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자자족

[일의 다정함] 선배란 무엇인가

친절하다고 착각한 시절에 대해 다시 말하기

2026.02.06 | 조회 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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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여성

세 여자가 전하는 '일'에 관한 모든 이야기

구독자, 안녕하세요. 곰자자족입니다. 지난주 부유하는 유부가 '일의 다정함'을 주제로 쓴 이야기를 잘 읽어보셨는지 궁금합니다. '일의 다정함'을 두고 다양한 정의를 내릴 수 있을 테죠. 오늘의 레터를 다 쓴 끝에 제가 찾은 '일의 다정함'에 대한 결론과도 비교해보면서 구독자님만의 '일의 다정함'도 발견해보시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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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급이 낮은 직원에게 존대하면 다정한 사람이 되는 걸로 착각하던 때가 있었다. 말끝을 정중하게 맺고, 의견을 물을 때도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를 고르면 좋은 선배가 되는 줄 알았다. 시도 때도 없이 !”라고 부른다거나 말끝마다 “~했냐?”를 달고 사는 선배들과는 다를 테니까. 적어도 같이 일하기 싫은 사람, 피하고 싶은 사람의 부류로 속하지는 않겠지.

그런 착각은 제안서를 쓰면서 완전히 박살났다. 홍보대행사를 그만두기 전, 마지막으로 쓴 제안서는 올리브영의 라이프스타일 뷰티 브랜드였다. 북유럽 디자이너와 콜라보한 디퓨저 패키지 출시를 앞두고 사전 홍보부터 팝업 스토어 운영, 대규모 캠페인까지 꽤 큰 프로젝트였다. 제안요청서를 보니 재미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제안서를 써야 한다면 이게 좋겠다는 생각. 뷰티 홍보는 영 자신 없으면서도 PM(project Manager)를 자원했다.

후배들과 TF팀을 꾸렸다. 클라이언트가 얼마 안 돼 월급이 적어 꼭 클라이언트 수주를 해야만 하는 후배, 연간 써야 하는 제안서 참여 횟수가 미달돼 제안서를 써야 하는 후배들이 자리를 채웠다. 그러니까 모두 자원이긴 했으나, 아주 정직하고 솔직한 자원자는 아니었던 셈이다. 부문장님은 팀 구성을 보더니 뷰티와 생활용품 클라이언트 홍보를 많이 해본 후배를 추가로 붙여줬다.

제안서 회의 첫날, 다음 회의 때까지 각자 찾아볼 자료를 분장했다. 첫 시간은 가볍게 끝났지만 다음 시간부터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긴 회의가 될지도 몰랐다. 제안 방향의 키를 잡아야 할 사람은 나였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니까 가슴이 답답하고 한숨이 나왔다. 다행히 똑똑하고 재빠른 후배들이 여러 의견을 가져왔다. 후배들이 가져온 아이디어를 칠판에 적고 구조를 짜는 일 자체부터 버거웠지만, 티내지 않으려 애썼다. ‘쟤 진짜 잘 하고 있는 건가?’ 지켜보는 눈이 많았으니까.

그렇지만 제안서 장표를 쓰면 쓸수록 점점 힘겨웠다. 어떤 아이디어를 넣고, 어떤 아이디어를 지워야 할까? 이게 새로운 홍보 방향이 맞을까? 전체 맥락에 맞는 걸까? 그 중심을 잡아야 할 사람은 나였기 때문이다. 다만 스스로 확신이 없으니 후배들이 피드백을 달라고 할 때 정확한 가이드를 주지 못했다. 무엇을 수정하고, 무엇을 더 찾아보라고 제대로 말해주지 못한 채 나도 한번 찾아볼게요.”, “나도 한번 조금만 더 고민해볼게요.” 같은 말만 반복했다. 그때 나의 다정과 친절은 부질없고 공허했다.

자려고 누우면 자꾸 다음날의 일들이 걱정됐던 그때. 격하게 공감됐던 '유미의 세포들'
자려고 누우면 자꾸 다음날의 일들이 걱정됐던 그때. 격하게 공감됐던 '유미의 세포들'

부문장님 호출이 있었다. 개인과외처럼 1:1로 제안서 피드백을 받았다. “이제 너는 견적을 짜야 해, 나머지는 애들한테 맡겨.”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견적서를 쓰려고 돌입하고 나서야 부문장님의 진짜 말뜻을 알게 됐다. 견적서를 쓰다 보니 프로젝트의 공란이 보였다. 우리가 아이디어로 제안한 것들 각각의 총 비용과 총 소요기간처럼 확인해야 할 사항들이 여럿 보였다.

문제는 또 있었다. 후배들에게 일을 떠넘기는 것 같이 보일까봐 제안서 분장할 때 애초에 나에게 제일 많이, 제일 어려운 부분을 할당해두었더니 결국 제안서 작업 자체가 더디게 된 것. 그때 알았다. 말의 다정함 같은 건 일 앞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후배들에게 정말로 필요했던 건 다정하고 부드러운 말투가 아니라, 확실하고도 명쾌한 솔루션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어디까지 진행되었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잘 알려주는 설명이었다. 그것이 일의 친절이고 일의 다정이었다.

똑똑한 후배들의 에너지에 좋은 영향을 받아 다행히 프로젝트 수주에 성공했다. 여기서 해피엔딩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실행안을 작성하고 하나씩 일을 만들어가면서 번번이 나의 우유부단함과 답답함이 후배들에게 노출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뭐부터 하면 될까요?”라고 후배들이 물을 때 속 시원히 한방에 답을 준 적이 드물었으니까. 물론 내게는 더 이상 프로젝트에 관여하지 않고 출구전략을 모색할 명분이 있었다. 프로젝트 수주 직후 이직이 확정됐으니까.

그러니 당연히 100퍼센트 책임감을 갖고 프로젝트에 임하진 않았다. 클라이언트가 보기에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었을 것도 같다. 그 때문인지 5~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후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부채감처럼 남아 있다. 물론 나의 퇴사로 새 PM은 글로벌 코스메틱 브랜드를 다수 맡아본 동료가 맡았고, 그것이 후배들에게는 더 좋은 일이었을 테지만 말이다.

얼마 전, 어느덧 연차가 15년이 넘은 오랜 친구들을 만나 일 얘기를 하다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너희 말이야, 만약 성격은 좋은데 일을 정말 못하는 선배와 성격은 더럽고 악질인데 일을 정말 잘하는 선배 둘이 있다고 해봐. 그럼 어떤 선배와 일 하고 싶어?”

이미 부서에서 서열 1, 2위가 될 만큼 한참 선배가 된 친구들에게 묻기엔 시기적으로 늦은 질문 같으면서도 그 질문을 던진 건 아마도 내가 성격은 좋은 편이나, 일을 못하는 선배에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 친구들은 어느 쪽을 택할지 궁금했던 것 같다.

“근데, 이만큼 연차가 쌓이고 보니 그 질문은 잘못된 것 같아. 성격이 이상한데 일 잘하는 선배는 봤어도, 성격이 좋은데 일 못하는 선배는 거의 없더라. 일 못하는 선배는 대부분 성격도 이상하던데? 반대로 일 잘하는 선배들은 대부분 성격도 좋고, 팀원이나 후배에게 하대하지도 않더라고.”

나는 후배들에게 어떤 선배였을까? 성격 좋고 일도 완벽히 잘하는 선배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성격도 이상한데 일도 못하는 선배였을까? 그렇게까진 생각하고 싶지 않아 아직도 나를 명확하게 정의 내리지 못하겠다. 다만 다시 어떤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면 다정해 보이는 사람보다는, 덜 헤매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잘될 방향으로 솔루션을 주는 사람, 틀려도 일단 확신의 말을 건넬 줄 아는 선배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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