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진짜 오래된 드라마가 되었지만 한창 <미생>이 유행일 때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었다. 상사는 모두 자기가 오차장인 줄 알고 직원은 모두 자기가 장그래인 줄 안다고. 그러나 상사는 성대리나 아니면 다행이고 팀원은 답답이 장백기 정도만 돼도 훌륭하다고. 그 얘기를 듣고 이쪽이든 저쪽이든 공감 가는 부분이 있어 깔깔 웃었는데, 그 기분을 10년이 넘어 또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상사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나영석 PD에 빙의해서는 후배에게 심지어 나영석 PD의 말이 자기 철학인듯 말하는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자 너무 당황스러웠기 때문이다. 나도 그러고 있는 건 아닌가 얼른 셀프 검열하고 뇌에 힘을 꽉 줬다.
나영석 PD가 말하기를 ‘우선 성공하고 볼 일’이라고 했다. 나 역시 주변 편집자들조차 ‘시장’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하는 편집자로 나를 꼽을 만큼 ‘판매’, ‘비즈니스’, ‘숫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집자이므로 나영석 PD의 말에 백번 공감한다. 뭐 일단 팔려야 위대한 예술도 하는 거니까. 책이란 단지 메시지를 담는 미디어일 뿐이고 그 메시지나 이미지, 편집의 상태 등이 소유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매력적이라는 의미에는 긍정, 부정의 의미 모두를 포함한다)이거나 합법적 비판, 비난권을 구매하고 싶을 만큼 화제성이 있어야 소위 말하는 ‘비즈니스’가 된다. 원고 작성부터 디자인과 편집, 제작까지 그걸 생업으로 삼는 사람이 있으니 당연히 수익을 내야 지속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회사’가 분야, 기획, 편집, 심지어는 카피의 방향성까지 특정 조건으로 지정하는 경우가 있다. 특정 시장, 특정 메시지를 담은 책이어야 팔릴 것이란 예측을 바탕으로 의견이 계속해서 보태진다. 심지어 담당 기획자가 볼 때 그 방향성이 그들의 바람인 ‘주류 감성’이 아닌 것 같고 그래서 딱히 돈이 되지도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할 때에도 대체로 ‘강요’에 가깝게 ‘오더’가 내려오는 경우도 많다. 재미 있는 건 결과가 나오는 순간부터다. 그래도 책이 ‘잘 팔리’면 괜찮다. 그 책을 만들었다는 사람이 외부 인력까지 순식간에 몇십 명이 되어버리지만(모두가 자기가 만들었다고 한다. 필수 인력은 늘 고정되어 있는데도).
진짜 문제는 그렇게 만든 책이 안 팔리거나 혹은 팔리더라도 판매량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시작된다. 그 책이 ‘망한’ 이유는 갑자기 담당 기획편집자의 판단 실수가 되어 버린다. 자기들은 조언을 했을 뿐이고 팔리게 취사선택하는 것은 담당자의 몫이라는 것. 그러다가 디자인 어떤 부분이 아쉽고 어쩌고, 전하려는 메시지가 덜 매력적 어쩌고로 흐른다. 그토록 강권하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뭐 그런 사람들이 다 쌩 나쁜 사람이라서 담당자를 골탕 먹이려고 그런다는 건 아니다.(그렇게 발 빼는 행위가 약간의 양심과 책임감 결여에서 온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이 문제가 시작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결과는 ‘숫자’로 보는데 이 결과를 만들기 시작하는 기획은 ‘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콘텐츠 관련 사업이기 때문이다.
책 만드는 사람들은 허공에 발이 떠 있고 데이터랑 친하지 않아서 원시적인 ‘감’에 의존하는 걸까? 그럴 리가. 한동안 출판계에서 데이터로 시스템 만들겠다고 애쓰던 시기가 있었다. 작은 회사든 큰 회사든 자사 규모 내에서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데이터를 모으려고 애썼다. 다만 서점을 통하기 때문에 소비자에 대한 직접 정보를 얻을 수 없다는 구조적 어려움도 있고, 제일 문제는 책이라는 게 결국 ‘재미’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시장이기 때문이다. ‘재미’에는 너무 많은 뜻이 들어 있다. 새로운 정보를 확인하는 재미, 말 그대로 유머로 소비되는 재미, 사유를 즐겁게 만드는 재미, 확고하게 약속된 해피엔딩이 주는 안정감 등. 그런데 사회 공동체의 여러 요소 혹은 사건 때문에 추구하는 재미의 정의가 수시로 달라지기 때문에 데이터를 중심으로 결과를 예측한다는 건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주가 예측이 불가능한 이유와 마찬가지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트렌드가 어느 정도 지속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는 근거는 결국 ‘감’이다. ‘쎄함’을 두고 ‘내 인생을 바탕으로 위험을 감지하는 감각의 총합’이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이 정도는 팔릴 것 이라는 예측은 ‘그간 내가 많이 팔아본 경험을 중심으로 판단했을 때 이런 시장과 아이템, 방향성을 가질 때 팔릴 것’이라는 예상의 총합이다. 그 말은 각자의 경험이 모두 다르므로 자신의 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주장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회사 분위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런 경우 정말로 담당자가 온전히 자의에 의해 의견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위계에 따른 결정이 훨씬 더 힘을 갖는다.
그래서 이래도 저래도 성공을 담보할 수 없다면 담당자 입장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거라도 하겠다’라는 마음이 생긴다. 나영석 PD가 말한 것처럼 남의 돈으로 자아실현하겠다는 게 아니고, 그거 말고는 주어진 환경에서 달리 자기만의 성공 코드를 만들 방법이 없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다(그럼에도 어떤 상황에서든 회사의 입장에서 결과까지 성공시킬 수 있어야 그게 진짜 능력이라고 하면 그때부턴 진짜 이런 논의의 의미 자체가 없어지겠지만). 그나마 관심 있고 좋아하는 거라도 해야 거기서 나와 같은 성향의 소비자가 어떤 포인트를 좋아할지 예측해볼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잘할 수 있는 걸 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정말 욕심인가? 그럼 욕심을 버린다는 건 어디까지 회사의 요구를 따르는 걸까? 그 요구가 실패했을 때는 누가 책임을 지는가? 책임질 사람을 찾는 것조차 담당자의 순진한 욕심일까? 애초에 그 숫자로 드러나는 성공이란 게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래서 나는 ‘예측’보다 ‘의지’가 숫자와 결과를 만들어낸다고 믿는 편이다. 내가 이 시장에서 이 키워드 혹은 이런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이 정도 규모로는 퍼뜨리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있으면 숨어 있는 크고 작은 기회를 찾거나 잡을 수 있다.(책은 보통 250쪽이 넘고 그 정도 분량은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때그때 필요한 키워드와 기회에 맞게 메시지를 변형해서 광고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다만 광고는 비용이다.) 만약 이 의지를 바라는 것을 두고 욕심이라고 하려면 회사도 나영석 PD 정도의 책임감은 가졌으면 좋겠다.
한 때 CJ 임원보다 많은 연봉을 받아본 스타 PD가 파이어족으로 살겠대도 개인의 삶이니 말릴 수 없을 텐데, 혹시나 방송이 완전히 저물고 모두 유튜브로 옮겨 갈까 봐 채널을 개설하고 본인이 직접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고 연출로도 모자라 이제 출연자 롤로 콘텐츠를 기획 참여하는(팬미팅 포함) 정도의 책임감이라면 팀원도 국으로 시키는 걸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겠나? 물론 나영석 PD는 결과도 가져오면서 훨씬 더 이상적인 형태가 됐지만, 드라마 <미생>에서 회사의 한직이나 다름 없게 표현된 영업 3팀에서조차 팀원들을 하나로 모았던 힘은 오차장의 책임감이었다.
타인에게 조언하는 건 가장 쉬운 일이지만 가장 영양가 없는 일이기도 하다. 가장 어렵지만 가장 큰 힘은 보여주는 데에서 나온다. 나는 말만 하고 사람과 상황이 알아서 내가 말한 대로 움직여주길 바라는 게 더 욕심 아닌가? 후배들도 콘텐츠 산업이란 게 결국 예술이 아니고 산업이라는 것 쯤은 안다. 그러니 후배에게 욕심 많다고 하기 보단 함께 잘 팔겠다는 ‘의지’를 다져 보는 선배(당연히 나도 포함되어야겠지)가 더 많아지면 좋겠다.
<코너 속 코너> 덕질은 어떻게 세상을 이롭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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