홀연히 사라졌었다. 그날의 일은 내가 받은 ‘은혜’ 카테고리에 저장 중이다. 먼지 쌓일라 늘 상기하면서.

 

글을 쓰며 들은 노래 / 김동률-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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