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하는 유부

30. 가장 사랑하는 쓸모 없는 일

다들 숨구멍 하나씩은 품고 살아요.

2023.11.24 | 조회 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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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여성

세 여자가 전하는 '일'에 관한 모든 이야기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하루만에 기온이 뚝 떨어진 오늘 아침, 무사히 시작하셨나요? 부유하는 유부입니다. 지난주 곰자자족님이 언급한 제현주 작가님의 문장은 (“세상 쓸모 없(어도 되)는 이 일 때문에 나에게 부과되는 모든 쓸모(있어야 하)는 일들의 무게가 별것 아니게 느껴지는 순간. 내 일상 속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순간이다.”) 제게도 좋아하는 것을 더 용기 내 좋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이야기였는데요. 그래서 오늘은 곰자자족님의 바톤?을 이어받아 제 지난한 직장 생활을 견디게 해준, 지금도 애정하는 것에 대해 전하고자 합니다.

얼마 전 캐드 수업에서 강사는 뜬금없이 말했다. “꽃집은 어떻게 먹고 사는지 모르겠어요.” 무심코 던진 발언에 난 뜨악했고, 대답하고 싶었다.(소심해서 대답은 하지 못했다.) ‘꽃집은 나 같은 사람 덕분에 먹고 삽니다사진첩에 인물 사진 보다 꽃 사진이 많은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나예요.'

꽃에 빠져들게 된 건 우연히 들른 양재 꽃시장에서였다. 일요일이라 문 연 가게가 별로 없던 화훼상가에서 한 주인분이 추천해주신 꽃과 작은 화병을 이만원에 사왔다. ‘이렇게 꽃을 살 수 있구나하는 신기함과 그저 보기만 해도 예쁜 꽃, 이만원이 가져다준 만족감은 꽤나 오래갔다. 두 달 뒤 난 4회짜리 취미반 꽃수업을 신청하고 있었고, 2017년 당시부터 올해까지 총 17곳의 학원과 꽃가게를 전전하며 150여회의 수업을 듣게 됐다. 회사를 다니던 시절 토요일에 특별한 일정이 없다면, 꽃수업을 듣거나 꽃시장에 갔다. 때때로 야근이 길어지는 밤에는 집 대신 자정에 오픈하는 꽃시장에 들렸다. 힘든 하루 보상으로 야식을 먹는 것처럼 나는 꽃을 샀다. 아니 사야 했다.

한 회사에 입사해 만 12년을 꽉 채워 근무하면서 홍보팀에서만 11년을 있었다. 리스크 많고, 관리하는 눈도 많던 회사 특성상 모니터링은 홍보팀의 제일 중요한 업무였다. 조금만 보고가 늦어도 질타가 쏟아졌다. 때때로 대응이 늦어진 점에 대해 경위서를 써야 했으니 윗분들도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퇴근 후에도 주말에도 언론과 온라인 모니터링 당번이 존재했고, 주말은 물론 휴가 때도 카톡 단체방에서 대기를 해야 했다.

또 내 상사는 다소 감정적이고 자주 지시 사항이 바뀌어 그에 대한 레이더도 항상 열려 있어야 했다. 회사에서 인정받는 사람이었기에 이해하지 못해도 그의 가이드에 맞춰야 했다. 아니 그에게 합격해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수시로 변경되고 갑자기 추가되는 주문들에 따라가지 못해 혼남(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됐고, 어느 새 무엇이 잘 된 것이고 잘못된 것인지도 가늠할 수 없게 됐다. 결국 윗사람을 만족 시킬 수 있는가?’에만 일의 초점이 맞춰져갔다.

여기서 탈피해보고자 외부 글쓰기 수업도 듣고, 강의도 마련하고, 사내 스터디도 만들고 나름의 고군분투가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몇몇은 팀을 떠나고 또 몇몇은 회사를 나갔다. 나는 그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었는데, 어느 새 사내에서 난 ‘00을 견뎌 낸 독한 애가 되었다.

주말에도 수십번 울려 대는 모니터링 알람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어 등록한 꽃수업이었다. 처음엔 마냥 예뻐서 시작했지만, 신기하게도 꽃 하는 시간만큼은 회사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예쁘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 뿐. 잡념 없이 현재에만 오롯이 집중하는 시간은 오랜만이었다.

식물이 꽃을 피우고, 키를 키우기 위해 쌓아 온 시간을 생각해보세요. 이 꽃과 나무가 가진 아름다움과 선을 뽐낼 수 있게 도와주는 게 플로리스트의 임무예요.” 꽃을 할수록, 선생님의 말을 곱씹게 된다. 비록 자연을 훼손한 것이지만, 그만큼 더 아름답게, 아니 식물의 희생이 미안하지 않게 최대한으로 표현해 보자며 집중하게 됐다.

이 마음은 자연스럽게 꽃과 나무를 관찰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제현주 작가의 말을 빌어 새로운 우주가 내게도 한 겹 열린 것이다. 동네 곳곳에 잡초로 보이던 개망초는 귀여움을 뽐내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주고, 실하게 여문 보리와 벼는 꽃다발 속 어느 풀에 뒤지지 않는 아름다운 선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또 가을이면 도토리가 맺히는 참나무의 종류도 8가지나 된다는 사실을 알고, 적어도 상수리나무 잎만은 구분할 수 있게 됐다. 가을 낭만 하나를 더 챙겼다.

꽃다발을 만들 때 처음에는 꽃이 몇 송이 되지 않아 원하는 대로 고정되지 않고 흔들리기 마련이다. 고정되지 않는다고 줄기를 너무 꽉 쥐면 줄기가 휘거나 부러지기 쉽고 종국에는 꽃이 빽빽하게 뭉쳐져 답답한 꽃다발이 될 확률도 높다. 오히려 힘을 빼고 흔들리는 꽃에도 의연하게, 그러면서도 공간을 주는 유연함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 답답함 없이 커다란 꽃다발을 만들 수 있다. 의연함과 유연성, 현재에 대한 몰입 그리고 나만 아는 만족감. 꽃이 가르쳐 준 것들을 하나씩 곱씹다 보면 다음 일로도 잘 나아갈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긍정의 기운이 차오른다.

이 친구가 상수리나무 잎과 도토리!!
이 친구가 상수리나무 잎과 도토리!!
유칼립투스와 설유화가 가진 선의 매력을 살려보고자 노력했던 가든 부케 ⓒsohwaflower
유칼립투스와 설유화가 가진 선의 매력을 살려보고자 노력했던 가든 부케 ⓒsohwafl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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