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자자족

21. 돌봄과 작업

되고도 마냥 기쁘지 않았던 인턴, 포기를 포기하기까지

2023.09.22 | 조회 1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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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여성

세 여자가 전하는 '일'에 관한 모든 이야기

구독자 님, 안녕하세요. 곰자자족입니다. 지난 번 책방 이름짓기에 이어 책방 이야기 후속편을 기대한 분이라면 오늘의 이야기는 스킵하셔도 좋습니다. 오늘은 지극히 평범하고도 개인적인, 그러나 한번은 정리하고 싶었던 고민스러웠던 마음을 풀어놓았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사소해 별것 아닌 일로 보일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오늘의 저의 고민이, 저의 서사가 언젠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는 안도와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마음으로 이야기를 전합니다.

 

인턴을 시작했다. 자소서 빈칸을 채우기 위해 도장 깨기 하듯 인턴을 하던 20대 때는 십 수 년이 흘러 또 다시 인턴을 하는 일(?)이 생기리라고는 전혀 예상도 못했을 텐데, 마흔을 앞둔 나는 동네책방의 인턴이 되어 매일 아침 경기도 삼송으로 출근한다. 본격적으로 책방을 열기 전, 잠시 다른 책방에서 일하며 책방에서 일어나는 일들, 책방을 찾아오는 손님들, 책방에서 팔리는 책들, 무엇보다도 책방의 영업 매출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꼭 해보고 싶었다. 어쩌면 책방을 하겠다는 다소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인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라도.

그러나 인턴을 지원하면서 고민이 많았다. 집에서 멀어질수록 일하러 나가는 나를 대신해 아기를 봐주는 엄마의 돌봄 시간이 늘어난다는 게 마음에 걸려 가까운 곳을 찾고 싶었지만, 집에서 반경 10킬로미터 내 경기도에는 동네책방이 거의 없었다. 일해보고 싶은 책방은 모두 멀리 있었다. 거리도 걸렸지만 근무시간도 걸렸다. 내가 매일 출근하면 엄마도 우리집으로 매일 출근해야 했기에, 가능한 한 평일 출근은 적게 대신 주말에 많이, 그리고 근무시간을 유연하게 조율할 수 있는 곳을 찾아야만 했다. 이런 나의 사정을 봐주면서 일할 기회를 제공해줄 책방이 과연 있을까?

그래서 인턴 합격자가 발표되는 날, 내 이름을 발견하고도 마냥 신나지 않았다. 어라, 정말 됐구나. 1초 정도 기쁘고 곧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 끝에는 늘 똑같은 결론에 다다랐다. 나만 욕심내지 않으면 모두가 시간을 희생하거나 더 노동을 해야 한다거나 마음 쓰지 않아도 될 일이라는 것. 무언가 해보려는 시도는 좋을 수 있지만 아직 걸음마도 안 뗀 너무 어린 아이를 두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끌어안는 일은 이기적인 일이라는 것. 그러니까 내가 포기하는 게 모두에게는 득이 되는 선택이라는 사실이었다.

안하는 게 낫겠다, 이번 기회는 흘려보내는 게 맞는 것 같다는 내 말을 들은 동생이 말했다. “언니가 임신 출산을 겪으면서 처음으로 무언가 해보려고 신청한 건데 포기한다니 너무 안타깝다. 앞으로 포기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을 텐데 지금 벌써부터 포기를 하느냐는 말에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실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이를 돌보러 언니네 집을 매일 오가는 엄마가 걱정되면 아예 부모님 집에 아이를 데려다두고 인턴이 끝날 때 데려가는 방법도 고려해보라는 동생의 마음은 고마웠지만, 그건 더욱 내키지 않았다. 아이와 떨어져 지내면서까지 일해야 한다면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더라도 좋아지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결국 나는 나만 내려놓으면 모두가 편하니 인턴 못하겠다는 연락을 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짝꿍은 평소와 달리 단호하게 말했다. “그 생각은 잘못됐어. 이유가 뭔지 알아? 모두가 편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편치 않기 때문에, 내 마음이 힘들기 때문이야.” 남들에게 미안한 건 눈 질끈 감고 이번에는 나를 위한, 나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 선택을 해보라는 말에, 아이 낳고 처음 해보려는 일인데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부터 하지 말고 일단 하면서 방법을 찾아보자는 말에 나는 고맙고 미안한 마음으로 출근하기로 했다.

출근 3일째. 우리집은 바통 터치하듯 아이 돌봄 3교대로 돌아가고 있다. 내가 출근하면서 엄마에게 인수인계하고, 저녁이 되면 엄마가 우리집을 퇴근하며 짝꿍에게 인수인계하는 식으로. 이 시스템(?)에 다들 빠르게 적응해가고 있다. 나만 제외하고는. 아이도 괜찮은데 정작 내가 괜찮지 않은 것이다. 내가 부재한 순간에도 자라고 있을 아이의 아주 미묘한 성장변화를 실시간으로 지켜보지 못한다는 아쉬움, 하루 온종일 함께 있어주지 못한다는 미안함 같은 감정이 들면서 불안한 거다. 태어난 순간부터 9개월이 된 지금까지 엄마 껌딱지였는데, 갑자기 나와 거리를 두게 될까봐 나를 찾지 않거나 다른 사람을 먼저 찾을까 봐도 불안하고. "아이를 오래 못보니까 자꾸 지금이라도 그만두는 게 낫나 싶은 마음이 든다"는 말에 돌아온 건 "자꾸 나약한 소리하며 주저앉지 말라"는 동생의 대답. 문득문득 밀려드는 (사실은 쓸데 없는) 두려움이 언제까지 지속될까? 두려움이 사라지기를 바라면서, 혹은 두려움과 싸우면서 내일도 출근해야겠다. 

* 아이를 낳기 전에 선물 받고도 책상 위에 올려만 두다가 얼마 전 갑자기 펼쳐 든 뒤로 모든 페이지가 꼭 내 마음 같았던 책 <돌봄과 작업> 중에 좋았던 문장을 옮겨적으며 오늘의 이야기를 마칩니다. 

정신없이 걷다가 문을 연 뒤 다른 세계로 갔고 등 뒤에서 닫히는 문을 보며 한 시절이 떠나갔음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아이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도 어떤 겹이 생겨나는 걸 느꼈다. 이것을 성장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인간의 성장은 날개를 펴는 것처럼 자유로워지거나 꽃이 피듯 눈부신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어떤 일을 통과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다른 곳에 도달하게 되는 일인 것 같다. 자고 일어나면 알지 못하는 사이에 키가 자라는 것처럼 어떤 길을 지나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걸어가는 과정 속에서 성장이 일어나는 것이다. 

- <돌봄과 작업> 서유미: 손을 잡고 걸어가는 일 중에서 - 


아이가 나에게 주는 사랑과 내가 아이에게 갖는 힘은 속세의 어떤 사랑이나 권력과도 비교 불가능한, 깊은 충만감과 효능감을 준다. 그래서 여자들이 결국 아이를 택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의 경우, 일차적으로 그렇게 남자에게 사랑받는 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심리적 욕구가 사라졌다. 그러면서 동시에 여자와의 관계에 마음이 열렸다. 내가 아무리 기를 써도 사회 전체가 여자를 누르는 힘을 당해낼 수는 없다는 경험 때문이었다. 내가 특별한 여자가 아닌 이상, 더 많은 여자들이 잘 사는 세상일수록 나 또한 잘 살 수 있게 된다고 믿었다. 주변의 여자들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진심으로 축하해줄 수 있게 되었다. 

- <돌봄과 작업> 임소연: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존재들과 살아가기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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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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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민호

    0
    7 months 전

    마흔 앞두고 새로운 도전에 나서기까지 셀 수 없이 많은 밤을 하얗게 지새웠을 텐데, 이왕 시작한 거 끝까지 가보길 응원합니다!!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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