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자

63. 물은 빠져 나가도 콩나물은 자란다

하기 싫은 일을 계속 해야 하는 상황을 견디는 법

2024.09.20 | 조회 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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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여성

세 여자가 전하는 '일'에 관한 모든 이야기

 

구독자님 추석은 잘 보내셨나요? 제가 겪어 본 추석 중에 가장 더워서 저희 집은 명절 음식 따위 포기하고 최대한 불을 쓰지 않는 음식들로 끼니를 채우며 조용히 보냈습니다. 마음이 시끄러우니 현실이라도 조용해 준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더라고요. 사실 최근 제 일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지속되다 보니 밝고 즐거운 이야기를 전하지 못하는 게 죄송하더라고요. 그렇지만 이런 시기도 아등바등 어떻게든 견디는 것까지가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조금 무거운 이야기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 내가 일하는 내내 하고 있는 생각은 내가 잘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 레터를 쓰는 내내 몇번이나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문제여서 가능하면 이 주제를 피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러다 보니 오히려 내 일과는 먼, 뜬구름 잡는 이야기들을 하게 되는 것 같아서 그냥 지금의 상황에 대해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얘기하고 있지만, 현재 회사로 이직한 이후로 한 번도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분야의 책을 기획해 본 적이 없다. 잘 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고,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의 책을 만들기 위해 시장과 아이템을 분석한다. 그런데 이게 제대로 분석한 건지도 확신할 수 없다. 단순히 잘 몰라서 그런 게 아니고 사실은 내 마음 속에 계속 ‘하기 싫다, 이걸 내가 왜 해야 할까?’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어서 그럴 거다. 말로는 ‘직장인이 시키면 다하는 거지 별 수 있나’라고 하지만 책상 앞에 앉아서 ‘하기 싫다, 하기 싫다, 격하게 하기 싫다’를 속으로 외치고 있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같은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처음에는 정신력으로, 체력으로 버티던 것들이 모두 고갈된 상태라고나 할까? 나름 숨긴다고 숨겼으나 겉으로도 표가 나는지 요즘 나는 회사에서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모두들 근무 시간에 종종 불러내서 커피를 사먹이고 점심 시간엔 밥을 사준다. 내가 이 회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존재여서 그렇다기 보다는 간신히 서로를 붙들고 현재의 상황을 견디는 상태에서 작더라도 구멍이 나면 안 되기 때문일 거다. 주르르 무너지는 건 한 순간일 테니까. 그정도로 나를 포함한 우리 조직은 그저 이 상황을 견디고 있는 중이다. 

도저히 혼자서는 추슬러지지 않아서 주변인들에게 투정 겸 수다를 떨었는데, 직장인의 삶이란 늘 그런 건지 서로가 각자 자기 상황을 토로하는 집단적 독백상태에 빠졌다. 각자의 먹고사니즘에 사로잡혀 당장 그만두지 못하면서도 쓸데없이 자아가 비대해서 상황을 유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을 한탄하다가 다음 날 출근 시간을 핑계삼아 헤어지곤 했다. 

종종 말한 적이 있지만, 정말 이 나이가 되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을 줄 알았다. 능력을 인정 받아 잘하는 것을 더 잘할 수 있게 노력하는 쪽이든, 마음이 자라 어떤 일이 벌어져도 유연하게 받아들이든 한 쪽 노선을 선택할 줄 알았는데 아직도 이렇게 끙끙거리고 있을 줄이야. 당분간 회사의 노선은 바뀌지 않을 거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나는 이 상황을 계속 견뎌야 하는데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퇴근하던 어느 저녁 오디오북을 들으며 반쯤 졸고 있는 중에 어떤 문장이 들어왔다. 이금희 아나운서의 <<우리 편하게 말해요>> 중 배움에 관한 비유였다. 콩나물 시루에 물을 주면 물이 밑으로 다 빠져 버려서 눈에는 안 보이지만 며칠 후에 보면 콩나물이 쑥 자라 있는 것 처럼 배움도 마찬가지라고. 지금은 해도 해도 아무 소용 없는 것 같아도 자기도 모르는 새에 실력이 늘어난다고.

그래서 요즘은 겨우 겨우 저 문장을 붙잡고 견디는 중이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기분이지만, 이건 모래가 아니라 물일 거라고. 그러니 지금 다 쓸데없는 것 같아도 이 시간이 흘러가면 나는 어떤 면이든 자라나 있을 거라고. 좀 더 당연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든, 좀 더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인정 받고 그 길로 나아가든 분명 지금 고민하는 것보다는 나은 상태가 되어 있지 않을까? 

가끔은 막연한 기대로 현실을 견뎌야 할 때가 있다. 그러다 보면 시간은 흐르고 어떤 형태로든 삶은 달라져 있곤 했다. 그리고 나는 현재 지금이 그렇다. 아마도 이 지루하고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날들이 지나면 훗날의 언젠가 또 재밌게 일할 것이라고 믿는다. 

 

 <코너 속 코너> 덕질은 어떻게 세상을 이롭게 하는가?

요즘은 틈만 나면 기분이 가라앉는 편인데(더운 걸 너무 싫어하는 내게 이번 여름은 너무 가혹한 거다) 유일한 즐거움은 ‘킹키부츠’다. 지난 달에도 소개를 했지만, 정말 흥겨운 극이다. 마지막에 배우와 관객이 함께 ‘raise you up’을 부르며 춤추고 나면 잠시나마 내일을 견딜 힘을 얻는다. 물론 그 노래를 성규가 무대 위에서 부르고 있다는 점 역시 내게 중요한 포인트긴 하지만. 

혹시나 요즘 너무 무기력하고, 인생이 버겁다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raise you up’을 꼭 들어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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