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자자족

09.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잘 자라고 있으니까

작물도, 아기도, 우리도 함께 자라는, 그리하여 자라나는 마음

2023.06.30 | 조회 2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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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여성

세 여자가 전하는 '일'에 관한 모든 이야기

안녕하세요. 구독자 님. 며칠 내내 계속된 장마로 집콕하며 육아에 전념하고 있는 ‘곰자자족’입니다. 예전에는 비가 오면 눅눅해져 싫다는 생각만 했었는데요. 텃밭을 가꾸기 시작한 올해는 비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졌답니다. 작물들이 무럭무럭 자라는데 꼭 필요한 게 바로 비니까요. 건조한 날씨가 계속 되다가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들으면 ‘아, 비 맞고 우리 텃밭 작물들 더 잘 자라겠네’ 생각도 하고요. 아기를 키우며 텃밭을 가꾼다는 건 우리 부부에게 일종의 미션 같습니다.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고, 더 어렵고, 때때로 경험해보지 않은 상황에 자꾸 맞닥뜨려야 하니까요. 그렇지만 그런 우왕좌왕 혼돈 속에서 작물도, 아기도, 우리도 자라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도 해요. 오늘은 세 평 조금 안 되는 밭을 임시 분양받아 키우는 삶을 살고 있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연일 계속된 폭탄비에 무사하기를, 비 피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이면 일기예보를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가족 여행이나 나들이 계획에 참고하려고? 아니다. 그럼 혹시 세차해도 될지 확인하는 거냐고? . 그것도 아니다. 비가 오는지 안 오는지 확인하는 이유는 단 하나, ‘에 가기 위해서다. 구에서 운영하는 세 평 남짓한 텃밭을 분양받아 작물을 가꾸는 주말농장 도시농부의 삶을 살기 시작한지 세 달째. 밭일하러 가기 좋은 날(날씨)을 미리 확인하는 마음은 한주 새 훌쩍 자랐을 작물을 만날 생각으로 벌써 들뜬다.

적상추, 청상추, 적근대, 치커리, 대파를 시작으로 방울토마토, 대추토마토, 그냥 왕큰이 토마토를 밭에 심었다. 가지, 오이, 애호박, 늙은 호박, 옥수수 모종까지 골고루 들여 밭의 작물밀도를 높여둔 게 지난 4월 말. 주렁주렁 열매 맺을 모습을 상상하면 즐거웠지만 정말 이게 될까반신반의하는 마음도 아예 없지는 않았다. 다행히 알아서 잘 자라 매번 놀라움을 안겨 주는 덕분에 첫 마음은 아예 자취를 감춘 상태. 잎이 커지고 줄기가 단단해지더니 꽃을 피우고 그 자리에 열매가 열리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기쁨은 생각보다 컸다. 걱정과 달리 매번 튼튼하게, 더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안정됐고 묘한 성취감도 느꼈다.

한 번은 해질 무렵 텃밭을 간 적이 있다. 주말에는 일정이 있어 못 갈 것 같은데 다음에 가기 전까지 혹시라도 비가 안 온다면 바짝 말라 작물들이 죽을지 모르니 물 줘야겠다는, 가볍지만 또 나름대로는 잘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이 작동했다. 가볍게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150일 넘긴 아기를 데려가야 하다 보니 시간은 지체됐고 짐도 많아졌다. 아기를 차에 태우고 나니 이미 퇴근 시간. 때마침 퇴근한 동생까지 태워(동생은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회사를 다니고 있다) 서둘러 밭에 갔다. 도착해보니 상추꽃 만발. 풍성해진 상추꽃대를 보니 수확을 해야겠다 싶어 쪼그려 앉아 상추를 톡톡 따기 시작했다. 아기는 동생에게 맡겨둔 채.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이 아기를 안고 우릴(짝꿍과 나) 향해 황급히 달려왔다. “언니, 이솔이 배에서 엄청 소리가 났는데 똥 싼 것 같아.” 😅😂😭 동생의 추측은 맞았다. 차에서 기저귀를 갈기엔 비좁을 것 같아 고민하던 참에 원두막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곧장 가서 아기를 눕혀 엉덩이에 묻은 똥을 닦고 기저귀를 갈아주었다. 그제야 이솔이는 평상에 누워 웃었다. 동생과 나도 따라 웃었다. 이 상황이 황당하면서 웃겼다. "누가 이런 경험해보겠어" 말하는 내 마음에도 다시 여유가 차는 것 같아 좋았다. 그날 상추를 완벽하게 뜯고 잡초도 깨끗하게 뽑아 제대로 정비를 해두고 왔던가. 그것은 기억나지 않지만 해질녘 풍경, 선선한 바람과 흙냄새(물론 똥냄새도), 동생이 아기를 안고 뛰던 모습, 원두막에서 아기를 눕혀두고 똥 묻은 기저귀를 들고 동생과 함께 웃던 모습들은 아직도 선명하다.

지난 주말에는 태풍과 장마가 온다는 일기예보에 밭작물들이 비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정비를 하고 왔다. 강렬한 햇볕에 작물이 몇 배속으로 자란 것 같았다. 손봐야 할 곳들이 많았지만 초여름 뙤약볕에 아기도, 나도 뜨겁게 익어갈 것 같아 짝꿍 혼자 밭일을 하고, 아기와 나는 차 안에서 있기를 택했다. 호박과 오이 넝쿨이 잘 뻗어나갈 수 있도록 끈으로 묶는 것도, 토마토 줄기가 바람에 휘청거리지 않도록 지지대를 지탱하는 것도, 무서운 속도로 자란 잡초를 제거하는 것도 모두 짝꿍의 일이었는데 정말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만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 밭을 돌보는 건 우리지만 그 밭을 돌볼 시간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아기였기 때문. 땀 흘리면서 불편함을 호소하는 아기를 위해 수확도 포기, 밭도 일부만 정비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밭에서 알아서 커 가는 작물도, 우리 곁에서 매일 커가는 아기도 절대 나의 통제나 예측한 속도대로 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주말. 완벽하게 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 그리고 농사도, 육아도 변수가 상수라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인지한 주말도 벌써 일 주 전. 이제 또 다시 주말이다. 이번 주 내린 비에 미처 손보지 못한 작물들이 혹여 떠내려가지는 않았으려나. 걱정되면서 궁금해진다. 이번 주말 날씨는 어떤지 일기예보부터 검색해봐야겠다.

꽃과 잎들 사이로 잘 자라고 있는 호박, 이번주에는 얼마나 자랐을까
꽃과 잎들 사이로 잘 자라고 있는 호박, 이번주에는 얼마나 자랐을까
이솔이 보는 동화책 <물어보아요> 중에 한 장면. 마음에 든 데는 운명적으로 이유가 있었나보다.
이솔이 보는 동화책 <물어보아요> 중에 한 장면. 마음에 든 데는 운명적으로 이유가 있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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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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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whites

    0
    10 months 전

    땀과 높은 습도로 끈적한 여름이지만 가장 열정적이고 건강한 계절을 건너고 있는 것 같아요💚 이솔이도 텃밭의 채소들도 모두 장마에도 무탈하고 씩씩하게 자라길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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