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사랑하니까

응답하라 1987년!_우나별

어쩌다, 1987년 경상남도 방기리까지 다녀온 이야기

2024.05.28 | 조회 1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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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요일들

우리들의 이상적인 시간 기록 일지


앞뒤 덮어두고 나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이 가끔 두려울 때가 있다. 오늘의 나의 솔직함이 훗날 나의 약점이 되어 나를 공격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오늘 내가 한 행동과 말이 또 누군가의 마음에 내가 의도치 않은 상처를 주진 않았을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기도 하다. 밤마다 나의 말과 행동을 후회하는 날이 많았다. 혹시나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불찰까지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날 밤 잠은 다 잔 것이나 다름없다. 불편하고 아픈 감정을 덤덤하고 지혜롭게 넘어가는 듯 포장을 하는 것이 어른스러운 행동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굳이 갈등의 중심이 될 필요도 없고, 조용히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하지 않아도 될 표현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냥 남 눈치를 보며 살았다는 말을 이렇게 장황하게 하고 있다. 그렇게 수많은 관계 속에서 매일 남에게 보여주기 좋은 나의 모습을 만들며 살아가는 또 다른 내가 말한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고, 이런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 비단 나 혼자뿐이겠냐고…

약 3년 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 전선에 뛰어들었다. 동시에 영국을 떠나 스페인으로 이주했을 때라서 나의 신변에는 무척 큰 지각 변동이 있었다. 주변에 아는 사람들도 없고 얼마든지 외롭고 힘들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감사하게도 온라인으로 좋은 사람들을 만나 함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는 것을 원래 좋아하긴 했지만 그동안 먹고살면서 아이들 키우느라 시간이 여의치 않았었다. 그리고 해외에서는 한국어 책을 만나는 게 그리 쉬운 일도 아니고 말이다. 영어책을 읽기도 했지만 한국어 책이 주는 편안함은 이길 수가 없다. 때마침 한국어로 된 책도 맘껏 읽을 수 있는 온라인 구독 서비스도 만났다. 이미 1년 반이 넘는 재택근무를 하면서 집에서 지내는 것에 편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던 내가 이제 나의 방구석에서 한국 책을 마음껏 읽고 사람들과 온라인으로 만나 이야기를 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거의 혁명에 가까웠다. 낯선 스페인에서 외롭고 힘들 틈이 없었다. 새로운 세상을 만나 매일 감사하며 참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책을 읽고 내가 알지 못했던 지식을 얻는 것도 무척 신나는 일이었지만 그보다 나를 더 열광하게 만들었던 것은 책이라는 열쇠가 그동안 열어보지 못한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먼지 쌓인 골방 문도 함께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몇 권의 책들을 통해 내가 갖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완전한 해답을 얻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풀지 못했던 문제들을 해결해 볼 만한 실마리들을 제공해 줬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아! 이것이 바로 독서의 힘이다. (독서 찬양, 간증의 시간인가?)

육아가 힘에 부쳤던 나를 이해해 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것들을 알아채기 시작했다. 어쩌면 알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냥 모른척했던 것들. 이를테면 나 자신에 대한 생각들 말이다. 뒤늦게 깨달은 점은 내가 지금까지 생각한 것보다 무척 내향적인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무척 감수성이 풍부하고 공감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차갑고 이성적인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가끔 나 자신도 익숙하지 않은 나의 본성이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기 때문이다.

직장 생활을 할 때 가끔 내가 차갑고 살갑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나의 그런 면모는 직장 생활을 하며 나를 보호하기 위한 가면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누군가를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라고 한계를 짓는 것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혈액형, 별자리, 띠 등으로 사람들의 성향을 나누는 것에 관심이 없다. 그리고 누가 예상 밖의 행동을 하더라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해 보려 한다. 상황에 따라 사람은 바뀔 수 있고, 모든 사람은 사정에 따라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처럼 살면서 학습한 외향적인 성격을 갖고 사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 사회생활을 위해 만들어진 성격 때문에 나처럼 매일 밤 괴로워하며 잠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20대 초반, 나를 자극하던 몇 안 되는 위로의 말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너답지 않게 왜 그래?"라는 말이었다. “나다운 것”이 뭐라고, 나를 얼마나 안다고 그런 말을 건네는 건지, 그땐 그런 말을 듣는 것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를 위로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더라도 내가 절대적으로 지양하는 말 중 하나가 이런 말이다. 세상에 온전한 나로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다양한 페르소나로 정비된 가면을 매일 상황에 따라 바꿔 끼고서 저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내면 아이 하나 데리고 사는 다 비슷한 처지 아니던가? 그래서 나는 함부로 상대를 하나의 기준으로 규정짓지 않으려고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내 아이들에게는 이것이 힘든지 모르겠다. (이것은 평생 풀어가야 할 영원한 나의 숙제이다. )

아이들의 행동과 말을 이해해 보려 노력하다가 어린 시절의 나는 어땠을까? 그때의 나라면 지금 엄마가 된 나의 말과 행동을 이해해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 올라갔다. 나는 초등학교( 당시 국민학교) 입학 전 약 3년을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지방에서 보냈다. 부모님 말씀에 의하면 어린 시절의 나는 참 당차고 적응력이 뛰어난 아이였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며 이사를 다녔는데도 가는 곳마다 그렇게 적응을 잘했다고 한다. 유치원을 한두 달 다니고 나면 지역 사투리도 구수하게 쓰고 말이다. 그래서 지금도 부모님은 해외를 전전하며 살아가는 나에게 "너는 아프리카를 가도 거기 현지인들처럼 잘 살 애야!"라고 하신다. (부모님은 나를 아직도 모르신다. 나는 더위를 많이 타서 아프리카에 절대 못 산다!)

아버지의 발령은 프로젝트마다 달랐지만 오랜 시간 한곳에 머물지는 않았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내가 가장 기억나는 내 또래 친구들은 많지 않다. 그중 내 기억에 오래 남아 있는 친구(?)는 바로 버스 차장 언니였다. 80년대 중후반에도 시골에는 일명 차장 언니들이 있는 버스가 많았었다. 내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할 때마다 친구들에게 혹시 내가 초등학교를 몇 년 꿇은 게 아니냐는 의혹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이다. 버스 차장 언니는 그 시절 나에게 우상 같은 존재였기도 했다. 아직 유치원을 다니던 나는 만 6세의 나이였다. 서울에서 내려온 엄마는 그 시골에서도 교육열이 대단했다. 오전에 통도사 초입에 위치한 부설 유치원을 다녔고, 유치원을 마치면 나는 피아노 학원, 미술학원, 그리고 주산학원까지 다녀와야 했다. 나는 읍내까지 혼자 버스를 타고 다녔다. 이를 가능케 했던 장본인이 바로 그 차장 언니이다. 40여 년 전 나의 엄마는 나를 혼자 버스에 태워 유치원에 보냈다. 엄마가 부탁을 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차장 언니는 나를 항상 언니 옆자리에 앉혔다. 당시 내가 냈던 차비는 50원이었다. 긴 하루 일과를 마친 나는 다시 버스터미널로 돌아와 차장 언니가 있는 버스를 탔다. 기껏해야 20대 초반이었을 그녀는 친절하게 나를 옆자리에 태우고 내가 살던 경상남도 울주군 삼남면 방기리 버스 정류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엄마 품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그 언니는 차장 언니 그 이상의 하원 도우미셨다. 그 이름도 모르는 차장 언니는 잘 지내고 계실지 문득 궁금해진다. 지금쯤 환갑이 넘으셨을 텐데, 진심으로 건강히 잘 지내시길 바란다. 이제 와 고백하지만 그 당시 나의 꿈은 버스 차장 언니였다. 버스에 타고 내리는 사람들의 버스 삯을 받고 거스름돈도 척척 내어주고 나서 문을 닫고 자신감 있게 큰소리로 오라이를 외치던 언니. 그 언니가 착용하던 살구색 장갑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돈 새기 편하라고 엄지와 검지 마디를 잘라낸 장갑이었다. 그걸 집에서 따라 해 보겠다고 겨울 손가락 장갑에 손가락을 다 잘라서 엄마한테 혼이 났던 기억이 떠오른다.

내가 살던 방기리에는 개천이 흘렀다. 그리고 꼬맹이들이 많이 살았다. 나이대도 다양했다. 아직 유치원생이었던 나를 깍두기처럼 초등학교 언니 오빠들이 같이 데리고 다녀줬던 고마운 기억이 있다. 우리는 산으로 개천으로 개구리를 잡으러 다녔고, 비가 온 뒤 개천이 불면 개천에 내려가 상류에서 떠내려온 쓰레기들을 주우며 놀았다. 그곳의 지질이 그랬는지 모르지만 비가 온 뒤 땅을 파면 빨간 찰흙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흙들이 쫀득하게 뭉쳐졌다. 아이들이 뛰어놀기에는 더없이 탁월한 동네였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내 머릿속에 모든 장면은 아직도 선명하다. 동네에 언덕이 많았는데 내 몸집의 두 배 이상은 되었음직한 큰 돌 두 개가 동네 언덕에 박혀있었다. 그 두 개의 돌 사이는 나 혼자 딱 들어가 앉을만한 공간이 있었다. 그곳은 나만의 아지트였다. 나는 그곳에다 동네 개천에서 주어온 잡동사니들을 숨겨 두었고, 축축한 나무 밑에서 파온 빨간 찰흙으로 이것저것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당연히 여기저기서 주워온 나뭇가지와 돌멩이들도 한자리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곳은 6살 어린이의 온전한 ‘나만의 방’이었다.

87년 가을 무렵, 이듬해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나는 엄마와 동생과 함께 다시 서울 집으로 올라왔다. 나의 입학을 시작으로 부모님의 기나긴 주말부부 생활도 막이 올랐다. 나는 자라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곳에 다시 찾아간 적이 없다. 그런데 얼마 전 우연히 인터넷으로 지도를 보다가 이 동네를 찾아보고 반가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나는 이때를 가장 행복하고 마음이 편했던 시절로 기억하고 있다. 많은 통제와 간섭 없어 그랬을까? 분명 무의식 속에 내가 그 기억을 의식적으로 붙들고 있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내 아이들을 이해하고 싶을 때 이런 경험의 조각들을 조금씩 꺼내어 보려고 그랬나? 하는 생각도 했다. 매일 육아에 치여 살지만, 가끔 아이들이 살아가면서 한두 개쯤 붙잡고 살만한 행복한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어떻게 하면 만들어 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기도 한다. 삶이 때론 힘이 들어도 부여잡고 살만한 힘나는 기억과 경험들.

얼마 전 친정에서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썼던 일기장 몇 권을 발견했다. 그 빛바랜 공책에 수북이 쌓여있는 글을 읽으면서 어린 시절의 내가 참 귀엽고 대견하다고 생각을 했다. 동시에 '이런 일이 있었었나?' 전혀 기억나지 않았던 서운한 순간들도 함께 적혀있었다. 나의 또 다른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들을 찾은 셈이다. 하나씩 내 안의 나를 찾아가는 일들이 보물 찾기보다 흥미롭다.

돌아보니 나는 어렸어도 혼자서도 풍성하게 즐길 줄 아는 아이였고, 어린 내가 추구했던 행복은 남을 만족시키고 거기서 인정받거나, 남이 나를 위해 만들어주는 행복이 아니라 작지만 내가 소중한 것들을 지키며 간직하는 것들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학교에 입학하고 학업에 대한 개입과 간섭이 들어오기 전까지 나는 부모님을 참 사랑하고 잘 따랐던 것 같기도 하다. 생각보다 나는 내향적이었지만 무척 독립적이고 용감한 아이였던 것 같다. 자라면서 경험한 수많은 간섭과 통제들이 오히려 나를 반항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부모가 된 나의 모습으로 또치와 까치의 입장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내가 미워했던 어른의 모습으로 아이들 앞에 서 있다는 게 씁쓸했다.

아이들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아이들이 충분히 스스로의 역량을 테스트해 볼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율성은 주어야 하는데, 그게 참 힘들다. 그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나의 불안도가 높아 그런 것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얼마 전 똑같은 실수를 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또치와 까치를 다그치다가 내 분에 못 이겨 눈물까지 보였던 나의 어리석은 모습을 반성한다. 믿어주면 잘 하는 아이들인데 자꾸 잔소리를 1절도 아니고 3-4절까지 하고야 마는 나의 입을 좀 틀어막고 싶을 때가 있다. 아직도 나는 더 배우고, 더 스스로를 단련해야 할 것 같다. 얼마나 내공을 더 쌓아야 할지 모르겠다.

나를 알아가는 동시에 내 부모님이 내게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 하지만 내가 부모가 되고 보니 나의 부모님 또한 얼마나 당신들의 부모님이 하신 실수를 우리에게 되풀이하지 않으려 얼마나 노력하고 공부하셨을지 헤아리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

나의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태어나자마자 돌아가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셨다. 나중에 아빠가 되면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주겠다는 생각을 항상 하셨다고 한다. 아버지의 사랑이란 것이 무엇인지 경험해 보지 못한 나의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 훌륭한 아버지의 역할을 해내셨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 엄마의 오래된 일기장을 본 적이 있다. 얼마나 우리를 잘 양육하고 싶으셨는지 육아서가 요즘처럼 흔하지 않던 시절, 라디오와 신문 잡지에서 스크랩을 해가며, 그리고 책을 읽으며 공부하셨던 흔적을 보았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간절한 기도들.. 서른다섯에 엄마가 된 나, 그리고 스물다섯에 엄마가 된 우리 엄마. 그 어린 엄마의 기도를 나는 이제야 다시 기억해 냈다.

이 세상 부모의 마음은 다 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의 결핍이 자식에게 대물림되지 않도록 그동안 자라온 양육환경과는 다르게 나의 아이를 키워보고 싶다는 간절함 말이다. 요즘은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만 봐도 그렇다. 어떻게든 내 자식을 잘 키워보려고 노력하는 부모들이 참 많다. 그런데 가끔은 넘쳐나는 육아서, 강의, 부모 수업 등이 나를 꺾이게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되겠다는 생각보다 ‘아, 나는 하지 말라는 것만 하고 있네?’ '난 이미 늦었네...' 이런 생각도 자주 드는 탓일 것이다. 그렇다고 정말 무너지지 말아야 할 것이 또 부모 역할이 아닌가 싶다. 수백 번 꺾여 넘어져도 다시 수백 번이고 우리 아이들을 위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우리 부모가 해야 할 일인 것 같기도 하다. 별것도 아닌 글을 쓰면서 조금씩 나의 생각도 정리되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생각이 얼마 안 있어 또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

완벽하지 않은 내가, 완벽하지 않는 남편을 만나서 완벽하지 않은 세상에 아이들을 일방적으로 초대했다. 그런 우리 아이들에게 완벽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큰 욕심이라고 생각한다. 아! 이것이 내가 잔소리를 줄여야 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어제도 꺾였지만, 오늘 또다시 일어나 보려고 한다. 다정하게 바라봐 주고, 입을 좀 닫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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