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기획안이 통과되었다. 여전히 여러 이해할 수 없는 내부 조건부였지만 그건 작가가 아닌 내가 감내할 문제이므로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하도 하면 안 되는 것들이 많아서 진짜로 통과 안 되면 먼저 기획한 책이나 내고 이 회사 때려 치워야겠다는 각오까지 했었는데 그정도 조건이면 괜찮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냥 잘 만들고 잘 팔면 되니 누가 뭐라든 신경쓰지 말자고도 생각했다.
기획이 통과는 됐으나 이러저러한 점을 설득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상사의 개운치 않은 허락을 듣고도 기분이 좋았다. 그냥 내가 조금 더 고생하겠다고. 그렇게 해서라도 꼭 하고 싶은 기획이었고, 아마도 이 회사에서 내가 이 분야로 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획일 것도 같았다. 저자에게 기획안이 통과됐음을 알리는 메일을 쓰면서 아마도 그 순간 같은 찰나를 위해 매일의 괴로움을 견디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초부터 하고 싶어 했던 기획이고, 상사 역시 통과 가능한 기획이니 원하는 작가를 섭외해 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의에서 까일 수 있다는 말을 입으로도 마음으로도 끊임없이 되뇌면서 기획안을 썼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반려당한 기획이 많았고, 그게 스스로에 대한 검열을 만들어 아예 기획안을 쓰지 않고 버티던 시간도 있었고, 이리저리 난도질 당해 쭉정이가 된 기획도 있었다. 그러니 딱히 이번이라고 다르지 않겠지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어떤 작가와 일해 보고 싶다는 기대감 때문에 결국 다시 기획안을 썼다.
다행히 우선순위에 있는 작가가 본인이 써 보고 싶다는 답변을 매우 빠르게 주었다. 본인이 생각해 온 삶의 자세와 다른 주제여서 오히려 깊이 탐독해 보고 싶다는 의견을 남겼다. 그때부터 다시 마음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이 살아 온 방식과 다르지만 누군가는 자신이 겪었던 당황스러움을 겪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써보겠다는 작가의 마음이 책을 읽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작가 미팅을 하고 다시 한번 기획의도와 원고의 방향, 구성을 설명했다. 역시 여러 책을 집필해 본 작가답게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짚어서 물어보았고 거기서 기획은 좀 더 보완되었다. 본인 생각을 빠르게 정리해서 써 준 머리말과 샘플 원고까지 입고되어 자연스럽게 기획안이 완성되었다. 1차 샘플 원고 검토 후 여러 의견이 있었고 다행히도 그 의견에 동의해 준 작가 덕분에 한 차례 수정도 거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 회의에서는 기어코 기획의 코어를 수정해 달라는 의견이 나왔다.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을 근거 삼아 아예 기획 의도를 바꿔달라는 말에 어느 기획자가 그러겠다고 할까. 그쯤 되니 그냥 이 기획을 안하고 말지 싶었다. 엎어지는 기획이 한둘도 아니고. 여러 의미로 벼랑 끝에 서 있는 마음에 더이상 들어 줄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이 기획을 수정할 생각이 없고 만약 현재의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냥 접어야 한다고 했다. 이쯤 진행됐을 때 엎어지는 기획이면 당분간 이 작가와는 작업하기 어렵다고 봐야 한다. 그래도 나는 작가의 자존심 정도는 지켜주고 싶었다. 비록 내가 이 회사에서 깃털같은 영향력 밖에 없어서 내 마음대로 기획을 이끌어 갈 수는 없다고 해도 작가에게 하기 싫은 걸 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이후로 나를 제외한 사람들의 회의가 추가로 있었고 연초부터 사람이 답도 없이 의욕과 체력이 고갈되어 가는 걸 안타깝게 여기던 상사가 어찌어찌한 설득의 과정을 거쳐 결국 통과는 되었다. 냅다 엎어 버리겠다고 한 덕분에 기획이 넝마가 되지도 않았다. ‘이렇게까지 해 주었으니 너는 반드시 이 책을 많이 팔게 만들어야 한다’라는 압박이 내년의 나를 내내 따라다니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앞으로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찰나의 순간을 위해 일하고 있을 것이다. 이게 비록 남에게 월급 받는 직장인의 비애일지라도.
<코너 속 코너> 덕질은 어떻게 세상을 이롭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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