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종이에 나무를 심고 있다. 조경 설계 도면을 그리며, 조경기능사 실기 시험을 준비 중이다. 조경 일을 하겠다고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알고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느슨한 마음으로 가볍게 시작했다. 얼마나 느슨한 마음이냐면, 지난해 필기 시험을 본 뒤 딱 1년 만에 실기 준비에 나섰다. 사실 실기 시험이라고 해서 나무나 잔디 심는 것을 생각했는데, 일단 조경 설계 도면을 그리는 1차 실기부터 통과해야 나무 식재가 포함된 조경 실무를 2차 실기로 볼 수 있는 구조였다. 그리고 놀라운 점은 2023년 현재, 이 도면은 무려 손으로 그려야 한다. 물론 현장에서는 캐드를 사용한다지만, 조경기능사 수험생의 평균 나이(50대)를 고려해 컴퓨터로 제도 시험 보는 것을 유예했다고 한다.
지난달, 실기는 도면부터 실무까지 준비할 게 많아 국비지원학원을 등록했다. 시험 통과만을 위한 수업 답게 합격 비결 위주로 강의가 진행되고, 교실 앞 ‘참기능인 육성’이라고 쓰인 액자가 이를 강하게 확인 시켜줬다. 총 17명인 우리 반에는 인생의 2회차, 3회차를 준비하는 열정의 선배님들 대다수다. ‘이것까지 꼭 그려야 합니까?’, ‘문제를 왜 이렇게 어렵게 냅니까?’하는 질문을 선생님께 주저 없이 건넬 때면 정신이 아득해 지지만, 수업 시간마다 사소한 질문에 답하며 도와주는 20대 짝꿍에게 찐 감자를 쓱 건네는 걸 보면 또, 역시 노련한 선배님들이다.
수업의 장면들을 떠올릴 때면 피식 피식 웃음이 나지만, 동시에 수업에서 세상의 원리를 하나 둘 발견해가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놀이터의 미끄럼틀이나 그네는 타는 도중 눈이 부실 수 있으니 남북 방향으로 위치 시키는 것이 좋고, 놀이터 주변에는 냄새 나거나 가시가 많은 나무는 심지 않는다. 대신 아이들이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도록 꽃나무를 심거나 그늘에서 쉴 수 있도록 활엽수를 심어 준다. 또 놀이기구는 외곽으로 비치해 놀이터 중앙에는 아이들이 뛰어 놀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좋다. 휴식 공간도 마찬가지다. 그늘을 만드는 커다란 활엽수를 외곽으로 심어주고 공원 안쪽 방향으로는 시야를 가리지 않게 높이 1미터 정도의 작은 관목들을 심어 공간 구분을 해주는 것이 좋다. (물론 실제 공원과 놀이터는 좀 더 다양한 상황에 맞춰 설계할 것이다.)
주변의 공원과 놀이터 속 숨은 원리를 찾아낸 느낌. 더불어 그 공간을 잘 즐겨주길 바라는 설계자의 마음까지도 느껴지는 것 같아, 그 발견만으로 즐겁다. 비록 나무와 삽 대신 자와 샤프를 장비 삼아 나무를 식재하고, 놀이기구를 배치하지만 이 나무가 어떤 그늘과 풍경을 만들지, 아이들이 어떻게 뛰어놀 수 있을지를 상상하면 웃음이 난다. 비록 현실은 100점 만점에 60점을 넘길 수 있는 평면도와 단면도를 150분 안에 그려내는 연습을 하는 것일지라도. 길거리에 심겨 진 나무들은 저마다의 목적과 이유로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지금은 큰 뜻 없이 그려가는 이 도면도 하나씩 추가 되는 조경 상식들도 나의 미래에 점 하나, 선 하나로 연결되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진정 무용한 듯 유익한, 즐거운 배움이다. 아무튼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오늘도 제도판에 종이를 올리고 야무지게 마스킹 테이프를 붙여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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