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자

31. 걱정 점수는 이번 전형에 반영되지 않습니다

걱정 말고 해야 할 일을 합니다

2023.12.01 | 조회 1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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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여성

세 여자가 전하는 '일'에 관한 모든 이야기

 

구독자님 12월의 첫날을 잘 맞이하고 계신가요? 저는 부유하는 유부님이 잡념 없이 현재에 집중하기 위해 꽃을 만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걱정을 없애는 저만의 주문을 여러분과 함께 공유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번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꼭 제가 외우는 주문이 아니더라도 여러분만의 주문을 만들어보는 계기가 되시길 바라며 이번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팀장님, 바코드가 다 똑같다는데요?”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학년별로 번호 다른 거 확인했거든요.”

아래 숫자는 맞게 들어갔는데 바코드가 다 똑같은 게 들어갔대요!”

인생의 알 수 없는 끌어당김 덕분에 중, 고등 영어 문제집을 만드는 일을 3년이나 했다. 문제집 특성상 반드시 학년별로 책이 나오기 때문에 마지막에 제일 많이 확인하는 게 바코드다. 당시는 스마트폰 사용 초창기였는데 내가 카톡 다음으로 깔았던 어플도 바코드 어플이었을 정도였다.

그 책도 편집 후반부 작업에서 표지 바코드를 확인했고, 무탈하게 인쇄가 되는 듯했다. 그런데 책이 물류 창고로 들어와서 바코드를 찍어보니 1, 2, 3학년 책이 모두 2학년 책으로 찍힌다는 것. 상황을 파악해보니 당시 디자이너가 바코드를 더 선명하고 예쁘게 만져주려고 데이터 마감 직전에 수정하다가 각 학년의 ISBN 파일에 몽땅 똑같은 바코드를 넣어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바코드 아래에 적힌 숫자는 또 학년별로 제대로 들어갔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었다.

상황 파악을 끝낸 팀장님은 일단 바코드 스티커를 출력했다. 어차피 팀이 전부 크로스체크를 한 상황이라 담당자를 문책하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배본일을 늦추는 것이 더 손해라 우리 팀 모두 파주 창고에 가서 잘못 인쇄된 바코드 위에 제대로 출력된 바코드 스티커를 열심히 붙였다. (다행히 책이 배본과 동시에 잘 팔려나가서 회사 차원의 문책은 없었다. 얼굴도 모르지만 그때 책 사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ㅎㅎ)

그 사건 이후로 내게는 바코드 트라우마가 생겼다. 이미 7~8년쯤 된 일인 것 같은데 나는 아직도 책 마감 전이면 표지를 정사이즈로 프린터 출력해서 바코드 어플로 500번은 찍어보는 것 같다. 분위기에 따라 편집자가 인쇄 감리를 가지 않는 회사에 입사하더라도 나는 무조건 따라가서 다시 한번 바코드를 확인한다. 편집 일정이 촉박한 책을 편집할 때는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손을 덜덜 떨면서 찍어보게 된다.

책을 만드는 일은 결국 편집자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확인해야만 하는 일이다. “괜찮을 것 같은데?” 하고 넘어가면 소름끼치게도 반드시 그 포인트에서 사고가 난다. 오죽하면 편집증이란 단어가 생겼겠냐고 편집자들끼리 자조할 정도로, 무언가 할 때는 반복해서 확인하는 방식으로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일상에서도 늘 확인해야만 마음이 편하다. 그럴 수 없으면 걱정이 불안으로 증폭된다. 게다가 이 걱정은 때때로 상상의 나래까지 펼쳐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의 최악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괴롭히기도 한다.

옆에서 오랫동안 내가 일하는 걸 봐 온 내 동생은 이런 나를 좀 불쌍히(?) 여기는 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보고 싶은 공연의 티켓팅에 실패할 걱정으로 빠져들었다. 그러자 동생이 휴대전화 화면을 바라보던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이번 전형에 걱정 점수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걱정 그만하고 때 되면 티켓팅이나 잘 하라는 우스갯소리였는데 그 말이 묘하게 현실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렇지, 만약 걱정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결과를 쥐여준다면 난 분명 어지간한 것들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었을 거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체로 더 많았고, 당연히 세상 모든 일은 걱정 점수를 포함시켜주지 않는다. 알고 있던 사실인데도 동생이 말한 한 문장이 새삼스럽게 나를 깨닫게 했다.

그 뒤로 내가 쓸데없는 고민에 빠질 때마다 주문처럼 저 문장을 외운다. “걱정 점수는 반영되지 않는다. 그러니 그냥 지금 해야 할 일을 할 것.”

대한민국에서 연말이란 대입 시즌이란 소리이고, 그 외의 다른 여러 수험에 도전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또 누구든 시험을 치르는 마음으로 매일을 지나야 하는 상황에 놓인 사람이 있기도 할 것이다. 그들 모두에게 나의 주문이 잠시나마 효력을 발휘하여 불안을 잠재울 수 있기를.

여러분 이번 전형에는 걱정 점수가 반영되지 않습니다.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지금 해야 할 일을 합시다.”

육안으로 바코드가 틀렸는지 구분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 
육안으로 바코드가 틀렸는지 구분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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