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디와 이츠키 (3) 어쩌면 사랑

2025.05.23 | 조회 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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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는 왼쪽 가슴에 누운 사람을 어쩌면 사랑을 가만히 살폈다. 리모컨을 들고 조심히 딸깍, 일시 정지를 눌렀다. 잠잠해진 방 안에 도드라진 ‘포-포-’하는 잠든 하나의 숨소리를 디디는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직감했다. 심장 앞에 가지런히 모은 두 손, 까만 넓적다리 위에 걸쳐진 뽀얀 정강이를 천천히 훑었다. 핥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눌렀다. ‘쿵-쿵-’ 두 심장도 닿고 싶다고 뛰어댔다. ‘우리만의 행성… 공전하는 중… 안전한 곳…’ 디디는 마음으로 씹어 넘겼다. 그때 이츠키가 옅게 움직였다.

 

“디디, 아직도 영화 보는 중이었어요?”

“오늘도 일찍 잠들기엔 글렀나 봐요. 이츠키, 이 영화에서 진짜 빌런은 뭉개지는 딕션으로 연기하는 저 녀석이에요. 이제 한국 영화도 자막 켜고 봐야 한다니까요.”

 

디디는 리모컨의 ‘10초 전’을 연타하고, 자막을 보려 ‘1cm’를 빼던 고갯짓을 응석 부리듯 털어놨다. 품 안에 잠든 사랑이 깰 것 같아서 그랬다는 말은 낯이 간지러워 뺐다. 이츠키는 하품을 길게 하곤 조심히 손을 뻗어 디디의 긴 속눈썹을 아이스크림 뜨는 마냥 굴렸다. ‘나비의 날갯짓 같아. 감았다가 뜨고, 다시 감았다가 뜨네. 간지러워서 날아가면 어쩌지.’ 생각하다가 다시금 폭 안겼다.

 

소풍과 비 예보, 너무 지루해서 하품이 나오는 교과서 같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기상청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남발하는 양치기 소년이 되었고 등교 시간에 맞추어 날씨가 기적처럼 맑아지자, 이츠키의 마음도 개었다. 평생 손꼽을 만큼 쾌청한 날이었다. 단 한 조각의 먹구름이 있다면 노파심에 절은 담임선생님뿐이었다. 그는 자꾸만 목청을 높였고, 과하게 보호했다. “사고 없이 돌아가자! 미술 숙제 먼저 하고 놀도록!” 줄의 가장 뒤에 있던 이츠키는 입 모양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후회 없이 그리고 돌아가자…’

 

이츠키는 특별한 주제를 찾아 걷기 시작했다. 튤립이 만든 길을 따라 걷다가 풍차 가게에서 파는 라벤더 아이스크림 콘을 하나 샀다. 한입 베어 물자 비가 소풍을 망쳐버릴까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작은 보상이 큰 만족을 주었다. 이츠키의 입은 바쁘게 움직였지만, 더운 날씨가 더 빨리 아이스크림을 먹어치웠다. 오른손이 보랏빛으로 물들었지만 왼손에 들린 수채 도구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때 달콤한 냄새를 따라 왔는지 흰 나비 한 쌍이 날아들어 팔랑였다.

 

“괜찮으면 내 손수건 쓸래?”

“양손이..지금…”

“너는 꼭 서성이듯 말하네. 자 이렇게 말해봐.”

 

별안간 나타난 낯선 아이는 팔을 저으며 씩씩하게 걷는 시늉을 했다. 이츠키는 웃음을 꾹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쌀쌀 맞은 건지 따뜻한 건지 알 수 없는 낯선 아이에게 라벤더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수채 도구를 라벤더에게 넘기자 라벤더는 이츠키의 오른손을 내려주었다. 이미 나비가 날아간지 한참이 흐른 뒤였다. 우리 학교 아인가?’싶은 생각에 얼굴을 뜯어보았지만 분명 처음 본 얼굴이었다. 비슷한 키에 그을린 피부 그리고 평범한 생김새였다. 유독 긴 속눈썹만 눈에 띄었다. 의외의 동행은 순진한 재미를 주었다. 두 아이는 새로운 친구를 만드는 과정을 꼿꼿한 자세로 즐겼다. 유행가의 멜로디와 가사, 옷과 신발, 공부와 놀이는 똑딱이 단추처럼 꼭 맞아 들어갔고 둘은 가까워졌다.

 

“라벤더, 드디어 그리고 싶은 게 생겼어. 우리 저거 타지 않을래?”

“너무 높지 않을까? 이츠키, 내게 생각할 시간을 조금만 줘.”

 

대관람차에는 튤립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라벤더는 작은 소리로 튤립을 하나씩 세었다. 끝이 나면 처음부터 다시 세고, 여러 번 반복했다. 발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귀엽기도 했다. 이츠키는 라벤더의 손을 조심히 당겨 옆에 앉히곤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게 했다. 천천히 움직이는 대관람차의 속도에 맞춰 조금씩 시선을 들게 했다. 라벤더의 숨소리가 진정되자 이츠키는 너른 놀이공원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내려다보는 세상은 단순한 도형들로 빼곡했다.

 

시간은 멈추지 않았고 정오에 맞추어 종소리가 울렸다. 두 아이는 가장 높은 곳에 이르기까지 귀가 자주 먹먹해지곤 했다. 답답함을 풀기 위해 일부러 하품하고 꼴깍 침을 삼키는 서로가 웃겨 배를 잡고 웃어댔다. 정점의 상쾌함, 예상치 못한 웃음이 뒤섞여 들뜬 두 아이는 손을 잡고 빙글 돌았다. 그때였다. 번쩍하더니 대관람차를 향해 굉음이 내리쳤다. 자리가 출렁하더니 스피커에서 ‘시스템 오류’, ‘자리에 앉아서 대기’, ‘구조’ 같은 말들이 쏟아졌다. 라벤더의 호흡은 가빠졌고, 안전지대를 찾듯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이츠키는 재빨리 라벤더를 안고 토닥였다.

 

“우리 이름을 붙이자. 스노우볼. 맞아. 성깔이 지독한 사람이 거세게 흔든 스노우볼 안에 있는 거야. 하지만 기다리면 눈보라는 잠잠해질 거야. 어때? 라벤더 너도 한 가지 말해볼래?”

“음… 일시 정지를 누른 거야. 언젠가는 씨디가 다시 돌아갈 테고 우린 아름다운 노래를 들을 수 있을 거야. 그러니 지금은 잠시 쉬면 되는 거야.”

 

디디는 이츠키에게 놀이공원 이야기를 자주 청하곤 했다. 서로의 존재를 몰랐던 시절의 이야기는 늘 흥미로웠지만 그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특별해졌다.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는데 이츠키가 이야기를 마칠 때쯤엔 추락이 아닌 회전이라고 말하는 환청이 들리기도 했다. 마구 흔들리는 스노우볼 속에서 혼란스러웠을 아이들 그리고 서로를 향한 끈질긴 위로가 디디는 마음에 쏙 들었다. ‘나는 그때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었을까?’ 하면서 그 날의 하늘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미지의 사고’로 잃어버린 유년 시절의 기억이 아깝게 느껴졌다.

 

“이츠키는 라벤더가 그립지 않아요? 물론 나에겐 해피엔딩이지만 말이죠. 살짝 질투가 나기도 하거든요.”

“아니요. 라벤더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줬거든요. 기억이 돌아오면 내게 알려줘요.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반사점과 뇌자극에 대해 그리고 옥시토신에 대해 중얼 대던 디디는 이츠키의 품에 안겨 깊은 잠에 빠졌다. 아무 두려움 없는 고요한 방 안에서 이츠키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우리 꿈속에서 앳된 얼굴로 만나.”

 

글을 쓰며 들은 노래 / Matthew Ifield - I Think They Call This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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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갭퍼의 프로필 이미지

    갭퍼

    0
    about 1 month 전

    디디와 이츠키의 이야기가 이어져서 좋아요 :)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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