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말, 직장에서 삐걱대기 시작했다. 업무상 문제라기보다는 그간 모른 척 쌓아둔 마음의 문제에 발동이 걸린 것이다. 연차가 쌓이면서 사람들의 기대치는 높아지는데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생겨났고, 이는 곧 업무를 할 때나 사람을 만날 때 두려움이 앞서게 했다. 마음의 문제는 몸으로 나타나는 법이라 그때 참 자주 아팠다. 몸도 마음도.
더는 버티기 힘들어 퇴사를 결심했는데 회사 측의 배려로 장기 휴직을 할 수 있었다. 쉬면서 여행도 가고 운동도 하며 마음을 돌봐야지 했는데 이런, 코로나19가 닥쳐왔다. 한껏 기대하며 계획했던 일들이 물거품이 되면서 심연을 알 수 없는 깊은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그때, 가장 먼저 잃어버린 감정은 경탄이었다. 원래는 하늘을 보면서, 바람을 맞으면서, 강아지를 구경하며 참 잘 감동하던 마음이 있었는데 이제는 누구를 만나도 무엇을 먹어도 어디를 가도 시시하게만 느껴졌다. 쉬어도 피곤하고 결심해도 그때뿐, 누가 봐도 표정과 태도에 진한 무기력이 묻어 나왔다.
한참을 그렇게 지내다 무기력에서의 탈출은 의외로 아주 사소한 데서 시작되었다. 무심코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시’를 한편 만났는데 제목만 보고도 긴장된 마음이 툭 풀어지면서 빙그레 웃음이 지어졌다.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_김용택>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 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시를 몇 번이고 읽었던 것 같다. 화자의 몽글몽글한 마음에 금세 전염되었다. 아무 일도 없는 그저 그런 하루로 마무리하나 싶었는데 누군가 고운 달빛을 보고 나를 생각해 주다니.. 그 마음 덕에 환한 달도 다시 보이고, 흐르는 물도 다시 들린다. 그 한 사람 덕에 잊지 못할 멋진 하루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나를 이렇게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이 있었다. 엄마였다. 사실 엄마는 살가운 성격이 아니었다. 사랑한다는 말 한번 주고받은 적 없었으니. 어렸을 때는 그런 엄마에게 섭섭하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무덤덤해졌던 것 같다. 직장생활로 힘들 때도 엄마에게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때, 생기를 잃은 나에게 엄마는 그저 매끼를 정성껏 차려주셨다. 왜 그런지 궁금한 것도 있었을 테고, 또는 다 큰 애가 왜 그러고 있냐고 속상한 한숨 한번 내쉴만한데도 그러지 않으셨다. 그러다 어느 날, 어떤 대화 끝에 무심코 툭 ‘엄마는 미안한게 참 많다. 앞으로 남은 삶은 너를 위해 살 거야’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 마음을 알게 되자 갑자기 내 마음이 살아났다.
아! 결국 삶에 대한 경탄이라는 감정은 누군가에게 소중히 여김 받음으로 마음에 충분한 힘이 있을 때 툭 하고 터지는 듯하다. 흔히들 나이가 들면 감탄할 일도 없어진다고 하는데 사실은 마음의 힘이 약해져 버린 것은 아닐까.
나이가 들어서도 경탄할 수 있는 것은 생에 윤기를 가져다 준다. 어린 이와 늙은 이를 구분하는 것이 감탄사의 빈도라 했던가. 조금 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와 너를 향해 경탄할 수 있다면 남은 삶은 여전히 기대되는 선물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소중히 여기며 그 마음을 표현하면 좋겠다. 고운 달이 떴을 때 요즘 핸드폰이 참 좋으니 사진을 찍어 보내며 네가 생각났다 말해보면 어떨까. 흐르는 물소리와 바람을 한참 녹음해서 잠자기 전 들으라고 선물로 보내는 것도 좋겠다. 작은 노력이고 표현이지만 우리의 마음이 금세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귀여운 할머니(할아버지)는 나이가 들수록 더 경탄한다. 그만한 세월만큼 인연의 소중함을, 사람의 귀함을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저자소개]
평생동안 귀여운 것을 수집하며 살았다. 그러다보니 좁은 집이 귀여운 잡동사니들로 가득해졌다. 더 이상 귀여운 것들을 들일 곳이 없자 스스로 귀여운 사람이 되고자 한다. 말랑한 마음가짐과 둥글한 삶의 태도면 충분할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귀여운 것이 세상을 구한다는 진리를 믿는 중이다.
부산에서 나고 자랐다. 매일 글을 쓰고 마음을 뱉으며 한뼘씩 자라는 중이다. 언젠가 작은 그늘이라도 생긴다면, 지친 누군가에게 한자리 내어주고 싶다.
[쓰고뱉다]
글쓰기 모임 <쓰고뱉다>는 함께 모여 쓰는, 같이의 가치를 추구하는 글쓰기입니다. 개인의 존재를 가장 잘 표현해줄 수 있는 닉네임을 정하고, 거기서 나오는 존재의 언어로 소통하는 글쓰기를 하다보면 누구나 글쓰기를 잘 할수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걸어왔고, 걸어가고 있습니다. 뉴스레터로 발송되는 글은 <쓰고뱉다> 숙성반 분들의 글입니다. 오늘 읽으신 글 한잔이 마음의 온도를 1도 정도 높여주는데 도움이 되셨다면 아래‘댓글보러가기’를 통해 본문 링크에 접속하여 ‘커피 보내기’기능으로 구독료를 지불해주신다면 더욱더 좋은 뉴스레터를 만드는데 활용하겠습니다.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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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니신나
글과 사진과 노래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멋진 글! 경탄하고 갑니다^♡^
쓰고뱉다와 함께 하는 오늘의 글 한잔
글과 사진, 노래 모두 좋아해주셔서 감사해요^^ 쓰니신나님의 따뜻한 댓글에 경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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