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매치기야!” 잠을 설친 것도 아니었다. 나름 깊은 수면에 빠져있었다. 남쪽의 겨울과 비할 수 없는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더욱 이불 속을 찾아들게 하던 그런 날이었다. 이중창문을 꼭꼭 닫고 커튼까지 꼼꼼하게 쳐두었지만, 고막을 찢는 듯한 비명을 막아주지 못했다.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던 남편을 나는 만류했다. 소매치기범에게 소지품을 빼앗긴 젊은 여성의 고함은 그 뒤로도 한동안 이어졌다. 나는 두려웠다. 우리 집 바로 앞에서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나에게도 언제고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확대 해석으로 발전했다.
그즈음 나는 여러모로 상처를 받은 상태였다. 처음의 낯섦과 초라함을 극복하고 우리 둘만의 보금자리가 있다는 사실에 행복을 느끼고 있던 차, 그 행복이 단단해지기도 전에 공격을 받았다. ‘천당 밑에 분당’이라고 불리는 동네에 인접해 있었던 탓이었을까. 우리가 다니고 있는 교회는 천당 밑에 분당에 위치해 있었고, 우리의 거주지는 그곳이 아닌 그곳에 인접한 변두리 동네에 있었다. 신혼부부가 새롭게 등록했으니 반가워하는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래서 따뜻하게 맞이하고 관심 가져 주는 것이 고마웠다. 그러나 심방이랍시고 우리 신혼집을 찾은 이들의 표정과 말에서 나는 그만 상처를 받고 말았다. “물질의 복을 주시라고 함께 기도할게요.” “어서 이런 동네에서 벗어나야죠.”...
나름 애정을 가지고서 한 말일 거라고 이해를 해보려 했다. 애정이 없었다면 애초에 그런 조언을 하지도 않았을 거라고 생각은 했다. 그런데도 그날 이후로 내가 적응하기 위해 애쓰던 우리 동네가 점점 싫어지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경사가 가파른 언덕에 주택들이 즐비해 있는 동네였다. 눈이라도 오는 날에는 데굴데굴 구르지 않기 위해 거의 기다시피 그 언덕을 내려와야 지하철역에 당도할 수 있었다. 지하철역 근처는 넓게 펼쳐진 유흥가였다. 밤에는 온통 비틀거리는 사람들투성이였고, 새벽에는 길 여기저기가 토사물로 장식되곤 했다.
참 사람의 마음은 이상하다. 무언가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랑해야지’라고 마음을 먹으면 그것이 좋아진다. 그 무엇이 정말로 좋게 바뀌지 않았음에도 그러하다. 그러나 아무리 의미를 부여하고 좋아졌다가도 누군가 그것에 대한 부정적 해석을 해버리면 금세 그것이 또 싫어진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닐 테다. 일명 멘탈이 강한 말뚝귀들은 주변에서 어떤 좋지 않은 평을 해대도 자신의 긍정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나처럼 주변 사람들의 말에 강한 영향을 받는 팔랑귀들은 단번에 긍정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부정의 마음에 사로잡히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와중에 소매치기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싫은 동네가 더욱 싫어지는 순간이었다. 애정 어린 누군가의 조언처럼 어서 이 동네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만이 가득한 밤이었다. 그렇게 ‘이놈의 동네,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며 이를 갈던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다.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며 나는 부지런히 골목 안팎을 살폈다. 어젯밤 범죄의 현장이었던 집 앞을 더욱 유심히 보았다. 긴장된 마음으로 두 눈 부릅뜨고 살핀 골목 안은 찬란한 햇살만이 그저 눈 부시고 있었다. 다녀오겠다며 손을 흔드는 남편의 얼굴도 해맑을 뿐이었다.
골목 안 어느 집에서 교복을 입은 학생 두어 명이 나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책가방을 메고 학교로 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느 집에서는 밥 먹으라고 아이들을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른 아침이었는데도 어느 집 아이의 피아노 뚱땅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간밤에 어떤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골목은 평소와 다름없이 생기가 돌고 있었다.
이웃들은 어젯밤의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방범이 허술하고, 취객이 즐비한 이 동네가 그들은 어떻게 느껴질까? 나처럼 지긋지긋하니 어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까? 골목에서 그리고 골목 밖 슈퍼에서 만난 사람들의 표정은 전혀 그런 성격의 것들이 아니었다. 그저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 서로 웃으며 인사를 건네기도 하고, 안부를 묻는 사람들. 비록 가진 것이 비교적 적어서 누군가에게는 안쓰러워 보일지 모를 사람들이지만, 아침에 내가 만난 사람들은 그저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일 뿐이었다.
그날 밤. 같은 시각. 어쩐지 나는 잠을 통 이루지 못했다. 그 덕분에 골목에서 들리는 자그마한 대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제가 어제 여기에서 소매치기를 당한 거예요.” 젊은 여성의 말소리였다. “아, 네. 정말 많이 놀라셨겠어요. 당분간 저희가 집까지 안전히 모셔다드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깜짝 놀랐다. 여성을 안전하게 데려다주는 남성이 있었다. 누굴까? 얼른 이부자리에서 나와 창밖을 내다보았다. 2층에서 내려다보니 제복을 입은 남성 두 분이 여성 한 분을 사이에 두고 저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방범이 허술하다고 불평했던 이 동네에 저렇게 시민의 안전을 위해 밤늦게까지 수고해 주시는 경찰이 있다는 사실이 참 안심이 되었다.
그 뒤로도 나의 동네 적응기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좋았다가 싫었다가를 반복했다. 마치 지금 나의 하루하루가 좋았다가 싫었다가를 반복하듯이. 가끔 그때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때가 있다. 초등학생인 딸아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떠 보인다. ‘엄마, 너무 무서웠겠다.’ 중학생 아들은 그때 아빠가 그 여성을 도왔는지에 대한 여부를 묻는다. ‘나라면 당장 뛰어나가서 소매치기범을 잡았을 거야.’라는 근거 없는 영웅심을 드러낸다. 고등학생인 큰아들은 ‘경찰이 피곤했겠네.’ 공직에 대한 제 생각을 한바탕 쏟아 놓는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제각각 반응이 다른 아이들을 보며 나는 미소를 짓곤 한다. 어떤 일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그 일이 갖는 의미는 참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경찰 아저씨가 참 잘생겼었어.” 마무리를 그렇게 지으려 했더니 남편이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었다. “뒷모습밖에 못 봤으면서 잘생겼는지 못생겼는지를 어떻게 알아?” 듬직한 뒷모습이 잘생긴 거라고 설명했지만 동의를 얻지는 못했다. 그저 다르게 파생된 주제로 가족들의 시끌벅적한 대화가 이어졌다. 시끄럽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도 내 머릿속에서는 그때의 일이 한동안 맴을 돌았다.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지만 여전히 생기가 돌았던 골목. 놀랐고 외로웠을 여성의 귀갓길에 동행해주었던 경찰 아저씨. 누군가 나에게 그 동네에 대해 어떻게 기억하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누군가는 어서 벗어나야 할 동네로 보았던 그곳이 나에게는 그저 잊지 못할 추억의 동네일 뿐이라고. 사랑하는 이와 드디어 헤어지지 않아도 되는 신혼집이 있던 곳. 지대가 경사지고 가팔라서 다리가 굵어졌을지언정 언덕 위에 있던 학교를 오가던 여고생 때를 추억할 수 있던 곳. 집과 집 사이의 거리가 촘촘해서 절대 외롭지 않았던 곳. 무엇보다도 선물같이 큰아이가 우리에게 찾아왔던 곳... 이렇게 유의미한 추억들로 가득한 동네일 뿐이라고.
[저자소개]
글로 소통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글을 쓸 때 가장 신나기 때문에 ‘쓰니신나’라는 닉네임으로 ‘쓰고 뱉다’(글쓰기 공동체)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의미 있는 글을 쓰는 것과 더불어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좋은 글은 좋은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믿음이 있기에,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7년 연애 후 결혼에 골인한 뒤 20년차 주부로 살고 있으며, 초, 중, 고 세 아이를 양육하고 있습니다.
한때 ‘완전한 엄마가 되기’를 소망했지만, 지금은 ‘안전한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교회 주일 학교에서 4세 이하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황금머릿결’이라는 필명으로 7권의 웹소설 전자책을 출간한 이력이 있습니다. 모든 일상이 글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상을 관심 있게 들여다보며, 보석처럼 반짝이는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메모를 즐깁니다.
[쓰고뱉다]
글쓰기 모임 <쓰고뱉다>는 함께 모여 쓰는, 같이의 가치를 추구하는 글쓰기 공동체입니다. 개인의 존재를 가장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닉네임을 정하고, 거기서 나오는 존재의 언어로 소통하는 글쓰기를 하다 보면 누구나 글쓰기를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걸어왔고, 걸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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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7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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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티제
같은 상황이라도 제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다른 반응이 나올 때가 정말 많은 것 같아요.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생각들도요.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월요일을 시작하며 읽기 좋은 글, 기운이 나는 글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쓰니신나
글의 취지를 잘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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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오늘
이 글을 읽고 있으니 마치 동네 골목 마다 저녁시간 “@@야~ 밥먹어라” 하고 부르던 옛날 추억에 잠기게 되네요 :) 따듯한 추억의 속으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쓰니신나
따스한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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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뱉다와 함께 하는 오늘의 글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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