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는 외서 기획팀이 따로 없는 회사입니다. 출판사의 비율상 외서 기획팀이 따로 있는 경우가 드물긴 해서 각종 해외 도서전이 열리는 달에는 대부분의 출판편집자들이 매우 빠르게 다양한 외서를 검토하게 됩니다.(그게 비록 현재 편집 진행중인 책의 마감 일주일 전일지라도!) 분야별로 혹은 관심사별로 할당받은 외서를 검토합니다. 그리고 검토 자료(대체로 프로포절, 소개글일 때도, 샘플 원고 혹은 완전 원고일 때도 있습니다.)를 요청하게 됩니다.
이 때는 모든 출판사가 눈에 불을 켜고 좋은 책을 찾아 달려들기 때문에(물론 좋은 책이란 기준이 회사마다 다르겠지만요) 한 책에 여러 회사가 검토 요청 혹은 계약 요청을 하기도 합니다. 좋은 책이란 것은 결국 합리적인 가격으로 저작권을 구매해서 한국 출판 시장에서 손익과 메시지 전달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책이라고 정의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비슷한 책으로 계약이 몰립니다.
제게도 이번에 그런 책이 있었습니다. 제가 잘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외서를 마침 발견한 것이죠. 그래서 열심히 기획안을 쓰고 기획부 회의를 했는데 기획안에 이런 저런 보충 내용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최근에 회사에서 판매 때문에 호불호가 있는 아이템이어서 설득에 시간이 걸릴 거라는 생각은 원래 하고 있었던 터라 회사 스타일에 맞게 기획안을 수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옵니다. 오퍼 마감 날짜가 잡혔다고요. 다른 회사에서 계약 의사를 밝히고 선인세와 인세율을 원 저작권사에 제출했다는 의미입니다. 게다가 마감 날짜가 너무너무 밭게 잡힌 거예요. 팀 헤드에게 내용을 공유하고 우리도 출간 판단을 빠르게 진행해야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덕분에 야근하며 기획안 수정하고 영업부와 대표님 모시고 각각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재미있는 게, 기획부에서 조차 우리가 이 책을 잘 팔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회의였는데 다른 회사에서 오퍼를 넣었고 출간하려면 우리도 비딩(Bidding, 저작권 관련 경쟁 오퍼에 참가하는 것을 출판계에서는 비딩이라고 종종 부릅니다.)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니 갑자기 기획 평가가 긍정적으로 바뀝니다. 역시 홈쇼핑의 매진 임박 기술은 저작권 구매에도 적용이 되는 모양입니다.
이런 저런 궁리 끝에 저희가 선인세와 인세율을 제시했는데 1차에서 결정이 안 납니다. 상대 출판사도 아주 비슷한 조건으로 오퍼를 넣었다고 하더라고요.(그쪽도 손익을 계산했을 때 그 이상을 쓰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2차 오퍼가 들어갔는데 저희는 인세율을, 상대방은 선인세를 조금 더 높게 써서 또다시 사실상 큰 차이가 없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저자가 직접 회사 소개글을 요청했어요. 언제 설립해서 어떤 종류의 책을 냈는지, 그리고 우리는 이 책을 어떤 방향성으로 내고자 하는지 영문으로 보내달라고 하더라고요.
팀 헤드와 제가 이리저리 내용을 덧붙이고 AI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소개글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나의 떡이 주제인 걸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희가 저작권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해요. 그간 저희가 출간한 책 라인이 좀 더 본인 마음에 들었다고요. 어떤 의도로 자신의 책을 내고자 하는지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었고 그래서 저희 회사에서 내는 것이 더 알맞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사실 저자가 좋아했던 책을 낸 편집자들은 이제 이 회사를 다니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열심히 일했던 유산 덕분에 저는 제가 만들고 싶었던 책을 얻을 수 있게 된 거죠. 비밀에 부쳐지기 때문에 상대 출판사가 어디였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만약 신생 출판사거나 관련 분야를 처음 출간하려는 회사였다면 이번 케이스는 확실히 제가 운이 좋아 보였을 것 같습니다.
틀린 말도 아니지요. 선인세, 인세율 비슷했다는 건 수요 예측도 비슷했다는 거고 기획의 방향성도 명확한 책이었기 때문에 저 자체만 놓고 보면 딱히 제가 뭐 특출난 게 없으니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히스토리라는 건 그간의 기록일 뿐 지금 당장 무언가 더 낫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어려운 근거일 수 있죠. 그래서 좀 부러운, 혹은 아쉬운 순간이었을 것 같아요.
저의 최근 고민 중에 지금 있는 조직에서 더 잘 견디는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하는 이유도 사실 여기에 있습니다. 나를 먼저 지나쳐간 사람들이 남겨놓은 유산이 회사에 있어요. 담당 편집자는 그만두었지만 당시에 함께 근무하던 사람이 팀의 헤드가 되었으니 개략적인 히스토리도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큰 회사 혹은 오래된 회사가 할 수 있는 책들이 있어요. 신생 회사는 새롭고 참신한 기획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기존의 무게감 있는 기획을 덧붙이려면 그 외의 다른 요소도 필요합니다.
관련 분야에 대한 조언을 줄 전문가라든가, 그 분야의 새로운 소식을 빠르게 따라잡고 있는 번역가 혹은 저자, 추천가 등. 사실 히스토리라는 건 비용이나 규모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인물면에서 힘을 내는 경우가 흔하죠.(저희 회사는 한동안 그 관리가 안되어서 애를 먹은 면도 있습니다. 이제 다시 관리를 시작했으니 뭐라도 되겠쥬? 😁)
저는 아직 다양한 사람들과 일해 보고 싶습니다. 계속 노력 없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이 회사에서 다른 단점을 견디고서라도 그 장점을 활용해 보고 싶다는 건 욕심보단 목표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도 합니다. 그래서 당분간은 이 안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며 계속 고군분투해 보고 그 이야기들을 전해볼게요. 여러분들께도 온 우주가 돕는 행운이 돌아오길 바라며.
<코너 속 코너> 회사는 얼마나 개인을 괴롭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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