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는 늘 가기 싫었다. 왜? 회사니까. 10년차쯤 됐을 무렵, 아니 그전부터 회사 가는 길은 늘 마음이 험했다. 사실 가는 길도 멀었다. 왕복 3시간 거리에 시작도 전에 답답해지는 기분이랄까? 그랬던 내게 인상깊었던 여행지가 어디가 있었을까? 막상 정해진 글감을 두고 기억들을 소환해도 이렇다할 답을 찾지 못했다. 늘 일하기는 싫었고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휴가지를 고심해서 선택할 때도 있었지만, 일 때문에 취소하기도 했고, 휴가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휴가를 쓰지 않으면 팀 평가에 좋지 않다는 이야기에 연차를 빨리 소진하라고 종용하는 탓에 급하게 휴가를 떠난 적도 더러 있었다. 그리고 사실 특별했던 여행지는 이미 다 레터에서 언급했던 것 같다.
그렇게 과거 여행지 속에서 헤매다가 퇴사 무렵 틈을 쪼개 혼자서 시간을 보내던 순간들이 어쩌면 짧은 여행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말도 안된다고 반박해도 어쩔 수가 없다.) 과거의 난 일에서 벗어나고 싶어 일찍 출근을 했다. 월요병을 치료하려면 일요일에 출근하면 된다는 궤변 같지만 그때 나는 그랬다. 출근시간보다 30~40분쯤 일찍 회사 근처에 도착해 7시부터 문을 여는 스타벅스에 갔다. 그 시간대에 문을 여는, 게다가 회사와 동선에서 최적인 카페는 그 곳 밖에 없었다.
출근시간인 8시가 가까워지면 스타벅스 매장에도 아는 얼굴이 하나 둘 보이긴 했지만 오픈 시간쯤 도착하면 손님 자체가 별로 없었다. 그 앞에서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김이 펄펄 나는 커피가 식기를 기다리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때로는 김하나 작가의 신간이나 김신지 작가의 신간을 한 챕터씩 아껴가며 읽었고 마음에 드는 구절이 나올 때마다 책 한 귀퉁이를 접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일종의 리추얼이었다. 그렇게 나만의 시간을 잠시 보내고 나면 그래도 회사에 들어갈 용기?가 생겼다.
또 어떤 날은 평소보다 이삼천원 비싼 스페셜티 커피를 주문하기도 했다. 회사 근처에 있던 스타벅스가 감사하게도! 리저브 매장이라 나름의 소소한 사치가 가능했다. 리저브 코너에 앉아 메뉴 설명을 보고 마음에 드는 커피를 주문한다. 그러면 작은 바크 초콜릿과 함께 커피가 나오며, 원두 설명서도 받게 된다. 초콜릿은 오후의 나를 위해 남겨 두고 원두 설명서는 커피 향을 맡으며 천천히 읽어보다가 당시 가지고 있던 책의 책갈피로 쓰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게 잠시나마 회사 밖에 있다는 감각을 깨웠던 것이 아닐까, 그것도 여행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내가 일에만 파묻혀 살지 않는다는 감각, 내 시간을 오롯이 나만을 위해 쓴다는 감각 나아가 주체적으로 살고 있다는 착각일지라도 모르는 그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 출근 전에 루틴처럼 카페에 들렀다. 익숙한 공간과 환경에서 잠시 벗어나 나를 환기시키는 것이 직장인 시절 내가 꿈꾸던 여행이었으니까.
한번은 사무실로 대표가 찾아와 팀 사람들을 앉혀놓고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인사치레처럼 요즘은 무얼 하고 싶냐는 질문을 모두에게 했고, 나는 ‘휴가가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휴가 가고 싶은 사람이 지금 팀에서 일이 제일 많은 사람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웃지 말고 휴가 갈 상황을 만들어주시지 ㅎㅎ) 그래서 회사를 나와 이렇게 기~인 휴가를 쓰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돌고 돌아 3년 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지난주부터 출근을 하게 됐다.(다소 급한 전개ㅎㅎ) 출근지는 레터에서도 자주 언급했던, 지난해 최애 장소인 우리동네 수목원. 10개월의 짧은 기간제 업무지만 식물 이력을 모니터링하고 홍보 업무도 할 수 있어 그동안 기웃거렸던 시간들이 의미 있게 쓰일 수 있을 것 같아 지원하게 됐다. (지난번 레터에서 공들여 자소서를 썼다는 곳이 여기였습니다 ㅎㅎ)
그리고 이제 근무한지 2주차에 접어들었다. 아직 업무에 대해 이렇다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출근 후 매일 해야 하는 일은 수목원을 한 바퀴 도는 것. 수목원을 돌며 꽃들의 개화 상태를 확인하고, 푯말 정비가 필요한 곳을 살펴야 한다. 수목원에 스타벅스는 없지만 커피를 대신해 멍을 때릴 수 있는 나무가 있고 새가 있고, 겨울임에도 푸른 풍경을 보여주는 온실이 있다.
4만4천평이 넘는 수목원을 다 돌아보지 못해도 이곳저곳 살피며 돌다 보면 어느 새 두시간은 훌쩍 넘게 된다. 그래도 업무를 핑계로 아직 방문객이 많지 않은 시간 고요한 숲으로 잠시 여행을 떠나는 것 같다. 거기에 약간의 업무를 곁들인. 물론 이제 2주차라 이렇게 낭만에 젖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도 당분간은 이 낭만에 젖어 지내볼 예정이다. 내겐 10개월이라는 예정된 짧은 근무기간 밖에 없으니.
아무튼! 누군가 여행지를 묻는다면 시시한 대답일 수 있겠지만, 회사사람이 덜 보이는 숨을 수 있는 카페(시간대)를 찾으라고 말하고 싶다. 여행은 생각보다 쉽지 않지만 현타는 생각보다 자주 오니까 ㅎㅎ 행복은 강도보다 빈도라고 했으니까 여행 또한 강도보다 빈도가 중요하지 않을까? 물론 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멀리멀리 일에서 멀어진다면 더 큰 행복, 대유잼 시간을 가져다 줄 테지만 말이다. 그런 멋진 여행지는 다음 차례의 두 에디터들에게 넘겨본다 ㅎㅎ
<코너 속 코너> 계절산보🚶 겨울에 피는 꽃🌸
“다른 수목원에 복수초가 피었다고 하는데, 우리도 복수초 피었는지 보려고요.” 다소 들뜬 주무관의 말에 복수초가 뭐길래 저러지 하는 마음으로 같이 따라 나섰다. 우리 수목원에는 아직 개화 전이었지만, 복수초가 무엇인지 궁금한 마음에 검색을 했다. 그랬더니 기사가 나왔다. 복수꽃이 피었다고 무려 기사가.
정말 꽃이 피었다고 기사가 난다고? 이렇게 낭만적인 언론이었던가? 아니면 내가 무지했던 것일까? 그 주인공은 얼음을 뚫고 꽃이 핀다는 복수초다. 일본이 원산지로 복수초라는 이름도 일본에서 유래됐는데 복을 뜻하는 복 福자에 장수를 뜻하는 수壽자를 쓴다고 한다. 한해 복을 주는 꽃, 설날을 의미한다고. 이름보다 신기한 것은 그 특징 때문이다. 눈을 뚫고 꽃을 피울 수 있던 이유는 꽃잎의 독특한 모양 때문이다. 꽃 가운데가 오목하게 생겨 빛을 모은다고. 그렇게 빛을 모아 꽃 자체의 온도를 높여 눈을 녹이고, 수분을 위해 곤충도 유인한다.
이렇게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겨울에 꽃을 피우는 이유는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함이라고 한다. 복수초는 꽤나 작고 땅에 바짝 붙어 피는 식물인데, 복수초보다 키 큰 식물들이 성장을 시작하는 봄, 여름이 되면 광합성 경쟁에서 밀리게 된다. 그래서 다른 식물들이 성장을 멈춘 시기에 잎보다도 먼저 꽃을 피운다. 알면 알수록 놀라운 식물 세계다.
복수초와 함께 봄의 시작을 여는 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풍년화. 복수초는 아쉬웠지만 풍년화는 피었다는 소식에 개화사진을 찍으러 해당 정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무리 샅샅이 뒤져봐도 꽃은 눈앞에 보이질 않았다. 전화로 물어 물어 위치를 확인하니 ‘하~ 이곳이 맞나?’ 하는 물음만 되풀이 될 뿐. 그때 눈앞에 거짓말처럼 포착된 작은 꽃망울. 크게 확대된 사진으로만 봤지 실제 크기는 엄지 손톱만 했다. 칼로 연필을 깎을 때 벗겨지던 껍질처럼 혹은 얇은 종이를 말아 올린 것처럼 다소 생소한 모양의 꽃잎을 선보였다.
일단 정신없이 풍년화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풍년화 꽃이 많이 피면 그 해에는 풍년이 들 것이라 해서 풍년화라고 하는데, 진짜인지는 아직 모르겠고, 무채색의 겨울 풍경 속에서 홀로 노오란 자태를 뽐내며 꽃을 피워냈다는 사실이 일단 대견하다. 물론 풍년화도 나도 각자의 일을 하는 것이겠지만.
수목원에서 꽃소식을 듣고 주변에 전파하니 지금의 추위도 곧 물러가고 봄이 오겠구나, 봄이 오면 꽃들도 나도 바쁘겠구나 싶다. 올 봄엔 여기저기 꽃이 피었다고 널리널리 자랑하고 다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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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마마
아직 추운 겨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정말 봄이 어느새 찾아오고 있네요! 봄소식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이른 봄 개화한 봄꽃들을 만나러 이번주는 좀 더 자주 산책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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