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자

20. 화장실에서 쉬고 있는 어른이가 불쌍한가요?

불쌍하게 생각하기 보다는 기특하게 여겨봅시다.

2023.09.15 | 조회 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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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여성

세 여자가 전하는 '일'에 관한 모든 이야기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은둔자'입니다. 일하는 어른이들에게 화장실이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팀 동료와 함께 직장인과 화장실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다가 제 생각의 결론을 글로 적어보았습니다. 여러분에게 화장실은 어떤 의미인지 한 번쯤 생각해봐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가 태어난 이래 우리 가족 구성원은 5명 이하였던 적이 없었다. 때로는 더부살이 하던 사람이 있기도 했고 그 이후로는 연년생의 동생들이 더해져 엄마는 늘 분주했다. 극도의 정신 노동과 육체 노동에 시달리던 엄마가 쉬는 유일한 공간은 화장실이었다.

그 순간마저도 엄마는 온전히 휴식을 취하지 못했는데, 내가 쪼르륵 따라들어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손을 씻기 위해서였는데 엄마가 뚜껑을 덮은 변기 위에 앉아있는 모습이 어린 내게는 이상하게만 보였다. 그래서 이유를 물으니 쉬고 있는 거라고 했다. 밖에는 사람도 일도 너무 많아서, 잠깐 앉아서 쉬는 거라고.

나는 그때의 엄마가 너무 불쌍했다. 부엌과 세탁실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엄마. 모든 사람이 엄마를 찾아대니 쉬려면 화장실로밖엔 도망칠 수 없던 엄마. 그래서 약속을 했었다. 커서 내가 돈을 벌면 엄마가 하고 싶은 걸 하게 해주겠다고. 어떤 형태로든 엄마가 쉴 수 있는 공간도 만들어주겠노라고.

그것만이 생의 목표는 아니었는데 어찌저찌 살다 보니 당시에 했던 엄마와의 약속을 거의 다 지킨 어른이 되었다. 매일을 오늘 그만둘까?’ 생각하며 다니는 회사이지만, 그 회사 덕분에 어린 날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고마운데, 참 고마운 회사인데.......크흡...(저 우는 거 아닙니다. 아무튼 아닙니다.)

하지만 정신없이 살다 보니 내게 그런 어린 날이 있었다는 것도 그 약속을 다 지켰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며칠 전 회사 화장실에서 팀원을 만났는데, 그날 둘 다 얼마나 바빴는지 같은 팀인데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인사를 나눴다. 그러면서 그 팀원이 우리는 왜 꼭 화장실에서 쉬게 될까요?”라고 말했는데 그 순간 섬광처럼 화장실에 있던 엄마와 내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어른이 된 뒤의 나는 대부분 화장실에서 쉬었던 것 같다. 8시 출근 11시 퇴근을 6개월씩 하며 몸무게가 8kg이나 빠졌을 때도(이걸 유지했어야 했는데.... 크흡....아무튼 저 우는 거 아니라고요...) 상사 눈치 보느라 화장실 변기에 앉아 졸고, 실수하는 나 자신이 괴로울 때도 화장실에서 울었다. 심지어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는 버젓이 직원 휴게실이 있는데도 머리를 쉬고 싶으면 화장실에서 창밖을 보며 멍을 때리고, 스트레칭도 화장실에서 한다.

내면의 진정한 휴식은 시설 좋은 옥상에서도 드라마 촬영 요청이 올 만큼 근사한 사내 카페에서도 얻을 수 없다. 오로지 사방 두어 평 정도의 꽉 막힌 화장실만이 안심하고 쉴 수 있게 만든다. 그게 단지 내가 엄마를 닮아 화장실을 편안하게 느끼는 DNA를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화장실에서 졸거나 울거나 욕을 해본 경험이 있을테니까.

그렇게 생각해보니 화장실에서 쉬고 있는 내가 그렇게 대단히 불쌍하지는 않다. 내가 엄마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만큼 가엾은 상황은 아닌 것 같다. 혹은 정말로 좀 불쌍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엄마처럼 더 이상 화장실에서 쉬지 않게 될 거라는 희망을 품는다. 나의 희망이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에게도 희망이 되면 좋겠다.

그리고 기왕이면 화장실에 앉아 한숨 푹푹 쉬기 보단 1등 당첨된 로또에 혼자 몰래 기뻐하거나 빠르게 오르는 주식창을 보고 즐거워하시는 분들이 많았으면 싶다. 물론 행운이란 쉽게 찾아오지 않으니까 혹시 오늘 화장실에서 씩씩거릴 일이 생기더라도, 그 일로 돈 벌어 스스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도 열심히 하고, 본인이 쉴 수 있는 공간들도 많이 만들게 되기를 바란다.

만약 회사 화장실에서 이 글을 보고 계실 분들이 계시다면, 오늘 하루 더욱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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