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직장을 퇴사한지 4년 만에 재입사 했다. 홍보 일은 고됐지만 고된 만큼 보람도 많이 느끼며 한창 일에 자신감이 붙었던 대리 말~과장 초 무렵. 다시 같이 일해 보면 어떻겠냐는 전 직장의 연락은 마치 그 동안 해온 내 일, 내 퍼포먼스에 대한 인정처럼 들렸다. 퇴사한 회사 재입사하면 똑같은 문제로 또 다시 퇴사할 거라는 주변 만류에도 내 마음은 점점 재입사 쪽으로 기울었다. 도망치고 나온 곳에서 다시 제대로 일해보고 싶은 마음, “봐요, 제가 신입 때 자리 박차고 나갔어도 회사 밖에서 참 잘 컸죠?” 인정받고 싶은 마음, 무엇이든 잘 해내서 돋보이고 싶은 마음이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가득 차 재입사를 결정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더 이상 나는 천진난만한 신입사원이 아니었다. 실수해도 귀엽게 봐줄 연차가 아니니 긍정적 피드백을 받을 일은 적었다. 경력직에게 기대하는 퍼포먼스가 있었겠으나 온라인 홍보를 해본 적 없던 그때 난 생초짜나 다름없었다. 다만 몰라도 모르는 체 있을 수 없어 바둥거렸다. 입사하자마자 매일 8시간 이상 회의를 거듭하며 썼던 코스메틱 홍보 제안서는 비딩 PT에서 붙고도 기쁘지 않았는데 준비기간이 지옥 같았기 때문이다. 서로가 너무나 익숙하게 주고받던 뷰티 세계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어 나홀로 헤맸던 시간들. 나는 일 잘하는 후배들에게 기대 연명하듯 제안서를 썼고 숨고 싶은 마음을 들키지 않는데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다.
제안서 쓰는 기간에 내 밑천 없음은 공개됐을 것이다. 위에서는 내게 코스메틱 홍보를 맡겨도 될지 심각하게 고민했을지 모른다. 그런 조짐은 미어캣처럼 눈치 보는 내가 가장 먼저, 어느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느꼈다. 팀 구성 하던 날, 국장님 자리에서 짜증 가득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던 것. “얘가 이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때 ‘얘’는 내가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나는 나일 것이라고 너무나도 확신했기에 더욱 주눅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왜 내가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게 당연한지 물었어야 했고, 내가 아닐 수도 있으니 주눅들 필요 없다고, 당당해도 된다고 했겠지만 그때 나는 그럴 배짱이 없었다.
물론 그 후 국장님과 술자리를 가질 때마다 국장님은 “지금 너무 잘하고 있다”, “후배들이 참 좋아하더라”라고 격려해줬지만 나는 그 말을 백프로 믿진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팀 세팅 때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윽박지르던 얘는 누구였는지 묻지 못했고, ‘잘하고 싶은데 정말 잘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안 보인다’고 속 시원히 넋두리 한번 하지 못했다. 어느 상사에게 의지할 수 있을지 비빌 언덕을 찾지 못한 채 무한야근의 늪에 빠져 숨죽이고 허우적거리다가 내가 택한 건 ‘등산’이었다. 제대로 숨 쉬고 싶어서, 마음 편히 숨어들고 싶어서 산에 올랐다. 연초 내가 세운 계획은 오로지 단 하나, 계속 산타는 것뿐이었다.
회사가 있는 을지로에서 가능한 먼 곳으로 가고 싶다는 아주 단순한 생각으로 등산 동호회 글을 살펴보다가 전남 영암 월출산행을 겁도 없이 덜컥 신청했다. 밤 버스를 타고 4-5시간을 달려 칠흑 같은 어둠만이 가득한 등산로 초입에 도착했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데 이미 산행이 시작됐다. 한발 한발 내딛기 위해서는 발밑뿐만 아니라 앞 사람의 발걸음을 잘 살펴야 했다. 너무 성큼 내디뎌 앞사람 발을 밟으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들리는 건 탁탁 탁탁 산행길 돌들을 딛기 위해 등산 스틱을 내려치는 소리뿐.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 밤의 고요는 군더더기 없이 투명하고 잔잔했다. 억지로 말하지 않아도 되는 고요 속에서 나는 폭풍 같은 회사생활을 깨끗하게 잊을 수 있었고, 혼자이면서 또한 함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느꼈던 것 같다.
헤드랜턴을 비춰주면서 서로의 발밑 안전을 책임지는 조용한 일출 산행이 좋아져, 내 등 뒤를 지키며 느릿느릿 함께 걸어주는 사람들이 좋아져서 산 타는 날은 점점 많아졌다. 관악산, 북한산, 청계산, 도봉산 등 서울 근교 산에 발자국을 남기다가 점점 아래로, 더 멀리, 더 오랫동안 산 속으로 떠났다. 1박 2일, 1박 3일 산행에 대피소 산행과 종주까지 다니다가 급기야 퇴근하고 등산가기 위해 커다란 배낭을 메고 출근했을 때 회사 사람들은 산에 미쳤냐고 놀렸다. 힘들기만 하고, 올라갔다가 어차피 내려와야 할 산이 대체 왜 좋은 거냐는 당시 물음에 속 시원히 대답하진 못했다. 산에 가야 이 회사를 더 다닐 수 있어요, 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그냥 중독인 것 같다고 웃으며 전국의 산들을 찾아 발도장을 찍었다.
매주 등산 배낭을 메고 떠나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던 당시에는 정말 뭐가 좋은지도 모른 채 그냥 탔던 것 같다. 산에서 만나는 계절의 변화에 취해, 길을 걷다 은은하게 불어오는 꽃내음, 풀내음에 취해, 그리고 변화를 함께 즐길 줄 아는 사람들에 취해서. 무엇보다 하산 후 즐기는 막걸리와 소맥에 취해 신나게 다녔다. 산이 좋은 진짜 이유를 알게 된 건 오히려 코로나를 이유로, 결혼과 임신, 출산을 이유로 자유롭게 등산을 가지 못하게 되고 나서다. 그렇게 내가 깨달은 바는 이런 것들이다.
산은 내 발밑의 가장 정직한 성취감을 줬다. 내가 내디딘 만큼 나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고, 내가 아닌 어느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매번 최상의 컨디션이 아니었기에 오를 수 없을 것 같고 숨이 턱까지 차올라 그만하고 주저앉아 쉬고 싶을 때도 많았다. 짜증날 만큼 가파른 흙길과 바위길을 오르면서 욕 나오는 때도 더러 있었다. 그때 조금만 더 걸어보자고, 10분만 더 가보자고, 정상이니 완등이니 먼 미래의 단어 같은 건 생각하지 말고 그냥 지금 일단 조금만 해보자며 등에 멘 짐을 나눠 함께 걷는 사람들 덕분에 진정 당도할 수 있었던 건 바로 눈앞의 현실에 집중하는 법이었다. 느리지만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끝끝내 이뤄지는 과정 자체의 쾌감이 나를 늘 산으로 이끌었다.
반복된 야근으로 등산할 체력이 남아 있지 않던 때도 있었다. 지리산 성중종주(성삼재~벽소령~천왕봉~중산리 코스로 총 34km에 달한다)를 해낼 수 있을지 불안해하면서도 가지 않으면 평일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떠났던 때, 그 산행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치만 산은 늘 그 자리에 있기에 끝까지 산을 만나지 못했어도 다음에 또 만날 기회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 한 번의 실패가 끝까지 실패로 남는 건 아니라는 것을 너그럽게 무한한 기회를 내어주는 산에게서 배웠다. 산이 있어 나는 일터에서 내 스스로에게도 충분한 기회를 주고 싶다는 마음을 품을 수 있었다. 내가 나를 기다려주는 법을, 느리게 나아가는 법을 알았다.
산이 내 유일한 선배이자 탈출구였다. 일상이 산으로 점점 물들어갈수록 내 마음에 여유가 들어찼고 스스로 만족스러워질 수 있었다. 이해관계로 얽혀 있지 않은 사람들과의 솔직하고 자유로운 만남과 대화를 통해 나는 조각난 자존감을 회복해갔다. 회사 동료들과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똑똑하고 재치 있고 일 처리까지 빠른 센스 있는 일잘러 후배들이 일에 관한 질문을 해올 때, 어떤 답을 줘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아 동공지진이 일어나며 머뭇거릴 때도 종종 있었지만 그런 나조차 그럴 수 있다고 다독이는 법도 터득해갔다.
산을 찾지 않았더라면 나는 스스로 응원하고 지지하는 방법을 알 길이 있었을까? 다른 무언가로 일상을 견디고 천천히 나아가는 법을 찾을 수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등산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상상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이 글을 읽고 있을 독자 중에도 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순간이 온다면 산에 올라보기를 권하고 싶다. 한두 번 만에 빠르게 변화를 보여주진 않지만 오래 걸을수록 충만해지는 마음과 단단해지는 나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자연이 베풀어주는 무한하고도 무해한 아름다움으로 뭉클해지는 마음을, 물들어가는 마음을 발견할 수도 있을 테고,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긴 산행 끝에 찾아오는 미식의 즐거움도 누릴 수 있을 것이니.
<일하는 마음>을 쓴 제현주 작가도 이런 마음이 일상을 얼마나 ‘충분히’ 즐겁고 단단하게 만드는지 잘 알고 있었던 듯 하다. 그는 그의 저서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제현주 작가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 계속 산탈 때, 나 또한 좀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같다. 너그러운 산의 품에 안겨 넉넉한 마음이 들 때의 나를 나는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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