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 어린이서점에 들렀다. 오후 네 시를 넘어선 무렵의 서점은 어린이집 하원을 마치고 놀러 온 어린이들과 그들을 돌보는 양육자들로 이미 꽉 차 있었다. 서점 사장님은 이 정도 시끌벅적은 예삿일이라는 듯이 번잡한 분위기 속에서 홀로 무언가에 깊이 몰두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장님, 하고 몇 번 불러도 듣지 못했다. 사장님의 코앞까지 가서 아이와 함께 얼굴을 들이밀자 사장님은 그제야 반갑게 알은 척을 했다. “아니, 이 시간에 어쩐 일이에요?”
“아이가 소방차 책을 계속 찾아요. 한 권만 살 수 있을까요?” 발가락을 다쳐 절뚝거리는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야 하는데, 안 가겠다고 떼쓰는 아이를 달랠 일종의 처방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아이가 처음 말한 건 스티커북이었는데, 아이를 안고 거리가 먼 다이소까지 가는 게 엄두가 안 났다. 그때 생각난 게 동네의 어린이서점이었다.
어린이 그림책 전집을 파는 서점에서 낱권만 사겠다는 손님이 달가울 리 없을 텐데, 사장님은 책장을 스윽 훑더니 아이 취향에 맞을 그림책 몇 권을 차례로 꺼내왔다. 집에 없는 책이 생기는 기쁨을 아는 건지, 아이는 신나게 살펴보더니 마침내 한 권을 골랐다. 덕분에 그날 나는 혼자 해결하지 못했을 하루를, 이곳의 도움으로 무사히 건너갔다.
어린이서점이지만, 그곳은 꼭 동네의 양육과 돌봄 친화 공간 같다. 아이가 하원하고 갈 곳을 찾아 헤매는 양육자들을 위해 언제나 열려 있는 곳. 서점의 정중앙, 판매로 따진다면 가장 비싼 매대로 볼 수 있는 제일 크고 넓은 공간이 아이들 놀이터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블록, 크고 작은 공룡 피규어, 손때 묻은 각종 장난감이 모여 있는 이 공간에서 아이들은 놀고 싶은 만큼 충분히 놀고, 그런 아이를 보며 어른들도 잠깐의 휴식을 챙긴다.
그래서 나 또한 서점에서 자주 아이와 시간을 보냈다. “또 와요, 자주 놀러 와” 하는 사장님의 말처럼 그곳은 책을 사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지난여름, 서점 사장님이 무료 마술 공연을 열었다. 한 시간 정도 공연이 끝난 후, 어린이들에게 책 한 권씩 선물로 나눠주는 이벤트가 마련됐다. 그때였다. “자, 저와 함께 하는 엄마들, 이제 정리 좀 해주세요.” 사장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각자의 무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왔다. 누군가는 바닥에 펼쳐진 퍼즐매트를 하나씩 뜯어 상자에 담았고, 누군가는 곳곳에 놓여 있는 어린이 의자와 큰 방석들을 한 곳으로 모았다. 또 다른 누군가는 책을 받으려는 아이들을 한 줄로 세웠다. 그것은 마치 약속된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크리스마스 산타 공연이 끝난 뒤에도, 어린이를 위한 클래식 연주회가 끝난 뒤에도 어김없이 엄마들은 나타났다. 그들은 한두 번 해본 게 아닌 듯 능숙했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그때 문득 생각했던 것 같다. 이런 게 팀 아닐까? 지난주 부유하는 유부가 레터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조직에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가는 ‘원팀’도 팀이지만, 따로 떨어져 지내다가 필요할 때에 수시로 뭉쳐 거들고 돕는 모습. 일일이 지시하거나 말하지 않아도 오늘의 행사가 무사히 끝나기를 바라며 같은 마음, 같은 모양으로 움직이는 형태.
혼자 일하지만, 때때로 혼자가 아닌 내가 되고 싶을 때 어디선가 마음과 마음으로 연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느낀다면, 내가 무엇인가 하려고 할 때 품앗이하듯 함께 돕고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소속되어 있지 않더라도 충분히 안정감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지치지 않고 계속 새로운 일을 도모할 수 있을 테니까. 그것이 내가 현재 그려보는 팀의 청사진이다.
야구의 룰 중에 ‘벤치클리어링’이라는 용어가 있다. 팀이 불리한 상황에 있다고 판단이 되면 덕아웃, 불펜, 벤치에 있던 선수까지 모두 그라운드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들은 팀이라는 조직 속에서 몸과 몸으로 연대하고 있다. 그러니 팀원의 편에 서서 상대편과 맞서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벤치클리어링은 경기의 일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 팀의 동료들이 나를 위해 다이아몬드 복판으로 나와주었다는 것.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다이아몬드처럼 깨지지 않을 약속."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서효인 지음, 다산책방
회사를 다니는 동안, 나는 오래도록 이 ‘벤치클리어링’이야말로 팀이란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이 단어를 마음에 품고 한결같이 갈망해왔다. 수많은 클라이언트에게 압박과 쪼임을 당할 때, 그래서 숨고만 싶어질 때 나를 위해 대차게 함께 싸워 줄 팀장과 팀원이 있기만을. 수익과 효율을 앞세워 매일 경쟁해야 하는 조직의 생리 상,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일정 등 이유로 수행이 어렵지만,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 채 팀원 핑계를 대는 팀장에게 농담처럼 “야구에 ‘벤치클리어링’ 아시죠?” 말한 것도 제발 팀킬은 하지 말아달라는 의미였다. 회사 다니는 동안 유독 그 단어는 없는 단어였다.
그런데 소속도, 역할도, 직책도 없이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가, 필요한 순간이 오면 주저 없이 가운데로 모여 함께 하는 사람들, 뭉쳤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면서 각자 이뤄가는 성취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벤치클리어링’을 본다. “당신과 나의 동해바다 같은 오지랖으로 펼쳐진 위아래 없는 연대의식. 이를 줄여서 ‘벤치클리어링’이라고 부른다.”(같은 책 인용) [1]
마지막 문장의 한 단어만 바꾸고 싶다.
이를 줄여서 ‘팀’이라고 부른다.

📍 [전시 안내] 작가의 서재: 기록하는 마음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그 동안 책 만들기 수업을 제가 사는 동네에서도 듣고, 조금 먼 서초동에서도 들었는데요. 서초에서 만난 저의 선생님인 박지현 작가님의 제안으로, 첫 책을 만든 사람들과 [작가의 서재: 기록하는 마음] 전시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수원 상상캠퍼스에서 7월 19일까지 계속되는데요. 저는 첫 책을 만들기까지 고민하며 고친 원고, 책 표지를 완성하기 위해 여러 번 출력해본 작은 인쇄 디자인 등의 기록을 보여드릴 예정이고요. 관객들에게 던지는 질문도 준비되어 있답니다.
책을 만들기 전까지는 몰랐던, 어쩌면 느슨하게 연결된 사람들과 프로젝트 팀으로 함께 하는 이 시간을 기꺼이 즐겁게 누려볼 생각이에요. 따뜻한 날, 가볍게 수원 나들이 겸 방문해보시기를 바라며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한 권의 책이 완성되기까지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들이 먼저 쌓입니다. 이 전시는 그 시간을 가만히 펼쳐 보이는 데요. 작가의 책상 위에는 메모와 초고, 끝까지 이어지지 못한 문장들이 남아 있습니다. 누군가의 하루와 고민이 머물렀던 자리입니다.
정리된 결과가 아니라, 기록이 지나온 흔적들을 그대로 두었습니다.완성된 책과 함께, 그 책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함께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 이 전시가 기록을 시작하고 싶은 마음, 혹은 이미 기록하고 있는 시간에 작은 용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 전시 안내
- 기간: 2026년 4월 16일~2026년 7월 19일
- 장소: 상상캠퍼스 307호 개띠랑 기록실 (경기 수원시 권선구 서둔로166 생활1980)
- 기획/운영: 개띠랑 기록실
- 큐레이션: 박지현(아홉프레스)
- 참여작가: 장지은|로드리고|천얼굴|민정|예도하|이정진|함지연|김규희|아홉프레스(박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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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egipinguim
사람들을 만나는 걸 그닥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고 혼자 일하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날부터인가 같이 일하고, 같이 욕하고, 같이 소회를 나누는 과정이 마음을 참 채워주는 행위라는 걸 깨닫게 된 것 같아요. 막연하게 그게 좋더라- 라고만 생각했는데, 벤치클리어링이란 단어가 그 애매함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것 같네요. ㅎㅎ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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