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자자족

43. 내가 애정하는 시간

요알못이 주방지킴이로 거듭나면서 깨닫게 된 것

2024.03.29 | 조회 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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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여성

세 여자가 전하는 '일'에 관한 모든 이야기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곰자자족입니다. 봄이 가까이 왔나 싶어 요 며칠 동네를 봄꽃을 찍으며 동네를 돌아다녔는데요, 정신차려 보니 다음주면 벌써 4월이더라고요. 새삼 시간의 속도감을 느끼며 지난 3개월을 회고해보니 바쁜 와중에 제가 저를 위해 꼭 챙긴 것이 있었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시간의 위대한 힘에 대해 가볍게 풀어볼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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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리를 못한다. 냉장실과 냉동실이 꽉꽉 찬 걸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엄마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요리 못하는 어른이 되었다. 마트 구경이나 시장 구경이 재밌다는 엄마의 말뜻 또한 와닿지 않았기 때문에 심심한데 마트 갈까묻는 제안에 나는 대체로 거절을 표하는 쪽이었다. 자연스레 엄마와 조리 전공자였던 동생은 단짝 친구가 되었고. 둘은 새로 마트가 생겼다면 집에서 꽤 먼 곳이라도 사야 할 품목에 동그라미 쳐둔 할인 전단지를 챙겨 자주 떠났다가 두 손 가득 돌아오곤 했다. 그런 일이 수차례 아니 수십 번 반복되자 더 이상 엄마와 동생은 내게 같이 장보러 갈까묻지 않았다.

냉장고 안을 정리해두는 엄마의 칠판. 저희 엄마의 내공이 느껴지시나요? ㅎㅎ
냉장고 안을 정리해두는 엄마의 칠판. 저희 엄마의 내공이 느껴지시나요? ㅎㅎ

냉장고를 열심히 채워 두는 엄마와 동생 덕분에 나는 언제든 냉장고 문을 열어 반찬과 국, 각종 레토르트 식품(만두, 파스타, 치킨 등)을 어렵지 않게 즐길 수 있었다. 야근이 잦아 밤 12시가 넘어 집에 도착하는 날에도 문만 열면 무엇이든 발견했고, 먹다 잠들 수도 있었다. 때문에 내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그 누구보다 내 짝꿍을 걱정한 건 다름 아닌 엄마와 동생이었다. 정작 결혼 당사자인 나는 아주 태평했는데 말이다. 요리는 같이 하면 되는 것이고, 그게 아님 잘하는 사람(=내 짝꿍)이 좀 더 많이 하면 되는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실제로 신혼생활의 대부분 우리 주방의 메인 셰프는 짝꿍이었다. 그가 불 앞에서 진두지휘할 때 나는 주로 그가 요청하는 것들을 옆에 나르는 보조를 맡았는데 그러한 역할 배분에 나는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주말 아침을 담당하는 구 메인 셰프(현재는 내가 메인 셰프라 생각하기 때문에ㅎㅎ)
주말 아침을 담당하는 구 메인 셰프(현재는 내가 메인 셰프라 생각하기 때문에ㅎㅎ)

주방의 평화, 아니 주방에서의 나의 평화가 흐트러지기 시작한 건 아이가 태어난 지 6개월 무렵이었다. 아이 이유식을 만들기 위해 주양육자인 내가 나서야 할 타이밍이 된 것이다. 이유식 레시피 책을 종류별로 얻어두었지만 요리가 익숙지 않은 내게는 이유식 만드는 과정이 한 번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책이 불편하다 싶어 블로그도 검색했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볼 때는 매우 간단한 것 같다가 막상 불 앞에 서면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물기 묻은 손을 다 닦지도 못한 채 휴대폰 액정에 그대로 뚝뚝 물기를 떨구고 포스팅을 몇 번이고 올렸다 내렸다 반복하면서 겨우 겨우 만들어 나갔다. 초기 이유식, 중기 이유식을 거치며 아이가 성인처럼 삼 시 세끼를 먹게 됐을 때는 바깥 날씨가 35도를 육박하는 한여름. 불 앞에 서서 쌀이 죽이 될 때까지 휘 젓는 동안 나는 더위 먹은 사람 마냥 얼굴이 벌개졌고 자주 넋이 나갔다.

얼굴에 오른 열을 식히느라 마스크팩을 붙이고 침대에 잠시 누워 있다 보면 아이 이유식을 편하게 사 먹이자는 마음이 들었다. 주방에서의 시간을 줄이고 내 휴식을 늘려보자는 다짐도 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나는 다음날이면 전날의 다짐 같은 건 깡그리 잊고 무식하게 또 다시 주방을 지켰다. 그러는 사이 서툰 칼질에는 점점 속도가 붙었고, 블로그 포스팅 하나를 몇 번이고 올렸다 내렸다 하는 횟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때로는 레시피에서 알려준 방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내 마음대로 여러 채소를 섞어 새로운 조합을 만들기도 했다. 물론 그 결과물에 아이는 어느 누구보다 냉정한 맛 평가자였다. 호기심에 한입 먹었다가 곧바로 뱉고는 전혀 입 벌리지 않는 날도 있었으니까. 

그런 전진과 후퇴를 거듭한 덕분에 아이는 이제 나의 요리를 곧잘 먹는 조금 더 큰 아기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못하지만 이전보다는 나아져 요리를 못하는 어른이 된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내가 레시피에 더 이상 끌려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면서 같다. 처음 시도해보는 음식 맛이 들게 하는 양념을 만들 때 거기에 들어가는 양념 재료들의 조합이 1스푼인지 2스푼인지 반드시 기억하고 똑같이 하려는 강박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레시피 집착에서 벗어나니 오히려 요리하는 과정 전체를 차근차근 따져볼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 머릿속으로 맛을 상상하면서 각종 양념을 배합해보는 의외의 재미를 알게 됐다. 그 과정을 거쳐 완성된 맛이 그럴싸할 때의 만족도 그래서 의외로 크다.

인터넷의 각종 요리 선생들이 알려주는 기본을 참고하되 내 입맛에 맞게 그 과정을 하나씩 전개해 나가는 나의 모습이 마음에 든다. 주방의 단독 지휘자가 되어 나만의 속도로 나름의 절정(?)을 향해 가는 게 일종의 짜릿함마저 준다. 완성된 음식이 맛있을 때는 절로 감탄이 나고. 그렇게 나는 주방에 있는 시간을 애정하게 되었다. 아이가 잠들고 난 밤 집안의 불을 모두 끈 채 주방 싱크대에 달린 LED 조명만 은은하게 켜고 식재료를 씻고 다듬고 기름 두른 팬에 들들 볶거나 끓여내는 고요한 시간을 사랑하게 되었다흙 묻은 파를 일정한 크기로 잘라 용기에 가지런히 담아 정돈된 모습을 바라보는 기쁨도 있고, 그 파를 다시 꺼내 송송 썰다 우연히 하트를 발견하는 기쁨도 있다. 그 고요 속 평화가 온종일 소란스러웠던 눈과 귀, 마음을 평온하게 만든다. 물론 아이를 위해 심심하게 맛낸 간장 양념에 뭉근하게 끓여낸 돼지등뼈찜을 한입 베어 물었더니 입에서 사르르 녹을 때, 그것을 아이와 짝꿍이 맛있게 먹는 것을 바라볼 때의 기쁨도 상당하다.

파송송에서 하트를 발견하는 의외의 기쁨
파송송에서 하트를 발견하는 의외의 기쁨

그러나 내가 정말 좋아하는 시간은 아이도, 짝꿍도 아닌 오로지 나를 위해 요리를 하는 시간이다. 며칠 전에는 내가 먹고 싶어 카레를 끓였다. 낮잠 든 아이의 방문을 슬쩍 닫고 당근, 감자, 양파를 차례로 깍뚝 썰어, 기름에 먼저 볶아둔 돼지고기 위에 한번에 털어넣고 오래 들들 볶았다. 카레 가루까지 넣어 약불에 젓다가 보글보글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밥을 짓는다. 30분 취사완료 알림이 울리면 밥솥 뚜껑을 열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밥알을 골고루 잘 섞는다. 뽀얀 흰쌀밥에 각종 야채를 아낌없이 넣어 푹 끓인 카레를 한 국자 떠 먹었더니 몸도, 마음도 뜨끈해진다. 아무도 말 걸지 않는 조용한 시간에 나홀로 천천히 꼭꼭 씹어 한그릇을 뚝딱 비워내고 나면 이제야 비로소 무엇이든 할 힘이 생기는 것만 같다.

서툰 칼질을 나름 연마하며 알게 된 사실은 스스로 돌보는 시간이 나와 내 주변을 함께 건강하게 지탱해주는 힘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예민지수가 높아졌다 느껴지는 날, 피로가 도저히 사라지지 않는다 싶은 날에는 나를 잘 먹이고 돌보기 위해 노력한다. 하루에 한끼는 꼭 갓 지은 밥을 먹으려 애쓰고 공들여 음식을 만든다. 그런 사소하고도 고요한 시간이 내게 축적되면 어쩐지 다시 무엇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샘솟는 까닭이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잘 소화시키면 만족스럽지 않은 날을 흘려보내고 또 어느 날은 근사한 하루를 맞이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아 나는 또 다른 내가 되는 날을 살고 싶다.

작지만 큰 나의 주방에서 나를 돌보고 내가 애정하는 시간을 만든다. 
작지만 큰 나의 주방에서 나를 돌보고 내가 애정하는 시간을 만든다. 

📝빙고 뉴스

'팀 일류여성'의 새해 목표 달성 현황을 공유해 드려야 할 타이밍이 돌아왔네요!  정체기에 접어든 것도 같지만 진짜 실패는 연말에 알 수 있잖아요?! 다음달에 우리는 또 얼마나 달라져 있을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 드려요 :)

🐻 곰자자족: 한 달에 한번 가족여행 가기 3월에도 달성! 창업 사업계획서 쓰고 지원금 받기 미션은 일단 계획서 쓰고 제출까지 했으니 절반의 성공(이라 해도 되겠죠?) ㅎㅎ

🎈 부유하는 유부: 5km 쉬지 않고 달리기 미션, 3km 달리기까지 성공! 혼자여행 가기 미션과 한번도 안 가본 곳 여행 미션도 순조롭게 성공 이어갑니다!

😎 은둔자: 등산과 도시락 미션 순항 중! 일기 쓰기 미션은 임시 휴업 중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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