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으로 음악하기
지난 글에서 들뢰즈는 표상적 사유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했는데요. 심지어는 들뢰즈 본인이 자신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소개하기도 합니다.
음악을 가지고 철학을 한다라고 말을 했다고 가정하면 들뢰즈가 음악활동을 했구나 하며 상상할수 있습니다. "들뢰즈가 음악을 배우고 음악에 뛰어들어, 그들과 깊이 소통하며 깊이있는 의미를 추구하여 세상을 음악으로 드러내고 표현했구나." 생각하며 음악을 가지고 철학한다고 말할 수 있을겁니다.
하지만 들뢰즈는 본인을 철학을 가지고 음악을 한다고 말했으니, 음악 자체를 실천하고 이행한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철학적 모듈들이 어떤 리듬에 맞추어 서로 불협화음을 만들어내어 긴장시킨다던가, 화성을 이루며 조화롭게 연결되어, 모듈 자체만으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의미를 창조해나가는 과정을 음악이라고 칭했던게 아닐까요.
들뢰즈가 얘기하는 음악하는것에 대한 힌트가 책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철학에서는 당연히 음과 소리들을 교차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음악의 가장 중요한 요소(리듬, 선율, 화성)를 채우지 못한채로 음악을 이야기 해야만 합니다. 리듬은 소리가 없어도 존재합니다. 소리없이도 우리는 춤에서 충분히 리듬을 발견할 수 있지요. 리듬은 글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나 시조같은 운율이 살아있는 글들을 보면, 생각이 머무는 곳과 쉬어가는 곳이 잘 구분되어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이와같이 리듬은 움직이고 멈추는 것, 실행과 결부되어있으며, 들뢰즈의 철학으로 음악하기의 첫번째 스텝은 리듬과 같은 어떤 움직임을 포착하는 것에 있다고 볼 수 있는것이죠.
표상적 사유의 외부
이전 시리즈에서 설명했던 표상개념을 다시 가져왔습니다.
지난 시리즈에서 표상적으로 생각하기와 고정관념이 연결되어있다고 말했는데요. 인간은 표상적 사유의 자기고정성에서 애초에 벗어날 수 없는 존재였던걸까요? 들뢰즈는 그렇지 않다고 보고있습니다. 오히려 음악활동이 이런 표상적 사유의 외부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전혀 새로운 음악을 처음 들을 때, 느낌에 집중해야 음악을 온전히 듣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느낌에 집중하지 않고 내가 알고있는 음악을 끊임없이 검색하고 듣는과정에서 재현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음악에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그 음악이 전하고자 하는 느낌을 공유받지 못하게 됩니다.
표상적 사유의 원천은 인간의 학습능력에 있습니다. 인간은 새로운 정보로부터 늘 무언가를 학습해내고 이후 과거에 학습한 정보를 다시 마주쳤을 때 자신이 사유했던 기억을 끄집어내어 더 진보된 사고를 가능케 합니다. 그렇게 '보고-해석(표상)하고-더 깊게 생각하기'의 방식으로 더 고차원적인 사유를 가능하게 해주는 힘을 표상적 사유가 제공해주는것이죠. 이 때문에 표상적 사유는 우리의 정체성과도 깊게 연관되어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보는것만 보는 경향이 점점 강해지고, 새로운 것을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상태가 되는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지만, 표상적 사유는 학습이후에만 사용이 되어집니다. 아기들을 생각해봅시다. 학습된 관념이 부재한데, 재현할 리소스가 없는데, 표상적 사유가 어떻게 동작할까요? 심지어 아기들은 생각하기에 머물 언어조차 습득되어있지 않습니다. 아기들은 '보고-느끼고-실천하기'의 방식으로 느낌의 차원에서 학습을 강화합니다.
이는 무언가를 배우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생각하기 단계보다 실천하기가 앞서기 때문에 고차원적 사유의 힘을 이끌어낼 수는 없겠지만, 실천적 시냅스와 느낌을 빠르게 연결해가며 자신의 정체성을 바꿔나갈 수 있죠. 정체성이 생각하기에 머물고 있다면 '느끼고-실천하기'는 생각하기 이전에 작동하기 때문에, 오히려 본인도 모르게 어느새 피망을 먹고있는 자신을 발견하며 정체성이 확장되어감을 느끼게 됩니다.
느낌은 신체의 반응과 신경망에 도달한 호르몬들을 두뇌가 해석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죠. 당장 먹고싶은 음식을 생각하기만 해도 호르몬과 느낌은 변하기도 합니다만, 생각만으로는 우리 감정이 자신을 알아차리게 하는 신체상태의 변화를 이끌어내기는 힘듭니다. (물론 티벳 고승들의 경우 생각하기(명상)만으로도 신체온도를 조절하거나 호르몬을 변화시켜 기쁨에 이르게 하는 사건이 있기도 합니다만,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없죠.)
최근 애덤 그랜트가 발간한 책 《히든포텐셜》에서도 학습은 불편함을 마주하고 극복하는 과정과 깊게 연관되어있다고 말하는것도 같은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근원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며, '보고-느끼고-실천하기'의 사이클을 무한히 돌려낼 수 있을 때 나 자신의 정체성이 발동하지 않는 유연한 상태에 빠져있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긍정적 느낌보다 부정적 느낌에 훨씬 민감하죠. '부정적 느낌 - 불편함'을 동기로 전환 시킬수 있다면 긍정적 피드백을 쫒아가는 것보다 몇 배 이상의 실천력과 학습속도를 보여줄겁니다. 불편함에 회피하거나 경직되는 방식이 아닌, 맞서는 방식을 통해서 말이죠.
관련하여 두려움과 초월에 관한 포스팅은 여기를 확인해 보실 수 있습니다.
다시 리듬을 타는것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리듬을 타는 것
앞서 언급 됐던 리듬에 의해 어떤 움직임을 포착하는 것, '보고 - 느끼고 - 실천하기' 모두 표상적 사유 이전에 발생하는 '사유의 감각 - 느낌'에 포인트가 있다는 것을 찾으실 수 있을겁니다. 때로는 우리는 복합적인 느낌(느낌은 복잡계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결코 단 하나의 스위치가 아닙니다.)에 대해서도 일관적인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 감각-느낌을 변용, 변화하여 적용시켜낼 수 있을 때, 이전에 못먹던 파, 마늘, 피망을 먹을 수 있듯이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됩니다. 철학이 삶의 방식을 말하는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사유의 감각을 변용시켜 이전에 없던 새로운 철학을 생성시켜낼 수 있게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 많은 차이-리듬을 수용하여 이해할 수 없던것에 대해 이해하고 실천하고 나아가 사유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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