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내는 게 로망 중 하나였다. 돈을 왕창 벌어 벼락부자가 된 사람도 부럽고, 몸매 관리를 잘해서 어떤 옷이든 찰떡같이 소화하는 사람도 부럽고, 아이를 낳고 보니 나이에 비해 동안인 사람(그게 관리를 부지런히 한다는 의미 같아서)도 부러웠다. 그렇지만 그런 부러움은 잠시 반짝했다 사라지는 일시적인 것. 내가 가장 오랫동안 부러워한 사람은 책을 내고 작가가 된 사람이었다. 책을 낸다고 모두 인세를 많이 받고 유명 작가가 되는 것도 아닌데 대체 왜? 왜냐고 묻는다면 글쎄... 책은 그 사람의 세계이자 집이기도 하니까. 나는 작가가 오래 공들여 깊고 크게 구축해 왔을 자신만의 세계를 활자화함으로써 좀 더 뚜렷하게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를 부러워했던 것 같다. 마음 깊은 곳에 혼자 꽁꽁 담아두는 게 아니라 자주 들여다보면서 더 선명하게 만들고, 그것을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확장되는 세계를 말이다.
그래서 책을 사면 가장 먼저 작가의 말을 들여다봤다. 책의 맨 앞 또는 맨 뒤 페이지에 적힌 작가의 말에는 작가가 글을 쓰고 책을 내기까지 가장 심혈을 기울였을 의도와 목적, 그리고 책에서 독자들이 발견하기를 바라는 진짜 마음 같은 게 숨은그림찾기처럼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앞뒤로 책날개까지 펼쳐 작가 프로필을 읽다가 마음속 로망까지 가만히 꺼내보는 날이면 나는 어떤 이야기를 쓸 수 있을지 그려보곤 했다. 물론 조용한 상상의 마지막은 ‘에이, 내가 무슨’, ‘나는 특별한 재주나 콘텐츠가 없잖아’ 같은 말로 끝나곤 했지만.
그러고도 깨작거리는 날들이 이어졌다. 한번은 대학 친구와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고 ‘홍보세끼’(홍보 일로 삼시세끼 밥벌이한다는 의미)로 책을 내보자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인하우스 담당자(기업 혹은 기관의 홍보팀 내부 직원)였고, 나는 인하우스 담당자와 계약을 맺어 일하는 대행사 담당자였다. 우리가 하는 일은 ‘홍보’라는 공통점은 있으나 위치와 소속이 달라 생기는 업무의 차이, 갈등의 차이, 해결 방법이나 실행의 차이도 분명히 있을 테니 그것을 공개할 수 있을 만큼만 써서 함께 엮어보자고. 또 가능하다면 인하우스 담당자가 바라보는 대행사 담당자, 대행사 담당자가 바라보는 인하우스 담당자처럼 서로에게 불만이었던 점이나 아쉬웠던 점도 남겨보자고. 정작 알맹이(글)를 만들지 못해 아이디어는 아이디어로만 남았다.
어쩌면 그때 나는 일터에서 일하며 생긴 분노를, 답답함을, 짜증을 표출할 대상 같은 게 필요해서 써야겠다는 다짐만 공허하게 외쳤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글 한 편 제대로 쓰지 않으면서 책을 내겠다는 다짐만 숱하게 했을 수 있을까 싶어 하는 말이다.
그러다 지난여름 동네 도서관에서 두 달간 출판 제작 수업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왠지 지금이 아니면 다시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주저 없이 참가신청서를 제출했다. 첫날 강사님은 세 개의 키워드로 자기소개를 해보자고 했다. 만들고 싶은 책과 연관 지어도 좋겠다는 설명을 들었을 때 내가 생각한 단어는 #말-사람 #어른-육아 였다. 웹진 기사를 쓰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만난 사람들로부터 들은 말, 듣는 자리인 줄 알았더니 삶의 지혜를 두 시간 만에 속성으로 배우는 자리였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인터뷰이의 말들을 엮어 문장집을 내도 좋을 것 같았다. 아님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만 자라는 게 아니라 나도 자란다는 걸 알게 된 육아 이야기, 아이를 키우면서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다짐하게 된 순간들을 담아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의 첫 책, 첫 이야기라면? 이것이 내가 가장 솔직하게 하고 싶은 진짜 이야기일까? 내 발표순서가 되었다.
“저에게는 실패의 축적담이 많습니다. 장래희망의 실패, 재입사의 실패, 수주의 실패, 비빌 언덕을 찾지 못한 실패, 출장비 획득의 실패, 사장 설득의 실패, 신사업 기획의 실패 등등. 어떤 실패는 완전히 실패로 남았지만, 또 어떤 실패는 시도가 되어 새로운 세계로 확장되도록 길을 터주었죠. 실패를 실패로만 규정한다는 것은 그 의미를 얼마나 단순화하는 것인가, 또 얼마나 납작하게 만드는 것인가를 자주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실패의 자리에도 분명히 남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아주 개인적인 분투이자 씨름 혹은 발버둥이지만 그러한 실패가 시도로 읽혀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공감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에세이를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실패’라는 단어에는 독자들이 반응하지 않는다고, 구매 움직임이 일지 않는다는 말을 출판사 다닐 적 수차례 들었다. 독자들의 구매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실패’ 같은 단어보다는 매력적 제목이 붙어야 한다는 말도 자기계발서 제목회의 때 꽤 자주 들었다. 그럴 수 있다. 실패보다는 ‘성공’이야기에 끌리는 법이니까. 그렇지만 이건 나의 가장 솔직한 얘기니까 내게는 꼭 들어가야만 하는 단어였다. 그 단어는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해줄 좋은 실패, 실은 좋은 경험들인 까닭이다.(김신지 작가의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인용)
그렇게 ‘나의 실패시도일지’(가제) 책 만들기가 시작되었다. 이번 수업은 중도하차하지 않고 정말 끝까지 완주하고 싶어 나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는데 그것은 적극적인 학생이 되어보기로 한 것이다. 함께 수업 듣는 분들이 아이디어를 얻고 참고할 수 있도록 내가 갖고 있는 독립출판물을 챙겨가 빌려드리고, 각자 과제로 제출한 글 합평 시간에는 열심히 의견을 내고 더 나아질 방법을 고민했다. 수업을 듣다가 옆자리나 앞자리에 앉은 사람과 눈이 마주칠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얼굴 앞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파이팅 흉내를 냈다. 그렇게까지 한 이유는 하나였다. 우리가 다같이 포기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또 완벽하지 않더라도, 100퍼센트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처음이니까 도망가지 말고 해보자고. 내게도 충분히 응원을 해주고 싶었다.
그런 주문이 효과가 있었던 것인지 다행히 낙오하지 않았다. 두 주먹 불끈 쥐어 보였던 옆 사람도, 돌아가신 아버지의 자작시에 가족의 편지를 붙여 아버지를 기리는 편지를 책으로 만들어보겠다고 하셨던 분도, 우리는 같은 줄에 나란히 앉아 서툴지만 함께 노트북을 펼쳤다. 헤매면서도 끝까지 인디자인 프로그램을 붙들고 마지막까지 앉아 있었다. 책 사이즈는 어떻게 정했는지, 표지 디자인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본문 원고는 얼마나 완성되었는지 우리가 세세하게 중간점검하며 서로의 진행단계를 파악하진 못했지만 매주 화요일 같이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알게 모르게 마음이 든든했다. 결국 우리는 만들어내겠구나 확신이 들었다.
사실 수업도, 과제도 부담스럽고 힘들 때가 있었다. 매주 과제 마감이 있었는데 지키지 못할 까봐 새벽까지 노트북을 붙들고 있기도 했다. 그 이유는 어느 정도 써둔 글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글 쓰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물론 글이 있다고 다 실을 수도 없었다. 이 글이 의미가 있을까? 독자가 궁금해할까? 제목과 전체적 맥락에 어긋나지 않을까? 등등을 수없이 되물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몇 편의 글들이 본문에서 삭제됐다 또 다시 추가됐다. 오늘 괜찮은 글이 내일 다시 보니 이상한 적도 많았다. 그 반복된 과정을 몇 번 해도 부족한 부분이 보였다. 이게 완성형(?)으로 나아가고 있는 게 맞는지 확신을 갖기 어렵다는 점, 그래서 계속 자꾸 수정하는 데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어려웠던 것 같다. 그렇게 헤맬 때면 함께 수업을 듣는 분이 해주신 말이 힘이 되었다. “이상하면 뭐 어때요. 처음인데. 한번 해보는 거지.”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한번 해본 경험으로 도서관에서 출간기념회도 하고, 우수참여자로 선정돼 소감발표도 했다. 덕분에 진짜로 내 손에 가제본(샘플북)이 쥐어졌다. 펼치자마자 고치고 싶은 부분이 눈에 들어오지만 직접 만든 아주 작은 책이 무척 소중하다. 가족들에게도 보여주고, 진지하게 피드백을 받아 한 번 더 수정한 다음 시간이 부족해 못 쓴 글을 새로 실어 다시 제작해봐야지. 이번에는 직접 100부 혹은 200부 주문해서 동네서점에 입고 메일도 보내볼 계획이다. 안 팔려서 재고를 모두 내가 떠안아야할지 모르지만, 또 아주 조금이나마 팔려 누군가에게 나의 이야기가 도착한다면 그 또한 무척 가슴 벅찬 일이 될 것만 같다. 그러기 위해 다시 인디자인 프로그램을 열고 또 다시 밤마다 몇 번이고 마우스 스크롤을 올렸다 내리길 반복하더라도 포기하지 말아야지. 어떤 즐거움에는 반드시 고통이 수반된다는 것을 이번 여름 아주 뜨겁게 배웠으니까.
📌분량이 길어져 <코너 속 코너> 책방산책📚은 쉬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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