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서 피어난 생각
리처드 파인만은 20세기의 위대한 천재과학자로 매우 유명합니다. 또 그는 메모하는것이 곧 생각하는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파인만보다 10살가량 어렸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니클라스 루만은 메모광으로 유명했고 그의 특이한 메모법(제텔카스텐)은 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논리적 반증
루만이 말을 명제의 형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글을 쓰지 않으면 생각할 수 없다'
그럼 이 명제의 진리값이 동등한 대우명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생각하는 것은 글을 쓰는 것이다'
만약 생각하는것이 글을 씀으로 인해서 나타난것이 명백하다면 발생적 관점에서 우리는 글을 배우기 전까지 생각하기라는 활동이 불가능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글을 배우게 되는 어느 시점에 생각 스위치가 켜짐 버튼이 눌려야 한다고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모든 변화에는 연속적인 성질이 있습니다. 우리 삶은 게임처럼 레벨업하는 그 찰나의 순간에 모든 스태이터스가 짠 하고 변경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헬스장에서 근력운동을 할 때에도 오히려 근육을 파괴시키고 이후 파괴된 근육이 세포단위에서 수복되는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증가하게 됩니다.
그렇게 볼 때 글을 배우는 시점에서 생각이 알을 깨고 나오듯 튀어나올 수 없습니다.
언어와 기호
분석철학의 대가인 비트겐슈타인도 언어에 대해 삶의 양식을 표현하기 위함이라며 다양한 표현을 옹호하기도 했습니다.
들뢰즈는 기호에 대해 사유를 강제하는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글은 잘 구성된 기호체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기호가 글인것은 아닙니다.
기호의 범주에는 수신호도 포함되며 모든 제스쳐도 포함이 됩니다. 동물들은 제스쳐의 기호를 활용해 서로 위험을 알리거나 소통하는것은 익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글은 인간의 전유물이지만 제스쳐는 인간만의 전유물이라고 보기는 힘들며, 제스쳐 만으로도 충분히 사고는 촉발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현 시대의 교통신호체계는 작동이 불가능하겠죠.
태초의 기호를 만든 사람을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기록의 역사 중 가장 오래된것을 찾아낸다면 역시 동굴벽화를 예로 들 수 있을겁니다. 그 당시를 상상해본다면 마을을 벗어나 사슴 사냥을 성공했을 때, 사슴과 무기를 동굴에 그리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후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해당 그림을 가리키는것만으로도 사냥을 나가자는 글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해 낼 수 있습니다.
동굴의 벽화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한것처럼 삶의 양식을 그려낸 것이지만, 식량이 떨어져나가는 상황에 어느곳으로 무엇을 사냥하러가자는 기호로 작용하기도 할 것입니다.
이때 이 동굴벽화는 그리는 A와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B, 가리키는 손가락 끝의 동굴벽화를 보는 C으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A는 그저 승리의 도취감인지는 몰라도 어떤 기분에 그림을 그리는 예술적 기호를 창조해냈으며, B는 손가락으로 해당 그림을 가리킴으로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고, B가 무얼 의도하고 있는지 생각하고 이해하는 C가 있습니다.
여기서 B에게 그림은 자신의 배고픔과 합쳐져 사냥을 나가야한다는 생각을 표현할 수 있게 했고, B의 손가락 제스쳐와 그림이 결합되어 사냥나가자는 B의 의도를 C는 생각해낼 수 있습니다.
이때 기호는 표현의 수단이면서 사유를 촉발하는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태초의 그림은 삶의 양식을 표현하는데 있지 않을까요?
쓰기와 생각하기의 상호작용
앞서 말씀드린 동굴벽화의 그리는자 A와 가리키는자 B와 해석하는자 C를 모두 한 사람으로 합치면, 우리가 글-기호를 씀으로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글을 씀으로서 지금 내가 가진 생각을 표현(A)할 수 있습니다. 표현된 바를 재해석(B)하여 이전에 하지 않은 다른 생각을 이끌어 낼 가능성을 열고, 사유할(C)수 있습니다. 또한 사유한 바를 다시 표현(A)하며, 재해석(B)하고, 사유(C)하는 활동을 재해석이 불가능한 시점까지 구조화 체계화하며 이어나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학문제를 풀이할 때 수식을 이용한 풀이를 작성하지 않고서는 그 논리를 정교하게 이어나가기 매우 힘들게 됩니다. 사람의 단기기억 용량은 결코 크지 않아서 그 이상의 정보를 처리하려고 하면 정보가 조금씩 소실되기도 합니다.
수학 문제 풀이에서 발생하는 실수는 장기기억의 오류이거나 학습된 오개념의 유무일수도 있지만, 상당수는 단기기억용량의 사용법을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수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1. '문제의 인지 - 이해 - 목표설정 - ( 가정 - 조건변환 - 논리전개 )cycle - 결론도출 - 검증' 에 걸친 모든 사고활동을 체계적으로 적어냄으로써, 2. 가용가능한 단기기억을 비워내고 판단의 재료들(주어진것들과 필기한 것들) 사이를 스위칭해가며 가능성의 방향성을 결정하고 접속어로 표현 필기하며, 3. 해당 방향의 논리를 적어가며 전개하여, 4. 모든 가능성을 검토한 후 구조적으로 완전함을 검증하여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쓰기의 자유론
이처럼 글쓰기는 나를 표현하며, 재해석하고, 사유하여 개선해나가는 사이클을 가능한 만큼 반복하는 과정입니다. 그 말은 곧, 글을 작성함으로서 이 수동적-운명적 사유의 작동을 능동적-필연적 사유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것과 같이 사유를 촉발하는것은 글만이 아닙니다. 기호입니다. 글은 배치된 기호로서 그 자리에서 늘 머물러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애써 가까이 하지 않는 이상 나에게 절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글만이 기호가 아닙니다. 우리 삶에 강력한 영향을 주는 기호생성기는 바로 타자입니다. 인간관계는 우리가 만나는 첫번째 기호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관계의 배치를 변경함으로서 또 그들과 의견을 나누고 사유할 수 있으며, 또 운명을 달리 할 수 있기도 합니다. 인간관계는 가치를 나누고 전파하며 영향을 받고 영향을 주며 끊임없이 변해갈 수 있는 '차이'를 감각케 하는 근원이기도 합니다. 인간관계는 아주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호의 배치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호를 만들어내는 것은 인간관계 뿐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충분히 잘 들어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세계-지구-자연은 지금도 끊임없이 자연현상을 기호로서 보여주며 알리고 위험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세상은 소통은 기호위에서 이루어지는게 아닐까요.
기호의 쓰기는 글쓰기 너머 관계를 재배치하는 모든 과정들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는 글을 쓰기도 하지만, 사람을 그리고 자연을 쓰기도 합니다. 써내어 기호를 변경하거나 배치를 달리함으로서 전혀 다른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냅니다. 그런면에서 쓰기는 우리의 생각과 운명을 형성하는 본질적 활동입니다. 쓰기를 통해 우리는 자유롭게 생각을 표현하고, 사유를 발전시키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 꿈을 공유하며, 새로운 서비스와 가치를 만들고 제품을 만들고,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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