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자

16. 나는 무해한 내 일을 좋아합니다 by 은둔자

누군가를 절대로 망하게 할 수 없는 나의 일

2023.08.18 | 조회 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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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여성

세 여자가 전하는 '일'에 관한 모든 이야기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은둔자'입니다. 저는 제 일에 투덜투덜 불평을 많이 하는 편인데요. 도대체 왜 이 세계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혼자 생각해봤습니다. 스스로 돌아보니 제가 이 일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더라고요. 매일 퇴근하고 싶다, 퇴사하고 싶다 말하곤 해도 종종 자신의 일에서 기쁨을 느끼는 순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구독자님은 자신의 일 중에서 어떤 부분을 좋아하시나요? 오늘은 그 순간 때문에 뿌듯한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처음 출판 일을 시작했다고 했을 때, 사실 썩 긍정적인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다. 엄마의 친구는 박봉에 야근이 많은 일이라 얼마 안 가서 그만두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고, 내가 다니던 어느 회사의 사수는 출판사에 입사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이 반대하지 않았냐고 묻기도 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고되긴 한데 이렇다 할 사회적인 보상을 받지 못하는 직업이라는 인식에서 기인한 것만은 공통적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엄마 친구의 예측과 다르게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어찌 되었든 이 일로 밥을 벌어먹고 살고 있다. 중간에 전직하는 선후배들도 있었는데 이상하게 나는 아예 직업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냥 내가 하는 직업이 나 한 사람을 스스로 책임지기에 좀 더 적합한 환경과 상황으로 나아가면 좋겠다고 바라기는 했으나 먼 미래를 그려볼 때 나는 늘 이 일을 하는 사람으로 남아있곤 했다.

그런데 최근에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내게 이 일이 아니면 어떤 일을 하고 싶냐고 물었다. 본인들은 이 일이 자신들의 마지막 직업은 아닐 것 같다고도 했다.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봐도 나는 여전히 이 일 말고 하고 싶은 거라곤 농사 정도다. 나이를 좀 더 먹으면 텃밭이 딸린 작은 집에서 자급자족할 만큼의(이 정도라도 할 수 있으면 다행이다 정말) 농사일을 하면서 살고 싶긴 하지만 직업으로서 다른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는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안일함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일의 무해함을 좋아한다. 내가 하는 일은 혹여 내가 저지른 실수가 타인의 목숨을 좌우하거나 재산을 잃게 하지 못한다. 내가 내린 결정이 타인의 인생을 바꿀 만한 판결이 되지도 못하고, 공중의 전파를 사용하지도 못하니 반드시 자기 의사에 따라 구매를 결정한 독자에게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스스로 마음만 나쁘게 먹지 않는다면 크게 실수를 해도 내가 손해를 감수하는 방식으로 수습이 가능한 일이라는 뜻이다.

물론 누구를 망치지 못하는 일인 만큼 누군가를 세상의 반짝이는 곳으로 밀어올리지 못하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박봉인데 일은 많고 덕분에 딱히 인기는 없는 직업군이라는 인식이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무해한 내 일을 좋아한다. 내 실수가 타인의 삶을 좌우하지 못하는 것이 좋다. 오로지 내가 만든 책을 스스로 선택한 독자에게만 삶에 필요한 만큼 자극을 줄 수 있다는 점이 뿌듯하다. 냅다 작파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날조차도, 그래서 생각 않고 루틴하게 진행하는 일들마저도 타인의 생명과 재산에 손해를 끼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나를 안도하게 한다. 모두가 이런 직업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세상 쫄보인 나에게 이 일은 생각보다 더 잘 맞는 직업인 것 같기도 하다.

온 세상이 영향력을 키우고 싶어서 안달인 것만 같은 요즘이다. 남을 해치는 행위로라도 주목 받고 싶어하는, 정말 믿을 수 없는 행위를 하는 사람조차 인간이라는 종으로 동일하게 분류된다는 이유로 같은 하늘을 이고 산다. 그런 와중에 무해함을 꿈꾸는 사람들과 그러한 일이 얼마나 귀한가 새삼스럽게 되짚어보게 되었다.

오늘도, 내일도, 일을 하다 보면 또다시 별일이 다 생기고 때론 사람에게 환멸이 나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무해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위안 삼고 싶다. 아마 이 일이 아닌, 내가 내막을 잘 모르는 다른 어떤 일들도 이처럼 무해한 매력이 있을 것이다. 겉으로 볼 때 대단히 추앙 받는 일이 아닐지라도 무해한 그 일을 하고 있는 당신 역시 누구보다 이 세상에 중요한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P.S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겠지만 ㅎㅎ 지난 레터에 썼던 인피니트 콘서트, 저 갑니다. 무한 새로고침의 굴레 속에서 취켓팅 했다지요. 재밌게 즐기다 올게요. 여러분의 일상에도 무용해 보이지만 그래서 무해하고 즐거운 이벤트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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