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좀체 가만히 못 있는 사람이었다. 회사를 다닐 적에는 최소 2년에 한번 무조건 한국을 떠났다. 회사원으로서의 미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현재를 탕진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연차를 아주 살뜰히 끌어다 썼다. 10일 정도(휴가 기간 앞뒤로 주말 4일을 붙이는 형태)면 못갈 곳은 없었다. 덕분에 가까운 일본, 홍콩, 베트남부터 아주 먼 포르투갈까지 발도장을 찍었다. 물론 멀리 떠나지 못한 해도 있었다. 그러면 회사에는 동남아(주로 방콕)를 간다고 속이고 아주 길게, 몰래 제주도를 갔다. 굳이 그렇게 거짓말할 필요가 있냐고 물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야만 회사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나 수시로 울리는 카톡을 피할 수 있었다.
매번 출국 당일까지 출근해서 일하고 혹여 늦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공항으로 향할 만큼 매일 시끄럽게 바쁜 회사에서 일했으니까. 나는 기내식이 제공되는 장거리 비행기를 타야만 내게 자유가 보장되는 줄 알았다. 비행기를 타야만 진짜로 나만의 내 인생이 살아지는 줄 알고 살았다. 그래서 20~30대 내내 늘 한국이 싫고 어디든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데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결혼하고, 임신, 출산, 육아를 겪으면서 전혀 다른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 떠나고 싶어도 이전처럼 마냥 자유롭게 떠날 수 없는 현실. 떠나지 못하면 내 자유는 없는 걸까? 떠나지 못해도 이곳에서 내 인생을 잘 살아낼 수 있다면 매번 어디론가 가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질문 끝에 내린 결론은 지금 내게 주어진 현실에서 발 딛고 잘 살아야 다음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떠남이 무용하다는 말은 아니다. 혼자 나 자신과 지내본다. 회의하고 절망했던 외부의 모든 것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내 안에서 고칠 수 있는 것을 들여다본다. 언제나 제자리인 것 같은데, 열심히 발걸음을 놀리면 어느새 멀리 와 있다. 그걸 잊지 않고 오늘도 걸으면 된다.
_이다혜 기자, 《여행의 말들》 중에서
혼자 나 자신과 지내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현실의 체크리스트를 잠시 잊고 여럿이 함께 인 공간에서도 오롯이 혼자일 수 있는 곳. 잠시라도 고독과 몰입에 빠져 가장 조용한 나만의 세계로 도착할 수 있는 곳. 그렇지만 매번 새로운 내게로 도착하는 곳. 고민 끝에 나의 발걸음은 미술관으로 향했다. 아이를 낳고 9개월이 지났을 무렵, 김하나, 황선우 작가가 진행하는 ‘여둘톡’ 팟캐스트를 통해 ‘로즈 와일리’라는 영국 화가를 알게 됐다. 미술을 전공했지만 결혼하고 아이 셋을 키우느라 마흔이 넘을 때까지 작품 활동을 전혀 하지 못했다는 로즈 와일리. 그녀는 꿈까진 접을 수 없어 가정을 돌보면서도 매일 그림을 그렸고, 마흔 중반 다시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해 자신의 경력을 이어갔다고 한다. 물론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고 드디어 75세에 신진작가로 선정된다. 여기까지 듣자 87세 할머니(당시 기준이며 현재 90세가 되었다)가 온몸으로 열정을 쏟아 즐겁게 그린 작품이 무척 궁금해졌다.
경주 복합 문화 공간 플레이씨에 걸린 로즈 와일리의 작품들은 그녀의 히스토리를 알고 가지 않았더라면 나이 많은 할머니 화가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유쾌했다. 아이처럼 해맑았다. 그녀를 관통한 시간들이 녹록하지 않았을 텐데, 이토록 천진난만하다니. 그 자체가 주는 울림과 감동이 있었다. 나이 든 예술가가 지금 내 나이보다도 많은 나이에 경력 단절을 딛고 새로운 시작을 했다는 것, 그리고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에 받은 용기와 위로는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래도 말하고 싶다. 나아지는 줄 알았더니 어느 순간 제자리걸음이고,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다가도 도태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한없이 푹 꺼져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로즈 와일리의 그림 앞에서, 그림 너머에 숨겨진 그녀의 삶 앞에서 단단한 용기를 얻게 될 것이라고. 그림을 보면서 얻은 빛 한 줌으로 아직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림 너머에 어떤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을까. 작가는 어떤 마음으로 이 그림을 그렸을까. 내 마음대로 상상하며 미술관의 작품들을 훑어보는 일이 즐겁다. 틀려도 재밌고, 몰라도 재밌다. 그래서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 있는 동안, 틈틈이 미술관 나들이를 시도하고 있다. 또 가능하면 시간을 맞춰 도슨트의 설명을 챙겨듣는다. 그림이 한층 풍성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집으로 와서는 작가의 이력, 생애를 조금 더 찾아본다. 그러면 어느 한 시대를 충분히 여행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작가의 삶에 흠뻑 빠졌다가 돌아오면 지금 나의 일상에 충실할 에너지도 생긴다.
이게 당분간 장기여행이 힘든 내게 유효한 여행의 방식이다. 괜히 우겨보는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미술관 전시 관람이 진짜 여행일 수 있지 않을까? 다른 시대, 다른 삶을 살았던 작가의 작품을 들여다보면서 감동도, 위로도, 희망도, 때로는 아이디어도 얻을 수 있을 테니. 만원(입장권)으로 가장 멀리 가보는 여행이 꼭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잘된 여행은 어떤 것일까. 나는 분명한 기준이 있다. 살아있다는 느낌을 얻는다는 말은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낸다는 뜻이다. 매일의 먼지에 파묻힌 좋음에 대한 감각을 잘 깨우면 마무리할 즈음에는 하고 싶은 일이 생긴다. 쓰고 싶은 글이 떠오른다. 사람들과 어떻게 지내고 싶은지에 대해 마모된 감정이 생기를 얻는다. 해 질 녘 강가에 서 있다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걷다가, 불꽃놀이를 보다가, 소풍 가는 아이들을 보다가, 식사를 하다가 갑자기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머릿속에 소화가 잘 된 듯 개운한 느낌이 들어차고, 뭐든 할 수 있을 듯한 건강한 희망이 생긴다.”
_이다혜 기자, 《여행의 말들》 중에서
💡얼마 전 도서관 독서모임에서 여행 대신 미술관을 찾는다는 제 얘기를 듣고 회원 한분이 더 좋은 팁을 알려주셨는데요. 레터를 읽고 있을 독자님들 중에도 분명 과거 저처럼 회사가기 힘들고 도무지 적응이 안되는 분들이 계실 수 있을 테니 회사 수명을 조금 더 연장하면서도 나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아주 주관적으로 공유해볼게요.
- 회사가기 힘든 날 연차를 낸다. (연차가 어렵다면 오후 반차)
- 한 시간 거리 내에 있는 미술관에 간다.
- 전시를 다 보고 굿즈숍에서 엽서를 2장 산다.
- 한 장은 나에게, 다른 한 장은 친한 친구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다.
전시 보며 좋았던 감정을 또 다시 출근하느라 힘들고 지칠 미래의 나에게 전하고, 소중한 친구에게 전하는 시간으로 회복하는 방법이라고 하시더라고요. 방법을 알려준 모임 회원분은 자신도 이런 방식으로 힘든 회사 생활을 버티고 지나왔다고 얘기하셨어요. 아마 계속 하기는 어려울 수 있겠지만 한번쯤 시도해보고 싶어져요.
💌📚[산책추천] 이 삶을 계속 여행해보고 싶어졌다, 무정형으로
《무정형의 삶》은 김민철 작가가 카피라이터로 20년간 일한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생 때부터 줄곧 한결같이 사랑해온 파리에 두 달 간 머물면서 쓴 산문집이에요. 사실 직장인의 삶에 마침표를 찍고 파리로 떠난 이야기에 대체 무엇이 더 있을까 싶었어요. 그래서 저는 작가님의 전작을 모두 읽고 몇 번이나 밑줄 긋고도 이 책에는 눈길을 주지도 않았었답니다. 그러다 격주 참여하고 있는 도서관 독서모임 도서로 선정돼 펼쳐들게 되었어요.펼치자마자 알았죠. 이 책은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요. 파리를 통해 일상의 ‘설렘’과 삶에 대한 ‘용기’를 샘솟게 해주거든요.
나는 수시로 파리로 도망쳤다. 그건 아주 쉬웠다. 휴대폰만 켜면 되는 일이었다. 광고주 미팅을 마치고 나와 속상한 마음이 몰려오면, 언제 결단을 해야 하나 골똘해지면, 나는 휴대폰을 켜서 파리 숙소를 검색하고, 그 안에 몸을 숨겼다. 파리의 지붕들이 내려다보이는 부엌에서 치즈를 썰기도 했고, 침대 위의 햇빛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했다. 샤워 커튼이 몸에 달라붙어서 기겁을 하기도 했고, 널찍한 소파에 축 늘어져서 누워 있기도 했다. 오래된 나무 바닥을 삐거덕대며 걸어보기도 했다가, 기울어진 창문 너머의 풍경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거기에 있는 나를 상상했다. 어떤 집에서든 책상이 있으면 무조건 앉아보았다. 두 달 동안 이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며 살면 어떨까, 새벽에 일어나 어슴푸레한 빛으로 캄캄한 기분을 밀어내며 글을 쓰는 건 어떤 기분일까. 출근 시간이 다 되어 억지로 끝낼 필요가 없다면 나는 어떤 글을 쓰게 될까. 누구와도 말하지 않고 하루를 보낸 후 집에 돌아와 쓰는 글은 어떤 모양일까. 상상의 끝엔 언제나 사진 속 책상에 앉아 글을 썼다.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삶을 미리 살아보고 있었다.
_김민철 파리 산문집, 《무정형의 삶》 중에서
회사를 그만두고 작가가 파리에서 한 일은 누군가 보기에는 아주 소박합니다. 매일 숙소 근처 공원을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에 갓 구운 빵을 사는 것. 예쁜 카페 혹은 골목의 한적한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그림을 그리는 것. 한꺼번에 여러 개의 치즈를 사서 아낌없이 먹거나 매일 다른 미술관에 가는 것 같은 것이죠. 그렇습니다. 이런 것은 파리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래서 저는 작가님이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게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뜻대로 되지 않는 일상에서 우리가 각자 좋아하는 것, 좋아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잘 간직한 채 살고 있는지를 묻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해요. 그것이 어느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행복을 보장해주니까요. 또 MBTI 'J'형 인간이자 투두리스트를 지우면서 일하는 무척이나 정형의 삶을 살았던 작가가 무정형의 여행을 한 끝에 깨달은 바를 애정을 담아 전하고 싶었을 거라고요. 그것은 불안해보이는 무정형의 삶조차도 결국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빛나게 빚어갈 수 있으니 힘껏 용기내서 오늘을 살아보라고요. 그렇게 전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느꼈어요.
그 말을 건네기 위해 작가는 기꺼이 파리에서 지낸 두 달 간 자신의 삶을 생생하고 따뜻하게 전해주는 방식을 택했을 테지요.
6월의 숙소가 별로였어도 나는 나를 그다지 책망하진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든 여기에서 내게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아냈을 것이다. 나의 몇 안 되는 재능 중 최고의 재능이 바로 이것이다. 언제나 내가 가진 것이 최고의 패라고 생각하고, 내가 한 선택이 최고의 선택이라고 믿기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 그 선택이 실패로 결론 난다면, 거기서 내가 또 뭔가를 배웠을 테니 괜찮다고 다독인다. 다음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테니 얼마나 다행인가, 라며 스스로를 기죽이지 않는다. 나에게 최선은 지금,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에도 없다.
_김민철 파리 산문집, 《무정형의 삶》 중에서
무엇을 했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대답은 쉽다. 하루는 크루아상을 먹었고 벵센느 숲을 갔죠. 또 하루는 공연장까지 걷다가 신기한 마을을 발견했어요. 하루는 한 문장 안에 간편하게 요약된다. 하지만 그렇게 요약 가능하지 않다는 걸 나는 안다. 나만의 작고도 사소한 모험이 있었고, 그 모험 끝에 나는 요상하게 생긴 나의 보물을 꼭 쥐고 돌아왔다. 객관적으로 예쁘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시장에서는 전혀 값이 안 나간다고 평가받을지는 몰라도,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신비로운 빛이 있었다. 그 빛이 나의 하루를 찬찬히 비추는 걸 보노라면, 그 빛 아래에서 드러난 새로운 나의 모양이 나는 참 반가웠다.
참 오래 걸렸지. 이 모양의 나를 만나기까지.
참 만나고 싶었지. 이토록 낯선 나를._김민철 파리 산문집, 《무정형의 삶》 중에서
짐작조차 하지 못한 뾰족함을 품고 좁은 길을 온몸으로 밀며 나아가는 삶도 있고, 두려움을 마주하고 자신의 세계를 지키는 삶도 있다. 누군가가 만들어준 안전한 울타리가 없어도, 스스로 하고 싶은 일들을 울타리로 세우며 살아가는 삶도 있다. 이런 용기를, 저런 대범함을, 이상한 긍정을 파리에서 만났다.
파리에서 나를 만난 사람들이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좋아해버리는 것은 참 귀한 능력이라고. 오래전 분명 자신도 가지고 있었지만, 어느새 잃어버린 그 마음을 오랜만에 다시 찾은 기분이라고. 좋아하는 마음은, 이토록이나 전염성이 강하다.
부디 이 마음이 당신에게도 전염되길.
그리하여 멀지 않은 어느 날
부디 당신도 당신의 그곳에 도착할 수 있길_김민철 파리 산문집, 《무정형의 삶》 중에서
파리를 가본 적 있거나 가보고 싶은 사람이 읽어도 좋겠지만, 파리가 아니어도 자신만의 삶을 잘 가꾸고 빚어가고 싶은 사람, 일상의 설렘을 되찾고 싶은 사람이 읽는다면 좋을 것 같아요. 안 좋은 상황에서조차 좋은 것을 기필코 발견해내는 작가님의 능력과 그것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빚어내는 이야기가 무척 흥미로우니까요.
📌[책방산책]은 오늘 레터 분량 상 쉬어 갑니다.
📌[메일리]를 통해 지난번 레터에 댓글을 남겨주신 '그린마마'님과 '찐빵아빠'님 감사합니다. 레터를 쓸 때마다 공감하는 분이 계실까 약간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발행 버튼을 누르곤 하는데요. 남겨주신 글에 힘입어 더 열심히 써볼 용기를 얻었답니다. 😊🙏
✅이번 주 일류여성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만족스럽거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자유롭게 남겨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이 더 깊고 나아진 일류여성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