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자

[추천 여행지& 제3회 일류여성 워크숍] 당신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곳

누구를 향하든 당신만의 사랑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곳

2025.02.28 | 조회 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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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여성

세 여자가 전하는 '일'에 관한 모든 이야기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오늘은 저만의 ‘일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도움이 된 여행지’를 추천하기로 약속을 했는데요. 말하고 싶은 것들을 엮다 보니 조금 무거운 이야기가 섞일 듯 싶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코너에 세 명의 에디터가 함께 한 제 3회 일류여성 워크숍 이야기도 실려 있으니 작은 기대감을 가지고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주제가 ‘일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도움이 된 여행지’인 만큼 아마 이번 순서에 내가 쓰려는 이야기가 ‘홍콩’일 것이라고 이미 짐작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난 레터에서 2월 말~3월 초에 또 인피니트 15주년 홍콩 공연을 갈 거라고 예고를 해두었으니 말이다. 역시 홍콩은 2월 내내 정신없이 편집하고도 외주 디자이너와의 소통 부족으로 인쇄 사고를 낼 뻔하고(다행히 문제 없이 수습되었다) 간신히 마감한 신간과, 약속한 날짜에 받지 못한 원고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새로 편집할 책들 사이에서도 내가 회사를 그만두지 못하는 훌륭한 핑계가 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게 홍콩과 마카오는 사실 다른 의미가 있는 여행지다. 그간의 레터에서 밝힌 적이 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홍콩과 마카오는 엄마와 내가 처음으로 함께 간 해외 여행지였다. 내가 스무살에 엄마가 암에 걸렸단 사실을 알았다. 나는 재수중이었고 조직에 매이지 않은 K-장녀에게는 본래 집안 대소사에 대한 임무가 주어지기 마련이므로 엄마의 투병 생활을 간호하는 것은 내 몫이었다. 그게 하기 싫었다거나 억울하다는 건 아닌데, 주변 모든 이가 엄마와 나를 두고 따로 즐거웠다. 엄마의 투병은 8년쯤 지속되었고 그래서 우리는 단둘이 8년간 사선을 넘나들었다.

너무 다행스럽게도 어쨌든 엄마는 체력이 많이 부족하지만 어느 정도 보통의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때 그런 상상을 했다. 우리 엄마 이대로 죽으면 내가 화병으로 곧 따라갈까봐 살려주신 건가? 그럼 나중에 언젠가 엄마가 다시 아프더라도 우리끼리 즐거웠던 시간을 많이 만들어야겠다. 모두가 우리를 두고 따로 행복했으니 우리 둘이 따로 세상 재밌게 놀아 봐야겠다 다짐했다.

그때부터 좀, 돈을 버는 일은 그 해의 엄마와 나의 여행 경비를 버는 일처럼 생각했다. 처음엔 엄마 체력을 생각해 국내로 다녔다. 제주도, 아산, 부산, 제천, 공주, 전주 … 대체로 기차로 다닐 수 있는 곳들. 그쯤 되자 연휴가 생기면 엄마는 자연스럽게 여행을 기대했다. 이쯤 되면 해외로 나가도 될 것 같았다. 일본은 엄마가 다녀온 적이 있으니 패스. 음식과 비행 시간이 적당한 곳을 찾자니 그게 홍콩과 마카오였다. 홍콩에서 딤섬 종류별로 골라 먹고, 엄마 진주 목걸이도 하나 사드렸다. 결혼 30주년 기념으로 진주 선물을 많이 한다고 들어서 몇달치 비상금으로 빼놓는 돈 꼬깃꼬깃 모았던 것 같다. 2층 버스도 타보고(그땐 한국에 2층 버스 없었다.) 뭐 암튼 관광객들이 하는 거 거의 다 해봤다.

더 즐거웠던 건 마카오였는데, 랜드마크인 성바울 성당, 성 도미니크 성당은 물론이고 한국 천주교인 필수 코스인 성 안토니오 성당, 카모에스 공원 둘러보고(김대건 신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아무리 예전엔 다 그렇게 살았다 해도 대체 한국에서 마카오까지 짚신 신고 어떻게 걸어서 유학을 온 걸까 상상하며 수다도 실컷 떨었다.) 택시 타고 멀리멀리 펜하성당도 들렀다. 마카오는 좀 남들 다 가지 않는 코스로 많이 돌아다니고 실컷 먹고 그랬다.

그 여행 내내 참 즐거웠는데 나중에 이야기해 보니 엄마와 나는 좀 다른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엄마가 그 긴 투병 생활을 끝내고 드디어 해외까지 나올 만큼은 건강해졌다는 사실, 그리고 나의 첫 해외 여행을 엄마와 함께 할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라는 감정에 푹 빠져 있었다. 반면 엄마는 본인의 자식이 커서 본인을 데리고 해외까지 나올 수 있을 만큼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이 뿌듯하면서도 미안했다고 했다. 그 시간이 오기까지 혼자 많은 몫을 지게 해서.

그런데 나는 진짜 그런 게 상관 없었다. 그냥 엄마가 살아서 나랑 같이 여행을 할 수 있어서 그 이전에 있었던 일들은 다 괜찮은 일이 됐다. 엄마가 내게 미안했던 마음도 내가 엄마랑 여행하려고 돈을 벌었던 마음도 그냥 다 사랑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생각한다. 이후로도 더 많은 여행을 다녔고 장소만으로는 더 좋은 곳도 다녔지만, 그리고 사실 엄마가 더 즐겁게 기억하는 여행은 다른 곳이지만 내게 홍콩과 마카오는 내가 처음으로 엄마의 세상을 조금 더 넓혀주겠다고 다짐했던 곳이어서 오래도록 좋았다. 다시 ‘삶’이 시작된 공간 같은 의미다.

그런데 곧 공연을 하게 될 홍콩이 나의 최애에게는 어떤 의미가 될까? 15주년 해외 투어의 마지막 도시이기만 했던 곳이, 누나를 잃고 처음 하는 공연의 도시가 되었다. 최애의 누나는 지난 22일 오전에 세상을 떠났다. 21일 쿠알라룸프르 공연을 위해 출국 수속까지 마쳤던 나의 최애가 현지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글이 SNS를 떠돌아 서류에 문제가 생긴 것인가 했는데 새벽에 공지가 올라왔다. 급작스러운 개인 사정으로 이번 공연을 불참한다고, 너른 양해를 부탁한다고.

사실 올 초 나의 새해희망뉴스로 이상의 ‘오감도’같은 제목으로 최애와 최애가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건강과 행복을 빌었던 건 나의 최애가 누나의 투병 이후로 모두에게 “건강하세요.”를 꼭 말하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건강해지기를,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의 팬들이 진심으로 건강하기를 바라는 그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공지를 맞닥뜨린 순간, 모두가 아무도 입밖으로 내지 않았으나 혹시나 하고 걱정했다. 최애의 누나는 대략 2023년부터 투병중이었고, 최애가 종종 누나가 열심히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고 다 좋아질 거라고 메신저 앱에서 말하곤 했었기에. 출국 수속을 마쳤다는 건 본인 건강 문제가 아니고 15년간 활동해 온 그의 성격상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공연을 불참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리고 22일 오전, 누나가 영면에 드셨다고.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각 사실 나의 최애는 누나의 장례를 치르고 있다.

돈독한 남매였다. 가수가 되는 걸 반대하는 부모님 대신 혼자 서울 올라가 알바하고 보컬 학원 다니며 꿈을 찾는 동생에게 자기 퇴직금을 빼 주던 누나. 겨우 다섯 살 차이 나면서 동생을 ‘아들’이라고 부르던 누나. 더 어릴 때는 만화방에 데리고 다니며 나란히 앉아 같이 만화 캐릭터 그림을 그리고, 함께 만화책을 보던 누나. 최애가 좋아하는 음악들을 처음 소개해 주던 누나. 그래서 팬들에게도 우리 누나는 세상에서 제일 멋진 사람이라고 말하던 나의 최애. 누나가 하고 싶다는 것은 뭐든 해주고 싶다던, 누나를 닮은 조카를 너무너무 사랑하는 그.

그녀의 부고는 내게도 오랜 감정의 동요를 남겼다. 단순히 그녀가 내 또래여서 느끼는 감정은 아니고, 15년 동안 그가 조금씩 들려준 이야기들과 공연장에서 마주쳤던 얼굴, 자주 들려주고 보여주던 그의 조카를 보며 느꼈던 내적 친밀감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누군가를 오래 좋아한다는 건, 그의 주변까지도 사랑하게 된다는 말일지 모르겠다.

내가 괴로운 모든 시간 속에서 그는 그의 음악으로 나를 위로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했는데 막상 이런 순간에 멀리 있는 팬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사실이 아티스트와 팬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다. 그제야 혼자 힘들어 했을 내게 미안했다는 엄마의 마음이 아주 어렴풋하게 짐작하게 되기도 한다.

아마 우리는 홍콩에서 슬픔을 간직하고 있지만 드러내지 않을 아티스트로, 그리고 위로할 수 없어 미안한 팬으로 만나게 될 거다. 그러나 그 마음까지도 서로가 서로를 응원하고 사랑하는 마음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어느 공간이든 서로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곳이 지금 벌어진 모든 일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고 싶을 때 도움이 되는 여행지이지 않을까?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의 대사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나의 최애에게 위로를 보낸다.

심장마비로 때 이르게 사망한 아빠를 두고 어린 딸이 말하는 내용인데, 부디 나의 최애도 최애의 조카도 마지막에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이제 아빠가 없는 건 슬프지만 전 공룡을 알아요. 헬렌 이모도 알죠? 아빠가 함께 있다는 것도요? 그리고 공룡이 지금도 우리 곁에 있다는 것도 알죠? 사람들은 공룡이 전부 멸종한 줄 알아요. 대부분 멸종하긴 했죠. 하지만 몇몇은 살아남아서 닭으로 진화했어요. 닭이 공룡이에요. 맞죠? 전 아빠의 닭이에요. 오빠들과 벡스, 아이작도 마찬가지죠. 아빠는 떠났지만 아빠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요.”

-스위트 매그놀리아 시즌 4, 4화 중에서 

 

[제3회 일류여성 워크숍] 비슷한 고민 속에서도 결국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

구독자님의 애정이 느껴지시나요? 덕분에 아주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구독자님의 애정이 느껴지시나요? 덕분에 아주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부유하는 유부님을 통해 커피와 케이크로 응원을 보내주신 구독자님 덕분에 빨강머리 앤을 오마주한 카페 에이닐에서 제3회 일류여성 워크숍이 열렸습니다. 실수해도 괜찮다는 의미를 담은 카페에서 ‘진통제 케이크’와 커피, 실수 코디얼과 프렌치 하트 와플, 실수 쿠키까지 야무지게 챙겨 먹으며 4시간에 가까운 토론을 벌였습니다. 

구독자님의 협찬으로 먹은 것들. 덕분에 아주 배불렀습니다. 
구독자님의 협찬으로 먹은 것들. 덕분에 아주 배불렀습니다. 

이번 워크숍은 설까지 모두 지나고 만난 뒤라 빙고 같은 걸 해보진 않았어요. 오히려 1년 반이 넘어가고 있는 일류여성의 방향성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했고요. 이야기를 다 했다 싶어서 노트를 덮었다가도 계속 생각나는 이야기 때문에 두 번이나 다시 노트를 열었다는 사실. 

일상이라는 것이 분명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큰 틀에서 비슷한 일이 반복되는지라 우리 레터가 과연 구독자 분들께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를 각자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선 공유했고요. 계속 일의 아카이브 성격을 띄어도 될까를 두고 함께 고민했습니다. 그렇게 얻은 결론은 결국, 우리의 이런 저런 고민을 오히려 구독자 분들과 함께 공유하고 지혜를 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보자는 것이었어요. 

아직 완전히 공개할 수는 없지만 그와 같은 맥락에서 준비하고 있는 연간 프로젝트가 하나 있고, 올해 2주년에는 계속 쓰고 있는 저희를 북돋을 수 있는 방법도 고민하고 있어요. 그리고 지금처럼 매주 같은 주제로 3명의 에디터가 글을 쓰는 방식을 조금 더 지속하기로 했습니다. 주제 마다 셋 중 누군가는 쓰기 어려워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계속 쓰려고요. 아주 잠깐이라도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순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요. 

늘 어딘가 조금씩 부족한 글이겠지만 올해도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일류여성 드림

빨강머리 앤을 좋아하는 두 에디터(부유하는 유부, 은둔자)와 두 사람 때문에 앤을 읽기로 한 곰자자족이 모였던 에이닐은 이런 분위기의 공간이었습니다. 저희는 애독자님의 협찬을 받았지만 카페로부터는 아무 것도 받지 않았습니다?! :) 오로지 내돈내산이었어요. 
빨강머리 앤을 좋아하는 두 에디터(부유하는 유부, 은둔자)와 두 사람 때문에 앤을 읽기로 한 곰자자족이 모였던 에이닐은 이런 분위기의 공간이었습니다. 저희는 애독자님의 협찬을 받았지만 카페로부터는 아무 것도 받지 않았습니다?! :) 오로지 내돈내산이었어요. 
앤의 집처럼 꾸몄다기보다는 당시의 가정집 분위기가 드러나게 꾸며진 것 같아요. 
앤의 집처럼 꾸몄다기보다는 당시의 가정집 분위기가 드러나게 꾸며진 것 같아요. 
세 사람이 맛있게 먹은 메뉴에도 앤의 스토리가 녹아있어요. 
세 사람이 맛있게 먹은 메뉴에도 앤의 스토리가 녹아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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