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고슬비

03. 돈 받는 여행을 하면서도 내돈내산 여행을 굳이 또 가는 이유

구독자님 반가워요. ‘일류여성’의 세 번째 편지를 맡은 ‘천고슬비’입니다. 일을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비행기표를 끊고 여행 다녀온 추억과 카드빚으로 다시 일할 기운을 얻는 수많은 일개미들을 위하여 :)

2023.05.19 | 조회 3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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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여성

세 여자가 전하는 '일'에 관한 모든 이야기

16년차. 음식 프로그램, 휴먼 프로그램을 거쳐 지금은 4 여행프로그램 제작중인 방송PD. 아주 어릴 때부터 세상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은 PD 밖에 없는 것 같았는데 막상 PD가 되고 나니 딱 그 일만 빼고 무슨 일이든 다 할수 있을 것 같은 그냥 생활형 PD다. 뭣도 모르고 꾸었던 꿈 때문에 평생 고통 받게 될 줄은 호기롭던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몰랐다.   

나는 타인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 낯선 사람과 말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주제에 하루 종일 사람과 부대끼면서 얘기하는 것이 일이 되어버렸으니… 그 와중에 재미가 없어도 잘하고 싶은 욕심에 치이느라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았던 건 고작 스물일곱 쯤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초등학교부터 다시 다니라고 해도 못할 것도 아닐 나이 같은데 그 때는 이미 다른 길은 없는 줄 알았다. 그래서 그냥 버텼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갑자기 방송이 죽은 어느 . 집에만 누워 있다가는 예고 없는 휴가가 그냥 잠만 자다 사라질 같아 제주도 티켓을 끊었다. 계획이 없었기에 하루 종일 걸었다. 어지간한 거리는 걸었다. 걷고 걸었다. 하루종일 아무말도 안하고 걷기만 했다.  안의 독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뒤로 다시 몸에 독이 쌓이면 여행을 갔다. 그리고는 하루 종일 걷고 걸었다. 모르는 나무, 짜증내지 않는 구름. 소리 없이 그냥 자리에 있는 것들을 보러 종종 시간이 때마다 떠났다. 갑자기 하루가 비는 날은 첫비행기와 막비행기를 끊어 제주도로, 표가 없을 때는 동해로, 3일이 비면 일본으로.

그리고 그런 나의 여행을 비웃던 엄마. 도대체 혼자 그러고 다니는 거냐며 혀를 끌끌차던 엄마는 퇴직을 하면서 가끔 나의 여행에 함께하기 시작했다.  

사실 엄마와의 여행이 처음부터 기꺼웠던 것은 아니다. 어디어디를 가봤다는 중요한 엄마는 가고 싶은 많았다. 발만 찍고 다니는 여행만 해 본 엄마는 자기 짐가방 하나 메고 끌고 다니는 것도 힘들어했다. 그런데도 다시는 딸이 데리고 갈까봐 말도 못하고 여행이 끝나는 날 공항에 앉아 “젊은 늬들은 이렇게 여행하면 재밌긴 하겠다.”라며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이후 어느 여행이 끝나고  꼭 자유여행만 정답이고 패키지는 틀린게 아니야. 사람마다 상황마다 더 맞는 여행이 있는 거라고 말씀하시긴했다. 망치로 한대 맞은 것 같았다.)

나는 나대로 힘들었다. 그냥 걷다가 다리 아프면 카페에서 두시간이고 세시간이고 앉아있고, 앉을데가 없으면 길바닥이라도 드러누웠다 가는 사람인데 엄마를 ‘모시는’ 여행에서 그럴수는 없었다. 가이드도 아닌데 뭔가 잘못되면 내 탓만 같았다. 누가 뭐라는 사람도 없는데 엄마가 고객이라도 되는양 원하는 리액션이 나오지 않으면 불안했다. 눈치 보는 엄마와 짜증을 억누르는 . 이제와 고백컨대 그냥 혼자 편히 다닐걸 괜히 사서 고생하는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함께 다닌지 열너댓번째 이었던 같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독일 어느 소도시 성벽을 걷다가 갑자기 엄마가 고백을 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는게 생일 미역국에 소고기를 넣어주는 거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게 아닌 같아. 사랑한다는 한마디 뱉어주는게 사랑이었다는 생각을 못했어. 말하고 살았어야 했는데 사랑해.

인적도 별로 없는 그래서 호젓하다 못해 적막이 감도는 길에서 갑분 고백이라니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가. 다른 주제로 넘어가야 한다. 뭐라도 다른 말을 해야한다. 

그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유럽의 음악가나 화가를 잘 모르는 엄마에게 훈장질 하느라 바빴었는데 엄마는 그 와중에 딸에게 평생을 속에 담아 두었던 고백을 했다. 저런 것들이 알고 누리는게 취향이랍시고 살았지만 사실은 엄마 등골을 파서 생긴것들이었을텐데. 엄마라고 그런 취향을 가질줄 몰라서 안한게 아닐텐데…아무리 내가 잘나봐야 엄마 발끝은 평생을 쫓아도 못따라간다. 아무리 짜증이 나고 아무리 힘이 들어도 엄마와의 여행을 계속 해야겠구나 다짐했다. 

당신의 자식에게 세상을 하나라도 보여주고 싶어했던 부모의 마음. 이제는 내가 엄마한테 보여주고 싶은 세상이 많다. 그래서 올 해 갑자기 받은 휴가에는 엄마의 평생 로망이었다는 스위스에 간다. “내가 언제 유럽에 가겠어. 이번에 마지막일텐데.” 마지막이라는데, 엄마의 평생 소원이었다는데 가야지이번 여행도 비행기 타기 전까지 숨차게 일하다 공항으로 뛰어갈 예정이지만 기대된다. 평생 힘이 될 엄마의 또 다른 고백이 무엇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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