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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왔습니다. 무더운 여름이 가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기분 좋은 계절이죠. 하지만 저는 이 계절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습니다. 매년 저를 괴롭히는 녀석이 있거든요. 바로 환절기 비염입니다. 평생 저를 따라다닌 이 지긋지긋한 녀석과 함께한 가을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가을 바람에 콧물 나온다
비염이 다시 찾아왔다. 계절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어쩌면 내게 가을은 단풍이 아니라 비염으로 시작되는 계절인지도 모르겠다.
월요일 아침, 눈을 뜨기도 전에 코안의 눅눅함이 먼저 느껴졌다. 머리가 무거워 일어나기 힘들었다. 머리가 무거운건 코안에 뭐가 많이 끼였기 때문인건가. 휴대폰보다 휴지를 먼저 찾았다. 팽- 하고 풀어냈다. 여전히 무거운 머리를 뒤뚱이며 화장실로 향했다.
옷을 입는 와중에도 들숨날숨이 코 안에서 걸리적거렸다. 여분의 마스크와 휴지를 챙겼다. 맺힌 콧물을 숨기고, 흐르는 콧물을 닦아내기 위해서이다. 코가 헐지않게 수시로 바를 로션도 잊지 않았다. 출근길에는 콧물과의 사투가 이어졌다.
울기 직전의 코가 찡한 상태가 24시간 지속되는 느낌이다. 일하다가도 훌쩍, 밥먹다가도 훌쩍, 웃다가도 훌쩍인다. 울기 직전의 상태가 지속된다는 점에서, 비염은 약한 정신병에 비할만 한 것 같다.
갑자기 길에서 눈물을 터뜨리는 사람을 본적이 있는가. 비염에 걸린 나는 갑자기 콧물을 터뜨리곤 한다. 나도 전혀 예상할 수 없는 타이밍에 콧물이 주르륵 흐르고 재채기를 세네번 연달아 한다. 꼴이 무척 흉하고 불성사납다.
콧물로 얼룩진 어린시절
초등 저학년이었던 나는 매주 두번 콧구멍을 막고 20분 동안 독한 약물을 코에 머금었다. 숨도 쉬기 어려웠다. 가끔 약물이 콧구멍 뒤로 넘어갔다. 미간이 찌푸려졌고 머릿 속에 얼얼했다. 바늘로 코 안을 찌르는 듯한 그 고통이 정말 괴로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힘든건 그 긴 시간을 혼자 묵묵히 견뎌야 했다는 거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따갑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상태를 허름한 소파에 가만히 앉아 견디고 있어야 했다. 다큐멘터리에서 UDT 훈련생들이 바닷물 가득 채운 잠수경을 코까지 덮어쓰고 밥을 먹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초등학생인 내가 UDT 훈련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초등 고학년 때는 아빠 차를 타고 다른 도시에 있는 의원에 다녔다. 초상집처럼 훌쩍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두세시간씩 대기했다. 그때 그 의원에서 처음으로 알러지 비염약을 처방해주었던 것 같다. 이 약의 효과는 엄청났다. 좁쌀만한 약 하나로 상쾌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비염 없는 세상이 있단걸 알았다.
하지만 비염약에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었다. 바로 쏟아지는 졸음이다. 약의 효능과 함께 이 부작용도 절실히 체험했다. 약을 안 먹으면 콧물과 싸워야 했고, 먹으면 졸음과 싸워야 했다. 비염은 쉽게 치료되지 않았다. 이것은 내 평생의 핸디캡이자 정체성의 일부가 되었다.
비염만 아니었다면 서울대에 갈 수 있었을 텐데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비염은 나를 괴롭혔다.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항상 코를 풀고 닦았다. 아무리 힘껏 흥흥대고 살살 달래봐도 막힌 코는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너무 답답하고 짜증났다. 책상 한 귀퉁이에는 늘 콧물이 묻은 축축한 휴지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코를 계속 풀다보니, 나중에는 코 주변이 헐어있었다. 거기에 콧물이나 휴지가 닿으면 그렇게 따가울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로션도 챙겨다니기 시작했다. 병주고 약주듯 코풀고 로션바르기를 반복하니 코가 헐어 따가운 일은 줄어들었다.
매년 4월에는 1학기 중간고사가 있었고 10월에는 2학기 중간고사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비염 증상이 가장 심한 달 이었다. 나는 매년 비염을 끼고 내신시험을 치뤄야 했다. 모래주머니를 차고 멀리뛰기 수행평가를 본 것과 마찬가지였다.
대학 입학 후 "비염만 아니었다면 서울대에 갈 수 있었을 텐데"라며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 사실 그 말에는 반 쯤 진심이 섞여 있었다. 비염 때문에 수험생활이 정말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이걸 핑계 삼아 더 나아갈 노력을 포기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비염 극복하기
어린 코끼리가 말뚝에 발이 묶인채 살아가다보면 어른이 되어서도 그 말뚝에 묶인 줄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충분히 그 말뚝을 뽑아버릴 수 있는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린시절의 기억과 경험이 성인이 된 자신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코끼리와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어린시절의 나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비염에 걸린 나'로 살았다. 비염은 마치 말뚝처럼 어린시절의 나를 괴롭히고, 방해하고, 막아섰다. 분명 비염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간도 있었는데, 그때도 '비염에 걸린 나'처럼 약해빠진 마음가짐과 행동양식을 따랐다. 찌질하고 바보같았다.
지금의 나는 비염에 걸리지 않은 건강한 상태의 나를 너무나도 잘 안다. 건강한 상태의 나를 벗어났다는 느낌을 즉시 알아차린다. 비염이 일으키는 부정적인 생각과 바보같은 행동을 잘 다룰 수 있다.
비염이 온 걸 보니 가을이 왔나보다. 예전 같았으면 한바탕 비염과 씨름하며 괴로워했겠지만, 이제는 그저 계절이 지났다는 신호로 받아들인다. 여전히 코를 훌쩍이지만 그게 더이상 나를 붙잡지는 않는다. 나는 그 말뚝에 묶여있지 않다. 그래, 그냥 가을이 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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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주에는 이런 따뜻한 후기가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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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디쌤
저도 참 비염으로 힘들었었는데요. 어느새 나이가 들고 나서 좀 많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비염 치료기가 생각보다 꽤 도움이 되었던 거 같아요. 혹시나 이 기계를 써보시지 않았다면 한 번쯤 써보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제가 썼던 건 코에픽 비염치료기 입니다. 같은 비염인으로서 많은 공감이 되었던 뉴스레터였습니다.
주간벤자민
괜찮아지셨다니 다행이네요!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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