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사랑하니까

그냥 버려지는 시간은 없다_우나별

2024.09.10 | 조회 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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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요일들

우리들의 이상적인 시간 기록 일지

2020년 1월 어느 날 오후.

이제 곧 퇴근시간이다. 날이 추워서 그런지 아침저녁으로 아이들 기침소리가 더 잦아졌다. 그래서 오늘 저녁 메뉴는 닭곰탕이다. 뜨뜻한 국물을 좀 먹이면 아이들 원기 회복에 좋지 않을까? 닭곰탕을 만들려면 집에 가기 전에 잠깐 슈퍼마켓에 들러 닭고기를 사야 한다. 정신없이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컴퓨터를 껐다. 조금 서둘러야 아이들 픽업하기 전에 슈퍼에 들러 장을 볼 수 있다. 혹시 몰라 남편에게도 전화를 해 두었다.

우리 동네 슈퍼마켓은 영국 왕실에 식자재를 납품한다는 마켓으로 영국의 다른 슈퍼마켓들 보다 가격이 조금씩 비싸고, 묶음으로 파는 행사를 잘 하지 않는다. 슈퍼마켓 멤버십 카드가 있으면 신문과 커피 또한 매일 한 번씩 무료로 제공되는 곳이니 대량으로 식자재를 사들이지 않는 내가 이곳을 종종 들락거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주차를 하고 슈퍼 안으로 들어가 닭곰탕을 만들 유기농 닭고기 코너로 갔다. 역시 고급스럽게 포장된 닭고기가 냉장 코너에 예쁘게 진열되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나 통닭이 없으면 닭 다리라도 사려고 했는데 다행이다. 기분 좋게 통닭 한 팩을 집어 들던 그때였다. 긴 냉장 진열대에 깔끔하게 포장된 고기들이 보인다.

‘이 많은 고기는 다 어디서 왔을까? ‘

아이들 픽업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나는 얼른 계산대로 향했다. 내 아이가 마지막으로 픽업되는 것은 피하고 싶은 것이 대다수 워킹맘들의 마음이 아닐까 믿는다. 나 또한 그랬고 말이다. 나는 얼른 다른 필요한 물건들만 빛의 속도로 집어 들고 빠른 발걸음으로 아이들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참 행복했다. 하루 일과를 마친 우리 넷이 춥고 어두운 저녁 길이지만 이렇게 따뜻하게 서로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 길이 나에게는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꽃 길과 같았다. 어디든 아름답지 않겠는가? 이들과 함께 있다면..

집에 들어오자마자 남편은 아이들을 씻겼고, 나는 저녁식사 준비를 했다. 어차피 어린이집에서 저녁을 먹고 하원을 하는 아이들이지만 항상 뭐가 됐더라도 한 끼는 내 손으로 해주고 싶은 마음에 아이들이 단 한 숟가락을 먹더라도 나는 항상 따뜻한 저녁밥을 지었다. 기특한 우리 아이들은 그런 엄마 마음을 아는지 마치 하루 종일 굶은 아이들처럼 그날도 닭곰탕을 그릇 바닥일 보일 때까지 싹싹 긁어먹어줬다.

아이들을 재우고 누워 핸드폰으로 유기농 온라인 마켓 몇 곳의 웹사이트에 접속했다. 냉장고가 텅 비어있어서 뭐라도 좀 주문하고 자야 할 것 같았다. 아까 10분만 더 여유가 있었으면 장을 더 봤을 텐데 너무 아쉬웠다. 온라인 마켓에서는 유기농 고기를 구매하는데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하지만 이 많은 종류의 고기들을 항상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날은 평소에 없던 고기 부위도 있었고, 어떤 날은 내가 원하는 고기의 부위가 없기도 했다. 어쩌면 이는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무슨 공장도 아니고 매일 똑같은 부위의 고기를 그렇게 많이 생산할 수가 있단 말인가?


2020년 3월..

코로나 때문에 세상이 시끌벅적하다. 처음엔 중국이라는 먼 나라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코로나는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곧이어 유럽을 강타했다. 전염병이 확산되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다며 연일 코로나 관련 뉴스가 전해졌다. 그리고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날은 퇴근을 조금 일찍 해서 슈퍼마켓에 잠시 들른 날이었다. 오전에 아이들이 계란찜을 해달라고 했는데, 계란이 똑떨어져서 오늘 저녁에 사 온다고 약속을 했던 터였다. 슈퍼마켓에 딱 들어섰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평소와는 다른 서늘함까지 느껴졌다. 진열대가 텅텅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아차 싶었다. 항상 유기농만 고집하고 유난을 떨며 아이들 먹거리를 챙기던 내가 살 수 있는 것들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유기농은 고사하고 내가 그냥 한 발짝 늦었다. 아니 아주 많이 늦었다. 당황한 나는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 저녁을 어떤 정신으로 해줬는지도 모르겠다. 일단 급하게 온라인으로 슈퍼마켓 웹사이트에 접속했다. 그런데 배송 예약이 다 차서 그런 건지, 웹페이지가 마비가 된 것인지 결재창으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 지역 엄마들이 모여있는 whatsapp 채팅방 (한국으로 치면 엄마들 지역 단톡방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것 같다)도 난리다. 다들 식재료 수급에 비상이 걸렸다. 우리 집보다 더 어린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집에 분유가 동이 난 집도 있고, 기저귀를 구하지 못했다는 집도 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밤 정부 발표가 있었다. 락다운(lockdown)이란다.

그렇게 영국의 모든 것이 멈췄다.

온라인 마켓 배송 예약도 성공하지 못했던 나는 이튿날 아침 슈퍼마켓 여는 시간에 맞춰 장을 보려고 집을 나섰다. 문을 열려면 한참은 더 기다려야 하는데 이미 기다리는 줄이 슈퍼 건물 한 바퀴를 다 두르고 주차장까지 이어졌다. 슈퍼마켓 안은 너무 한산해서 평화롭게 보이기까지 하다. 나오는 사람들의 수에 맞춰 입장하는 사람들의 수에 제한을 두고 있어서 슈퍼마켓 문을 연지 한참이 지났지만 슈퍼 안으로 들어가는 줄은 여전히 길게 늘어져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 드디어 입장한 슈퍼마켓.

이제 텅텅 비어있던 진열대에 다시 예쁘게 상품이 진열되어 있다. 직원들이 밤사이 열심히 채웠나 보다. 어제 텅텅 비어있던 슈퍼마켓을 한 번 보고 나니, 기분이 묘해진다. 특히 자꾸 신경이 쓰였던 고기 코너를 보고 있자니 말이다. 밤새 어디서 이렇게나 많은 고기들이 온 걸까?

찝찝했던 마음을 뒤로한 채, 나는 아이들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열심히 카트에 담았다. 유기농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았다. 집에 있지만 혹시 모르니 화장지도 괜히 한 팩 담아본다. (당시 이상한 소문이 돌아 영국에 화장지 대란이 있었다.)

그렇게 락다운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이 모든 것이 그냥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혼돈의 세상이다.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지내는 락다운 생활은 무척 고단했다. 일도 해야 했고, 밥도 해야 했고, 어린이집에 안 가고 새벽부터 엄마 아빠랑 집에서 놀 수 있어 행복한 아이들과 뭐라도 하면서 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리고 전쟁 같던 식재료 구매미션. 잠을 자다가도 눈을 뜨면 시도 때도 없이 식재료 배송 예약 창을 새로고침 하기 바쁘다. 주로 새벽에 창이 열려서 잠결에라도 계속 그렇게 해야 했다. 그러다 어쩌다 운이 좋으면 예약을 잡을 수 있다. 운 좋게 성공한 온라인 쇼핑 배달 예약! 드디어 그날이 왔다. 식재료가 배달되기 며칠 전부터 열심히 냉장고를 털어먹고 새롭게 배달될 식재료를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식재료를 배달 받아 냉장고를 채우면서 나는 처음으로 다른 충격에 휩싸였다. 슈퍼마켓에서 매일 조금씩 장을 봐서 소꿉장난하듯 살림을 하던 내가 이렇게 대량으로 식재료를 구매해 본 적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놀라운 것은 배달시킨 식재료의 양 만 큼이다 함께 딸려오는 포장재의 양도 어마어마했다. 그걸 몽땅 또 내다 버리는 일도 큰일이었다.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다시 집 밖으로 버려지는 포장재들...

'우리 다 먹고살자고 일하는 건데! 이럴 때일수록 더 잘 챙겨 먹어야 해!' 이런 말들을 매일 속으로 얼마나 되뇌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악몽 같은 록다운 생활이 익숙해져갈 때쯤이다. 몇 개월이 지났는데 상황이 더 나아지기는커녕 매일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가 시뻘건 숫자로 집계된다. 온 세상이 서바이벌 게임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우스운 생각도 들었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세상을 살고 있고, 우리 아이들은 앞으로 어떤 세상을 살아갈 건인가? 정말이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팬데믹이 시작되고 집에 갇혀 지낸지 반 년이 다 되어가는 8월이 되었다. 아이들을 재우고 또 식재료 쇼핑을 하면서 혼자 와인을 한잔할 때였는데, 그 때 문득 예쁘게 포장되어 슈퍼마켓 진열대에 있던 각종 고기들이 어디서 왔는지 정말 찾아보고 싶어졌다. 나는 친정 아빠가 가꾸시는 텃밭에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자라던 깻잎과 상추들을 봐서 알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서 얼른 따먹어야 하는 채소들과는 달리 고기는 새끼가 태어나 도축을 할 수 있을 만큼 키우는 데 시간이 걸린다. 내가 엄마가 되어놔서 그런지 아이들이 상추처럼 쑥쑥 자라지 않는다는 것도 너무 잘 안다. 얼마나 잘 먹이고, 잘 씻기고, 잘 재우고, 또 기분 좋게 만들기 위해 애써야 하는지 말이다.

그래서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채식, 환경, 동물권 등에 대한 책들을 접했다. 다큐멘터리도 찾아보았다. 특히 한승태 작가의 ‘ 고기로 태어나서..’라는 책은 거의 나에겐 충격에 가까웠다. 현실은 생각보다 더 혹독하고 잔인했다. 문득 몇 년 전 우연히 봤던 봉준호 감독의 ‘옥자’라는 영화도 생각이 났다. 괜히 찾아봤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점점 나의 시선이 예쁘게 포장된 고기들 너머로 향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고기를 입에 대는 게 너무 죄스러웠다. 멜라니 조이의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라는 책은 내가 당연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어떻게 그냥 당연한 것이라고 내가 생각하게 되었는지 한 번 더 나 자신에게 물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마음이 많이 복잡해졌다. 참으로 별난 사람이다. 나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 여파로 나는 약 1년 반 동안 비건으로 살았다. 고기는 물론이고, 어류와 유제품 등을 피했다. 음식뿐만 아니라 되도록 동물을 상대로 실험하지 않고 동물성 원료를 사용하지 않은 제품들을 구매하기 시작했다. 무척 드라마틱 하게 모든 걸 끊었던 시간이었지만 영국에서는 불편하다는 생각을 하기 힘들었다. 나중에 한국에 나오고 다시 스페인으로 건너가며 느낀 것이지만. 영국이 생각보다 비건으로 살아가기 편한 나라였던 것 같다.

지금도 여전히 육식보다는 채식을 즐기는 채식 지향으로 살고 있지만 그때처럼 엄격하게 비건으로 살고 있진 않다. 그러나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의식적 소비하는 습관이 길들여진 것 같긴 하다. 그리고 내가 살았던 자리가 내가 떠나고 난 뒤 쓸데없이 어지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지속적으로 하면서 살아가는 것도 말이다. 그래서 웬만하면 쓰레기를 많이 만들어내고 싶지가 않다. 현대 사회에서 특히 도시에 살아가면서 100% 무결하게 살아가기는 힘들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모든 힘이 우리 개인에게서 나온다고 믿는다. 그래서 한 명의 엄격한 비건인이 가지는 힘 보다, 어쩌면 수천, 수만 명의 채식을 지향하는 사람들과 의식적인 소비를 해나가는 사람들의 힘이 더 클 것이라 믿는다.

지긋지긋하고 지옥 같았던 팬데믹을 통해 내가 정말 잃은 것 밖에 없었을까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면, 나는 덕분에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오만한 존재인지, 그러나 한없이 약한 존재인지를 깨달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자연과 연결된 작은 고리들도 함부로 하찮게 여기며 끊어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말이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산불조심 포스터나 쓰던 나의 어린 시절과는 다르게 지구 온난화와 심각한 환경오염, 그리고 또다시 올지도 모를 팬데믹의 걱정을 안고 살아가야 할 아이들 세대를 생각하면 부모로서, 어른 세대로써 내가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주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나 같이 생각의 폭이 넓지 못한 사람은 엄마가 되지 않았으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것들이다. 이렇게 보면 매일 감사하지 않을 일들이 없다. 매 순간 우리는 배움의 기회들을 얻기 때문이다. 어쩌면 정말 내 삶 속에 아무것도 아닌 채로 버려지는 시간들은 없는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사랑한다. 나 자신을, 나의 아이들을, 그리고 나와 연결되어 있는 이웃들과 아직 내가 알아채지 못한 모든 것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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