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자자족

[나의 최애] 나만큼 김애란을 사랑할 순 없어

신형철 평론가가 김애란을 사회학자라 칭한 데 전적으로 동의하는 이유

2025.10.31 | 조회 1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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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여성

세 여자가 전하는 '일'에 관한 모든 이야기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곰자자족입니다. 최애라는 주제를 듣자마자 '김애란' 작가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쉽게 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번 글은 무척 어려웠어요. 거의 20년에 걸쳐 김애란 소설을 읽고 함께 성장하고 성숙해온 과정을 짧은 글로 임팩트 있게 담기엔 아직 부족한 실력인 탓입니다. 그럼에도 좋아하는 건 좋다고 당당하게 말하기 위해 씁니다. 이 글은 저의 목요일 독서모임 멤버들이 건넨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김애란을 왜 좋아하냐는 물음에 늦었지만 오늘의 긴 편지를 부칩니다.
이번 뉴스레터를 쓰려고 김애란 존에서 책들을 꺼내보았다.
이번 뉴스레터를 쓰려고 김애란 존에서 책들을 꺼내보았다.

우리집 책장에는 김애란 작가 존이 있다. 3X6 책장을 가로로 길게 눕혔을 때 제일 윗줄 중앙. 가장 잘 보이고 가장 손에 닿기 쉬운 칸에 김애란 작가의 책들이 꽂혀 있다. 결혼하며 책들을 꽤 정리했고, 아이 낳고는 공간이 좁아 주기적으로 책을 없애면서도 끝까지 건드리지 않는 유일한 보호 구역. 내게 김애란은 20대와 30대를 잘 건너오게 한 은인이자 역사이기도 한 까닭이다.

나는 김애란 작가의 첫 소설집 달려라, 아비보다 침이 고인다를 먼저 읽으며 김애란의 세계에 입문했다. 소설이 재미있다는 선배의 추천 덕분이었는데 막상 읽어보니 위트보다는 슬픔에도 굴하지 않는 어떤 자존, 짠한 현실에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심지 같은 걸 느꼈다. 가장 강렬했던 건 가짜가 아니라 진짜라는 느낌이었다. 소설은 허구라는 전제를 깔고 시작되는 판인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작가가 지어낸 것 같지 않은 생생함. 소설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 같고, ‘88만원 세대로 불리던 내 주변의 이야기 같았다.

집이 망해 반지하로 이사 왔는데 자취방 크기에 어울리지 않는 피아노를 우스꽝스러운 흉물처럼 들여야 한 주인공의 이야기(‘도도한 생활’), 밥상 앞에 한 사람이 더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스스로 보통 사람이 되는 것 같아 덜컥 후배를 집으로 들였다가 결국 아주 원초적인 핑계를 내세워 후배를 집에서 나가게 만드는 이야기(‘침이 고인다’), 넓은 서울 하늘 아래 제대로 된 방 한 칸이 없어 옹색한 크리스마스를 보낸 젊은 연인과 남매의 이야기까지(‘성탄특선’).

자본주의 사회의 문법으로 본다면 실패에 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분명할 텐데, 그 실패에 자꾸만 눈이 갔다. 적어도 내게는 종이 위에 찍힌 글자가 허공에 날아다니지 않았다. 슬픈 구석 그 자체로 스며들었다. 바닥을 확인한 자의 최후가 볼품없고 초라한데 끝까지 초라하지만은 않은 느낌. 그래서 좋았다. 그것 자체로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에스컬레이터 위로 얼굴이 부은 사람들이 일렬로 서 있는 게 보인다. 그들 모두 어릴 때 꿈이 ‘훌륭한 사람’은 못 되었어도, ‘공휴일에 출근하는 사람’은 아니었을 거다. 그녀는 에스컬레이터의 긴 행렬에 바싹 따라 붙은 뒤, ‘내가 사교육만 제대로 받았어도 이러고 있지 않을 텐데’ 탄식한다. 그러고는 이내 부끄러워한다.

《침이 고인다》, '침이 고인다' 중에서

그러다가 단편소설집 비행운을 읽은 뒤로는 김애란 작가에게 완전히 빠져버렸다. 소설이 꼭 내 일기장 같았기 때문이다. 차마 입 밖으로 내뱉기엔 찌질하고 쪼잔한 마음, 예민하고 치사스러운 마음이 담겨 있었다. 찜찜하고 불편한 마음의 정체를 알 수 없어 덮어두었던 어지러운 마음들까지도. 어떤 상황 속 내 마음을 스캔해본다면 소설 속 주인공의 마음이지 않았을까? 그러니 나는 주인공 이야기에 나의 이야기를 계속 포개어보곤 했다.

선배가 혹 내 얼굴에서 낙오자의 안색을 발견하면 어쩌나 조바심도 났다. 광합성을 하는 사람에게는 광합성의 빛이, 전자파를 먹고 사는 사람에게는 전자파의 빛이 드러나기 마련이니까.

《비행운》, '너의 여름은 어떠니' 중에서

스물여덟. 이제 막 서른을 바라보는 내 몸이 알맞게 그리고 충분히 익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간 몇 번의 연애가, 구직이, 이사가 있었다. 그리고 예전보다 몸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내 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울에 갓 도착한, 스스로의 구매력을 어색해하던 스무 살 때보다 건강하다. 내가 나를 돌보는 느낌. 소비는 조심스럽고 수줍게 진행됐다.

이 정도는 낭비가 아니라 경제적인 행복이라고.(...) 분수에 맞지 않는 물건을 골라 담았다. ‘아주 조금 나은’ 물건에 대한 욕구. 그러니까 그냥 다리미가 아닌 스팀다리미, 보통 드라이어가 아닌 음이온 드라이어, 일본 생맥주, 핸드 드립 커피, 고농축 에센스에 푹 전 마스크 팩...... 한번 높아진 눈은 다시 낮추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 데는 직장 동료들의 조언도 한몫했다. 그녀들은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식의 고집과 풍습을 공유했다. 다른 건 몰라도 가방은 비싼 걸 메야 한다. 다른 건 몰라도 화장품은 좋은 걸 써야 한다, 항상 입는 코트는 유명 브랜드로 걸쳐야 한다 등.

월급날에 대한 확신과 기대는 조금 더 예쁜 것, 조금 더 세련된 것, 조금 더 안전한 것에 대한 관심을 부추겼다. 그러니까 딱 한 뼘만...... 9센티미터만큼이라도 삶의 질이 향상되길 바랐다. 그런데 이상한 것 그 많은 물건 중 내게 ‘딱 맞는 한 뼘’은 없었다는 거다. 모든 건 늘 반 뼘 모자라거나 한 뼘 초과됐다. 본디 이 세계의 가격은 욕망의 크기와 딱 맞게 매겨지지 않았다는 듯.

《비행운》, '큐티클' 중에서

김애란 작가가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 삶들은 대체로 씁쓸하고 막막했는데 그렇다고 마냥 비관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야기를 읽다 보면 작가가 오래 응시하고 바라본 삶들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작가의 다짐 같은 것들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슬퍼할 수 있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까 네가 나의 슬픔이라 기쁘다고 말한 두근두근 내 인생주인공의 말처럼. 김애란 작가는 행복할 수 있어, 행복해야 해가 아니라 행복하지 않은 채로도 살아갈 수 있어, 살아가야 해요라고 말을 건네는 것만 같았다.

그랬기 때문에 서른 무렵의 나는 나와 같은 소시민적 삶에 변함없이 시선을 두고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작가가 동시대에 살고 있어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김애란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함께 성장하고 성숙해간다고도. 이야기 덕분에 많은 위로를 받았으니까.

작년 한글날, 서촌 작은서점에 김애란 작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제일 좋아하는 책 《비행운》을 들고 사인을 받으러 다녀왔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를 출간하며 진행하는 서점 투어 이벤트 같았는데, 다음 책도 쓰고 있고 내년에 나올 거라는 얘기를 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때 다음 책으로 언급한 소설이 《안녕이라 그랬어》였던 듯하다. 
작년 한글날, 서촌 작은서점에 김애란 작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제일 좋아하는 책 《비행운》을 들고 사인을 받으러 다녀왔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를 출간하며 진행하는 서점 투어 이벤트 같았는데, 다음 책도 쓰고 있고 내년에 나올 거라는 얘기를 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때 다음 책으로 언급한 소설이 《안녕이라 그랬어》였던 듯하다. 

한동안 책을 내지 않았던 작가가 작년 여름 장편소설 이중 하나는 거짓말에 이어 올해 단편 안녕이라 그랬어로 연이어 출간 소식을 알렸기에 나는 두 소설을 모두 아끼며 읽었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에는 여러 사연과 가정사가 얽혀 있는 청소년이 주인공이었다면 안녕이라 그랬어에서는 계급차이를 느낄 수 있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안녕이라 그랬어를 읽으며 놀란 점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소설이 좀 더 광범위하게 동시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이었다. 전세사기, 코로나19 팬데믹, 층간소음, 배달노동의 사회문제가 노골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소설은 허구의 문학이기에 현실을 반영할 의무는 없을 텐데도, 작가는 여전히 현실을 응시하고 그 안에 생기는 여러 어려움과 문제들을 소설 안에 담아내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인물이 다양해졌다는 점이었다. 예전의 소설에는 다른 이야기지만 그 다른 이야기의 인물이 모두 같았다면, 안녕이라 그랬어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각각 개별적이고 독립적 인간으로 보였다.

이 두 가지가 놀랍다고 언급한 것은 이제 김애란 작가가 본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야기 틀을 벗어나 다른 사람이 되어 쓰는 이야기에는 앞으로 얼마나 더 깊이 있는 이야기들이 담길까. 나는 벌써 기대가 된다. “슬픔을 극복하는 이야기만이 아니라 슬픔에 충분히 머물러 있는 글도 필요하다면서 내가 아는 것, 상대가 아는 것을 합해서 둘 다 모르는 장소로 가는 것이 좋은 소설이라 생각한다고 말한 김애란 작가의 말에 동의하면서 다음 작품을 끈기있게, 의미있게 기다려볼 것이다. 

언젠가 김애란 작가와 직접 마주 앉아 무거운 인생도 가볍게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 꿈도 품어보면서. 

지난 세월, 시간의 물살에 깎이고 깨지며 둥글어진 마음이 있었다. 실제로 이십여년간 이연이 여러 인물에게 자신의 몸을 빌려주며 깨달은 사실은 단순했다. 그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 보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라는 거였다. (...) 적어도 지금 이연은 인간을 더 연민하게 됐으니까. 이연은 그리스신화 속 영웅이나 현대의 범인 못지않게 ‘그 나머지’ 사람들을 애정하게 되었다. 자신을 이기지 못하는 이들을, 실수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는 자들을, 변명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나약한 이들을 깊이 응시하게 되었다.

《안녕이라 그랬어》, '홈파티' 중에서

그게 꼭 아이들이 철없거나 허영심이 세거나 금융 문맹이어서가 아니라요, 제 생각에는...... 밥은 남이 안 보는 데서 혼자 먹거나 거를 수 있지만 옷은 그럴 수 없으니까, 그나마 그게 가장 잘 가릴 수 있는 가난이라 그런 것 같아요, 가방으로.

《안녕이라 그랬어》,'홈파티' 중에서

젊은 시절, 나는 ‘사람’을 지키고 싶었는데 요즘은 자꾸 ‘재산’을 지키고 싶어집니다. 그래야 나도, 내 가족도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불안이 들어서요.

《안녕이라 그랬어》,'좋은 이웃' 중에서

 

📚 [내맘대로 골라보는] 김애란 작가 소설 추천 순위 

1. 《달려라, 아비》: 김애란 작가의 첫 소설집으로, 초창기 작가만이 갖고 있는 특유의 문체와 감성, 시선을 느낄 수 있음. 2. 《이중 하나는 거짓말》와 《두근두근 내 인생》: 둘다 장편소설. 단편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김애란 작가만의 짙은 색채 같은 것은 덜 느낄 수 있지만, 부담 없이 입문하기에 좋은 소설이라 생각. 무엇보다도 따뜻하다. 3. 《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작가의 2025년 최신 단편소설집. 20년 이상 소설을 쓰며 넓고 깊어진 김애란 작가의 시선을 엿볼 수 있음. 차갑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 같은 걸 느낄 수 있음. 4. 《비행운》과 《바깥은 여름》: 지금 마음이 충분히 단단해져 있다면, 그래서 울음이 터져도 괜찮다면, '입동'부터 읽어보시기를. 작가가 내 이야기가 아니라 타인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 먹게 된 계기가 '입동'부터 였을 것이라 주관적으로 추정한다. 어떤 사건을 연상하게 하지만, 그것이 아니어도 소설 자체로도 충분히 타인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이 무엇인가를 느끼도록 만듦. 5. 《침이 고인다》, 《잊기 좋은 이름》까지 완독하면 이제 당신도 외칠 수 있을 것이에요. 나만큼 김애란을 사랑할 순 없어!


📍 오늘의 글 제목 '나만큼 김애란을 사랑할 순 없어'는 정세랑 에세이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에서 차용해왔음을 밝혀둡니다. 


 

 

📢[캠페인] 선배 시간 괜찮아요?

- 경험을 나눠줄 선배님의 인터뷰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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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마치 퇴사를 결심한 후배가 꺼내는 클리셰 같은 문장. 후배를 둔 직장인이라면 뜨끔할 이 문장을 구독자 여러분께 던집니다. 어느덧 사회생활 10년이 훌쩍 넘은 경력자들이지만 여전히 머릿속에 물음표를 달고 때론 답답한 마음에 풀리지 않는 분노를 삭혀가며 고군분투 중인데요, 이런 저희에게 본인의 경험담과 생각을 들려주실 귀한 선배님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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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마주하고 인터뷰한다면 좋겠지만, zoom, 구글미트를 활용한 온라인 미팅, 서면으로 답변해주시는 것도 모두모두 환영입니다! 선배님의 소중한 경험담을 공유할 모든 통로를 활짝 열어놓을 테니 부담 없이 연락주세요! 함께 나눈 이야기는 세 에디터가 잘 갈무리해서 레터를 통해 구독자님들께 생생히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또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내 주변에 이 사람이 생각났다! 하는 분이 있다면 자유롭게 추천을 부탁드립니다. 평생해야 할 일이라면 내 일을 좀 더 사랑할 수 있게, 또 본인의 일을 즐기는 사람이 더 많아질 수 있게 함께 고민해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회신 기다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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