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고슬비

07. 일하러 가는 것 보다 놀러 가는 게 더 힘들다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천고슬비입니다. 저는 지금 남프랑스와 밀라노를 거쳐 스위스에 있습니다. 4년 만에 긴 휴가를 보내고 있는 중이지요. 준비 없이 온 덕에 별것 하지 않고 하루 하루 보내고 있는데 벌써 2주나 흘렀네요. 살다보니 이런일이 있구나 싶게 좋다가도 듬성듬성 들려오는 회사 소식에 그저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아요. 이제 곧 휴가지에서 느끼게 될 그 감정 조금 일찍 나눠보아요.

2023.06.16 | 조회 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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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여성

세 여자가 전하는 '일'에 관한 모든 이야기

나는 4년 째 5주에 한 번 여행을 떠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코로나가 딱 시작되던 그 겨울, 주변 사람들은 이 시국에 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만나느냐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실은 깨끗한 시골마을에 내가 바이러스를 몰고 들어가는 게 문제지 그 기간 동안 합법적(?)으로 마음껏 돌아다니며 여행을 지속할 수 있었던 건 엄청난 행운이었다. 

그런데 사람이라는 것이 얼마나 간사한 족속인지 그런 고마운 마음은 그리 길게 가지 않았다. 5주를 꽉 채워 일하고 끝나자마자 다시 반복되는 일정을 쳐 내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체력적으로 지치니 마음이 쉽게 무너지고, 벗어나고 싶은 감정이 불쑥불쑥 치밀어 올랐다. 번아웃. 말로만 듣던 그 단어가 내게도 찾아왔다. 사장님 방문을 두드렸다. “휴가 좀 주세요.” 이유도 묻지 않고 사장님은 5주의 휴가를 주셨다.

휴가를 떠나기 전 마지막 촬영. 일정을 한창 이야기 하던 중 “피디님 저희 방송은 6월 첫 주예요. 5월 마지막 주가 아니에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날짜를 착각했고 한 주를 당겨서 비행기 티켓팅을 해버렸다. 촬영지로 내려가는 고속도로 한 가운데에서 그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하루이틀 정도 일정을 당겨서 하면 다른 사람 손을 빌리지 않고 일을 다 끝내고 갈 수 있다는게 더 웃겼다. “내 일은 내가, 남의 일도 내가” 일생을 그렇게 살았는데 이런 실수를 했다고 내 일을 남에게 떠맡기는 행운(?)이 올리가 없었다. 놀러 가는 주제에 그런 실수 한 걸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일단 한숨을 돌리고 일정을 시작했다.

그 어느때 보다 열심히 잘 해내고 싶었다. 마음이 들떠서 대충 했다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방송이 온에어 되기 전에 이미 나는 비행기를 타야 하는 상황.  전체 과정 중에 어디에도 실수는 있어서는 안됐다. 

공항으로 출발하기 10시간 전. 모든 작업을 마치고 짐도 다 쌌다. 방금 전까지 작업실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나는 왜 출국장에 서 있는건지. 홀가분하지 않은 마음으로 일단 떠났다.파일은 잘 넘겼다고 하고 방송도 잘 나갔다고 하고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시. 청. 률

여행 4일차 아침. 니스의 에어비앤비. 지저귀는 새 소리를 들으면서 눈을 뜰 수 있는 그 행복했던 순간에 나는 휴대폰을 켜고 시청률을 확인했다. 잘못 본 줄 알았다. 아. 이럴수가 있나. 폭망이었다. 내 주식창도 이렇게 고꾸라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럴일인가. 5월 내내 주말마다 연휴였어서 다들 놀만큼 놀았을텐데 굳이굳이 이번주도 밖으로 밖으로 나갔던 것일까. 지난 주에 비가 와서 못 놀았던 사람들이 다 나가 버린 것일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이전주보다 그렇게나 숫자가 확 떨어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시청률이라는 것이 아주 요물 같은 것이라 열심히 하면 하는 만큼 시청자들은 알아주는 것 같다가도 날씨나 타 방송의 아이템에 따라 너무 영향을 많이 받는지라 테잎을 넘기고 나면 그 때부터는 하늘에 맡기는 것이지 내가 어찌할 수가 없는 것. 그래도 이번 수치는 너무하는 것 같았다.

여느 때와 달리 촬영 내내 날씨가 너무 좋아서 영상이 좋았다. 간만에 아이템도 마음에 들어서 내용도 잘 뽑혔다고 생각했다. 실수 하지 않으려는 마음에 자막이며 음악이며 더 신경써서 넣었고 아주 오랜만에 맘에드는 회차가 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더 기가 막혔다. 노력하는 만큼의 결과를 얻고 싶다는 그 당연한 마음이 이렇게 무너지다니. 하늘도 없다 없어. “나는 할만큼 해놓고 떠났으니 마음껏 즐길게” 하려던 마음은 어디로 보내야 하는 걸까. 남은 여행 내내 떨쳐지지 않고 들러붙어 나와 함께 돌아다닐 서운함. 원망. 그리고 죄스러움.

지중해 바다 한 번 보고 한숨 한 번 쉬고, 피카소 그림 한 번 보고 한숨 한 번 쉬고.여기까지 와서 이럴일인가. 다 던져버리고 쉬겠다고 이 먼 곳까지 와서 왜 이렇게 궁상을 떨고 있나. 다 끝나버린 걸 이제와서 어쩔 수도 없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그런 질척거림과 결벽으로 꾸역꾸역 이 자리를 지키고 살아온 것이었겠지 라고 스스로 위로해볼 뿐이다.)  

후배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일과 삶을 철저히 분리하라. 열심히 한다는 명분 아래 일이 삶의 전부가 되어버리는 순간 일도 삶도 모두 무너진다. 누구에게 충고질인지 모르겠다. “나”나 잘하면 될 것을.  

여행은 상처뿐인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는 시간. 제발 나의 남은 열흘이라도 완벽히 서울의 나와 분리되어 살다가고 싶다. 다 버리고 다 비우고 다시 채울 자리를 넓게 넓게 만들어 놓아야 또 언제 올지 모를 휴가까지 버틸 수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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